[유상우 신부] 3월 22일(사순 제4주일) 1사무 16,1ㄱㄹㅁㅂ.6-7.10-13ㄴ; 에페 5,8-14; 요한 9,1-41

‘신자(교우)들과 함께 드리는 미사’가 중단된 지 이제 한 달이 다 되어 갑니다. 미사가 언제 재개될지 아직 명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선교나 교포사목으로 외국에 가 계시는 선배 신부님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어보면 다른 나라들의 상황도 녹록치 않은 것 같습니다. 이탈리아는 물론이요 교황님이 계시는 바티칸 역시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미사와 성삼일 전례를 ‘신자들과 함께’(Cum Populo)가 아니라 신자들의 참례 없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지 못하고 혼자 미사를 봉헌하는 신부님들의 안타까움도 더 커지고 있습니다. 그 안타까움을 조금이라도 줄여 보고자 노력하시는 분들의 노력 역시 마주합니다. 많은 미디어 매개체를 통해서 복음을 알리려는 사목자와 방송미사나 가정에서의 기도 등을 통해 신앙의 여정을 이어 나가는 교우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가톨릭 신앙이 가지고 있는 굳건함을 새삼스레 다시 한번 느끼게 됩니다.

예전 본당에 있었던 분들께서 가끔 안부를 전해 오시면서 묻습니다. “신부님은 미사 어떻게 드리세요? 거기는 조용한(?) 곳이니깐 조용히(?) 미사 좀 드리러 가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말이지요. 그 물음에 녹아나는 안타까움이 절로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저도 조용히 말씀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저 역시 본당에 있는 사제는 아니지만 홀로 미사를 봉헌하는 것에 조금씩 적응이 되는 제 모습이 낯설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번 주일 복음을 묵상하다 보니 제가 혼자 드리는 미사에 대해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혼자 미사를 드리다 보니 나에게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우 분들과 함께 미사를 드리면 많은 것이 그 미사에 참여하는 교우 분들에게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예를 들면 어린이 미사와 교중 미사의 강론 내용이 완전히 같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지요. 강론 준비부터 많은 전례적 준비가 미사에 함께하는 교우분들에게 맞추어져 있는데 혼자 미사를 드리다 보니 내 내면에 많은 신경을 쓰게 됩니다. 얼핏 보기에는 무슨 말이냐 싶으시겠지요? 

코로나로 인해 혼자 미사 드리던 첫날. ⓒ유상우

이번 주일 복음은 우리가 잘 아는 이른바 ‘태생 소경의 치유’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인식은 복음에서 충분히 예측해 볼 수 있습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요한 9,2)라는 제자들의 말에서도 드러나는 바와 같이 사람들의 눈에 그 소경은 죄인이었습니다. 그 소경이 눈을 뜨게 됩니다. 눈을 뜨고 나서 그 소경이 던진 첫마디는 바로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9,9)라는 말입니다. 자신을 죄인 취급했고 무시했던 사람들에게 무언가 다른 이야기를 할 법도 한데, 아니면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지나칠 법도 한데 다른 말도 하지 않고 눈뜬 사람이 바로 자기라고 이야기합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는 소경의 대답에서 혼자 미사를 드리고 있는 저의 모습을 녹여 보았습니다. 바로 나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을 사람은 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부끄럽지만 사목을 하면서 미사를 비롯한 많은 성사를 집행하면서 상대방에 대해 생각한 적은 많지만 나 역시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종종 잊고 살아갑니다. 그런 저에게 혼자 미사를 드릴 수밖에 없는 이 시기는 또 다른 은총의 시기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미사를 드리면서 다가오는 성경의 말씀과 전례문의 내용들이 나의 내면에 다가오는 것이지요. “교황 프란치스코와 저희 주교 요셉과 모든 성직자와 더불어 사랑의 교회를 이루게 하소서.” 교회의 일치를 기원하는 이 미사 경문에서 평소에는 다른 신부님들과 부제님들을 기억했다면 혼자 드릴 때야 비로소 ‘사랑의 교회를 이루어야 할 모든 성직자’의 자리에는 저의 몫도도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모습처럼 말입니다.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는 태생 소경의 외침이 우리의 목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치유받아야 하고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 나 자신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신앙의 체험을 할 때 내가 하느님을 느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바로 복음의 태생 소경처럼 말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나라고 증언한 그는 자신 있게  “주님, 저는 믿습니다.”(요한 9,38)라고 외칠 수 있게 됩니다. 현실을 무시하거나 도피하지 않고, 아픔을 딪고 일어설 수 있는 신앙적인 방법을 오늘 복음에서 배웁니다. 치유받아야 할 사람이 나이며 그 치유를 받은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알고 알리는 것 말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느님의 목소리를 좀 더 명확하게 들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일 1독서를 봅시다. 주님께서는 양을 치고 있던 다윗을 부르십니다. 아이가 오자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1사무 16,12) 그렇게 주님께서는 당신의 뜻에 따라줄 이를 명확하게 부르십니다. “바로 이 아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에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요한 9,9)라고 응답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유상우 신부(광헌아우구스티노)

부산교구 감물생태학습관 부관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