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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감염, 미사와 예배는?[특별기고 - 조현철]

코로나19 감염이 파죽지세로 번지면서 교회의 ‘주일 예배’가 사회적 논란이 되었다. ‘신천지’ 집회가 극명하게 보여 주듯이 밀폐된 실내에 다중이 참여하는 종교 행사는 감염 확산의 기폭제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종교 행사에 대한 사회적 우려가 커졌고, 정부 당국도 종교계의 자제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천주교와 불교는 당분간 모든 미사와 법회를 중지했고 상당수 개신교 교회도 예배를 온라인으로 대체했다. 주일 예배 중단이 “하느님 앞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될 것”이라며 취소에 부정적이다가 막판에 방침을 바꾼 교회도 있었지만, 일부 교회는 현장 예배를 예정대로 강행했다.

그리스도교의 ‘주일’은 구약성경의 ‘안식일’에 그 기원을 둔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안식일의 정신은 타인, 특히 사회적 약자를 지향한다. 안식일에는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너의 소와 나귀, 그리고 너의 모든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여 너의 남종과 여종도 너와 똑같이 쉬게 해야 한다.”(신명 5,13-14) 안식일 계명은 안식일 준수의 요구는 주인에게 종속된 ‘약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내가 일할 수 있지만 일하지 않음으로써 약자를 보호하려는 안식일 정신은 타자를 배려하는 자발적 ‘자기 제한’이다.

우리는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과 마감하는 ‘성 금요일’에 단식을 하도록 초대된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단식은 단순히 한 끼를 거르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에게 향기로운 단식은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을 사람을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다.(이사 58, 6-7) 성경이 말하는 단식은 억압받는 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향한 관심과 배려와 연대의 표현이자 실천이다. 먹을 수 있지만 먹지 않는 단식 또한 사회적 차원의 자기 절제다.

그러니 참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 앞에 감당하기 어려운 것”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여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아모스서) 하는 예배의 근본을 망각한 채 외형적 예배에만 골몰하는 일이다. 코로나19 감염으로 사회 전체가 위험에 처한 위급한 상황에서 미사나 예배의 취소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연대를 나타내는 사회적 차원의 자발적 절제다. 그러니 주일 미사와 예배의 강행이 아닌 취소가 오히려 주일의 기원인 안식일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예배와 미사의 참된 의미를 성찰하고 그 정신을 쇄신하는 소중한 기회가 될 수 있다.

서울시내버스에 붙은 사회적 거리 두기를 위한 2주간의 '잠시 멈춤' 캠페인 안내. ⓒ왕기리 기자

감염이 급속히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이른바 ‘사회적 거리 두기’가 제안되고 있다. 사회적 거리 두기는 우리 모두는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고 그래서 그만큼 서로 의존하고 영향을 주고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인정하는 데서 비롯되는 사회적 절제 행위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절제에 비롯되는 거리 유지는 ‘너’의 배제가 아닌 배려를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세상을 절대적으로 초월하는 존재다. 하지만 유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하느님은 또한 언제나 역사의 하느님이다. 성경의 하느님은 세상과 무관한 ‘저 높은 곳’에 있는 철학의 신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살아 있는 신, ‘야훼’다. 사회의 약자들에게 필요한 공정과 정의를 요구하는 연민의 신이고, 불의를 저지르는 세상의 권력자들을 가차 없이 비판하는 분노의 신이다. 또한 회개하고 돌아서는 사람은 언제나 받아들이는 용서와 화해의 신이기도 하다.

초월과 현존은 하느님 안에서 온전한 통합을 이루고 있으며, 이 통합의 정점에 강생의 신비가 있다. 세상을 무한히 초월하는 하느님이 자신을 비우시고 세상의 일부가 되신 육화 사건은 하느님의 초월과 현존의 온전한 결합, 하느님 사랑의 절정이다. 육화의 결과인 나자렛 예수는 하느님과 사람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을 이어 주는 삶을 자신을 온통 내어 준 십자가까지 끌고 갔다. 요컨대 세상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초월은 세상에서 하느님 현존의 배제가 아니라 그 가능성의 조건이다. 하느님은 신적 초월성으로 세상의 모든 피조물 안에 무한한 깊이로 현존하고 감싼다. 그렇게, 하느님과 피조물의 무한한 거리가 이어진다.

하느님과 피조물의 ‘거리’에 내포된 이중성의 통합은 사회적 거리가 타자의 배제가 아닌 배려를 지향한다는, 지향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거리 두기에는 반드시 ‘거리 잇기’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거리 두기와 거리 잇기는 모두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와 연대를 표현하는 방식이다. 세상에는 잠시의 사회적 거리 두기로도 고통을 받는 이들, 감염보다는 당장의 생계가 더 걱정인 이들이 많다. 이들이 사회적 거리 두기의 희생자가 되지 않도록 챙기는 일은 일차적으로는 정부에 속할지 몰라도, 정부만의 몫은 아니다. 정부만으로 가능한 일도 아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에게 가능한 방식으로 사회적 거리 잇기에 참여하는 것은 주일 미사나 예배의 취소로 사회적 거리 두기에 참여한 것만큼이나 안식일 정신을 실천하는 일이며, 미사나 예배의 정신을 한층 더 고양시키는 행위가 될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몰고 온 재난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은 결국 우리들의 보이지 않는 연대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거의 세계 전역에 퍼진 판데믹(모든 사람) 수준의 코로나19의 가장 강력한 해독제는 아마 판데믹의 연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리베카 솔닛의 말대로, 재난의 현장에서 약육강식의 아수라장이 아니라 ‘재난 유토피아’가 피어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연대의 힘이다. 연대가 재난보다 강하다는 진실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 보여 주었으면 좋겠다. 

 
 

조현철 신부(프란치스코)

예수회, 서강대학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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