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제에서 만난 나 그리고 청년들]

'헤로니모', 전후석, 2019. (포스터 제공 = 커넥트픽쳐스)

요즘 영화 ‘기생충’으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떠들썩하다. 참석하는 영화제마다 줄줄이 수상하고 있어서, 전 세계에 한국영화의 품격과 위상을 올려 놓았다는 자긍심, 자랑스러움을 국민들에게 선물해 주고 있다. 비슷하나 다른 결의 애국심을 느끼게 해 주었고 큰 울림을 주었던 작년 말에 개봉한 영화 ‘헤로니모’를 소개하고 싶다.

지난해 봄, 서울 사직동에 있는 수도교회에서 떼제의 하루피정이 열렸다. 프랑스 떼제공동체의 일상처럼 하루를 함께 모여 같이 기도하고 식사하고 나눔을 하는 그런 일정이었다. 150명 내외로 모여 하루 동안 같이 찬양하고 기도하며 나누는 교류의 시간은 참 따뜻하다. 또 새로 만나는 사람들과도 떼제 공동체에 다녀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금세 언제 다녀왔는지, 무엇이 좋았는지 서로의 경험 속의 공통점을 발견하며 쉽게 친해진다. 떼제의 수사님들과 함께하는 이 하루피정은 거의 매년 이루어지고 있고 올해에도 5월 16일 수도교회에서 진행될 예정이다.

그러다 몇 년 전, 떼제에 다녀왔다는 젊은 영화감독을 만났다. 원래는 미국에서 일하는 재미교포 변호사이고 이번에 ‘헤로니모’라는 영화를 개봉한다고 했다. 영화는 쿠바에서 만난 한인에 대한 이야기라고 들었는데, 영화감독의 존재부터 특이했다. 원래부터 영화제작을 한 사람이 아니고 변호사인데, 이번 영화를 계기로 감독이 되었다니 ‘도대체 무슨 내용의 영화길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정 후 뒤풀이 자리에 전후석 감독도 동행했는데 사람이 많았고 다른 테이블에 앉아서 간단한 영화에 대한 설명만 들을 수 있었기에 여전히 내게 ‘헤로니모’는 호기심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지난 11월 말, 그 영화 ‘헤로니모’가 여러 영화관에서 개봉을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용산CGV에서 VVIP시사회로 정우성 배우, 강경화 외교부장관, 노사연, 이무송 가수 등이 참석했다는 뉴스도 보았다. 반가운 소식에 한걸음에 달려가서 보고 싶었으나, 연말이 되어서야 독립영화관에서 관람할 수 있었다.

'헤로니모' 스틸이미지. (이미지 출처 = 커넥트픽쳐스)

헤로니모 임, 임천택, 그리고 독립을 위해 헌신한 무명의 멕시코, 쿠바 한인들

영화 ‘헤로니모’는 헤로니모 임(임은조)이라는 인물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다. 그는 쿠바의 한인으로 쿠바혁명의 주역이었으며 또 쿠바의 한인회를 재건한 인물이다. 일제 치하에 많은 이가 해외로 난민이 되어 떠난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대부분 러시아, 중국, 하와이 등으로 간 것은 알고 있으나, 멕시코와 쿠바로도 조선인들이 피난 갔었던 것은 잘 알려 있지 않았기에 이 영화를 통해 쿠바의 한인들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영화는 전후석 감독이 2015년 쿠바 여행 중에 헤로니모의 딸과의 우연한 만남으로, 그녀의 집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헤로니모의 아내가 자랑스럽게 늘어놓는 헤로니모가 정부로부터 받은 훈장 9개와 그의 혁명기는 헤로니모에 대해 궁금증과 호기심을 자극하게 하고, 그의 역사, 즉 쿠바 한인의 가슴 아픈 역사를 경쾌한 음악과 함께 빠른 전개로 소개한다.

1905년, 조선인 1033명이 멕시코행 배를 탔고, 멕시코에서 애니깽(선인장) 농장 22곳으로 팔려 갔다. 그곳에서 고용보다는 감금되어 선인장 가시에 온몸이 찔리고 채찍질 당해 가며 선인장을 잘라 푼돈의 월급을 받는 노예생활을 했다. 조국으로 다시 돌아가리라는 희망 하나로 버티던 그들에게 1910년 한일합병의 소식은 돌아갈 조국이, 국가가 사라졌던 꿈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그중에서 288명은 1921년 쿠바로 이주했고 돌아갈 조국을 되찾기 위해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끼니마다 한 숟갈씩 모아 상해임시정부로 독립 자금을 보냈다. 그 일을 주도한 사람이 유해가 되어서야 독립운동가로 인정돼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온 임천택, 헤로니모 임의 아버지다.

임천택은 2살에 어머니의 품에 안겨 멕시코로 떠났고, 쿠바에서 아내를 만나 1926년에 헤로니모를 낳았다. 헤로니모는 남미한인 최초로 대학생이 되어 쿠바와 멕시코 한인들에게 자랑과 기쁨이 되었고, 아바나 법대를 다녀 피델 카스트로와 동기가 되었다.

피델 카스트로, 체 게바라와 함께 1959년 쿠바혁명의 주역이었던 헤로니모는 정보국 요원, 경찰청 요원, 산업부 차관을 역임했으며 쿠바 내 한인 가운데서 정치적으로 가장 높이 올라갔던 인물이었다.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신임했던 혁명가에서 은퇴 뒤에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 쿠바 한인회 재건과 한인 정체성 정립에 투신한 열정의 인물이다.

'헤로니모' 스틸이미지. (이미지 출처 = 커넥트픽쳐스)

코리안 디아스포라,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랑

디아스포라는 본래 팔레스타인을 떠나 온 세계에 흩어 살면서 유대교의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을 이르던 말이었다. 그러나 후에 의미가 확장되어 본토를 떠나 타국에서 자신들의 규범과 관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공동체 집단 또는 그들의 거주지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인구대비 이스라엘을 제외하고 바깥에서 가장 많이 사는 민족 중 하나며, 전 세계에 800만 명이 디아스포라(재외동포)로 있다.

이 코리안 디아스포라 중에서도 가장 알려지지 않은 쿠바한인들을 모아 그들의 정체성을 일깨워 주었던 인물이 헤로니모며 최근에는 그들의 존재까지 세상에 알린 사람이다. 전후석 감독이 이 가정을 찾아가기 전까지는 쿠바 한인사회 안에서만 알려진 ‘한인들의 변호사’ 같았던 인물로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자연스레 잊혀 가고 있었다.

그러나 재미교포로서 항상 정체성의 고민을 안고 살았던 전후석 감독은 우연히 듣게 된, 이 범상치 않은 인물에 대한 궁금증과 자신의 정체성 고뇌의 실마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위대한 인물을 꼭 세계에 알리겠다는 다짐을 했고 실제로 직접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어 그 다짐을 실천에 옮겼다.

'헤로니모' 스틸이미지. (이미지 출처 = 커넥트픽쳐스)

그는 그 누구보다 뜨거운 쿠바인이자 한인이었다

헤로니모는 쿠바혁명의 흥망의 한가운데에서 쿠바인으로서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랑을 불태웠다. 은퇴 뒤에는 한국을 방문하고 쿠바 한인 사회 재건을 결심한 후로 한인으로서 나라와 민족에 대한 사랑을 불태웠다. 99년도에 쿠바로 찾아간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쿠바의 한인에 대한 책을 발간하고, 한국의 문화(역사, 언어)를 배우게 하며, 한인회 설립에 힘썼다.

특히 한인회 설립을 위해 그는 한결같은 뜨거운 열정으로 적지 않은 나이에 허름한 자동차로 쿠바의 방방곡곡 모든 한인을 찾아다니며 한인 인구조사를 하고 신분증을 모았다. 그러나 결국 정부에서 거부당하여 법적으로는 한인회를 설립할 수 없었다. 서류상의 부족이나 결함이 아닌 한인회의 뿌리를 어디(남, 북한)로 둘 것인지 등의 문제로 여겨졌다.

그의 생애를 영화를 통해 따라가면서 한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열정과 선한 영향력이 얼마나 위대할 수 있는지 크게 감탄했다. 그로 인해 영감을 받은 사람으로 인해 또 이 다큐멘터리 영화로 얼마나 많은 이가 큰 감동과 가슴의 뜨거움을 느끼며 디아스포라인 그를 통해 애국심을 일깨우게 되는지도 감동스러웠다.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제대로 된 인간의 의무다.” 헤로니모가 자녀들에게 남긴 글 중에 한 부분이다. 사람은 성장기에 혹은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다.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등등....

백여 년 전, 난민이 되어 조국을 떠나 항상 그곳을 그리워하며 누구보다 조국을 사랑한 사람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인 디아스포라를 통해서 오히려 한인의 정체성을 자문한다. 그리고 우리는 되물어본다. 우리는 다른 디아스포라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우리나라, 민족을 넘어서 우리는 ‘인본주의적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이다.

영화 중간중간에도 나오지만, 영화 끝부분에 나오는 쿠바의 한인 최고령 할아버지(2019, 100세)께서 남긴 말이 가슴 깊숙하게 남았다. "북한, 남한 이게 뭐하는 짓이냐!" "한국은 하나야!" 그렇다, 그들이 떠나오신 한국은 조선 하나였다. 우리는 하나였다. 남북한이 갈라진 채로 반세기가 지나 이제는 처음부터 분단된 나라인 듯한 우리 세대들에게, 어려서부터 쿠바에서 자랐으나 조국을 그리워하며 살아 계신 그 할아버지의 말씀은 가히 충격적이다.

'헤로니모' 스틸이미지. (이미지 출처 = 커넥트픽쳐스)

고향의 봄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은 가수 이소은 씨가 부른 ‘고향의 봄’으로 마친다. 그들이 떠나온 고향은 어떤 모습일까? 한인 2,3세 이하 쿠바인으로 살아온 그들에게는 고향은 어떤 모습으로 상상되었을까? 우리의 고향은 어떤 모습일까? 요즘 초등학생들에게 오카리나 수업 중에 '고향의 봄'을 가르치면 ‘선생님, 고향이 뭐에요?’라고 묻는 아이들이 있다. 도시,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에게 고향은 어떤 것일까? 그들에게 조국, 애국심이란 단어는 어떻게 와닿을까?

유혜진(마리아)
MaryU(메리유)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오카리나 연주자이자 강사. 공연기획 및 진행, 영어 통•번역 일도 하고 있으며 떼제 기도모임에서 선창과 솔리스트를 맡고 있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 사회복지학, 실용음악학(오카리나)을 전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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