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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신비로 들어가며[신학 오디세이아 2 - 박정은]

새해가 시작된 지 열흘이 훌쩍 지났고, 새 학기가 시작된 지 한 주가 지났다. 그럼에도 아직 2020이라는 숫자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한 해를 돌아볼 충분한 내적 공간을 가지지 못한 채, 섣불게 새해를 맞았다. 좀 더 찬찬히 돌아보고 싶었는데, 감기 몸살로 시름시름 앓으며 2019년을 떠나보냈다. 그래도 지는 해를 보며 감사하다고 인사하러 바닷가에 나갔다가 다시 감기를 만나 고생했다. 감사할 것도 많았고, 고마운 사람들도 많았는데, 제대로 다 마음에 새기지 못하고 그냥 대충 떠나보냈다. 대림으로 시작되었던 교회력은 성탄의 화려한 축제기간을 마감하고, 이제 일상을 시작한다. 다시 우리는 평범하고, 뭐 특별할 것 없는 매일의 작은 일상 속으로 들어간다.

이 평범한 시간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예수의 세례를 기억한다. 청년 예수가 자신의 소명을 향해 뚜벅뚜벅 걸아가기 시작하신다. 이제 성탄을 장식하던 아기 예수와 구유, 동방박사의 방문과 초록 별, 그리고 밤을 밝히던 전구들을 떼야 하는 시간이다. 조금은 동화 같고, 그래서 공연히 들뜨게 하던 이런 장식들을 치우고 비워 내야 하는 시간이다. 조금은 미루어 두었던 골치 아픈 현실들로 다시 삶의 그 공간으로 초대되는 시간이다.

오래전 본당에서 일할 때, 성탄 구유를 꾸미는 일이 추웠지만 늘 즐거웠던 것 같다. 아기 예수를 모셔 놓고, 성탄 트리엔 이런저런 장식을 함께 달며, 쉬는 시간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따스한 차를 마시던 그런 따스함 때문에. 그리고 언제나 주님 세례 축일 전의 토요일은 구유를 치우는 날이었다. 그때 본당의 한 청년은, 구유를 치우는 일을 도와주며, 자기는 이제 일상으로 돌아와 좋다고 했었다. 성탄의 화려함에 자신의 삶이, 구차한 일상이 더 작아 보이고, 피곤하다며. 그리고 늘 말없이 다가와 나를 도와주던 그는 그날도 성큼성큼 구유를 열심히 치워 주었다.

성탄의 기쁨이, 반짝이는 선물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고, 어디론가 여행을 가야 하는 것이고, 늘 신나는 무언가를 해야 하는 것이라면, 나를 포함하여 참 많은 사람에게 성탄은 부담일 것이다. 십수 년이 지난 오늘, 아직도 내가 그 말을 이렇게 생생히 기억하는 걸 보니, 그때 그의 말에 아마 나도 깊이 공감한 것 같다. 행복해야 하는 이 기간에 많은 사람은 상대적 빈곤감에 아파하고, 더 외로워지고, 또 슬퍼지는 것도 사실이다.

기쁨에 대한 연구를 보면, 아무리 즐거운 것이라도 그것이 무한정으로 연장되면, 사람들은 피로감과 불안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일상이 필요하다. 일상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주고, 특별한 일을 하거나, 기쁨에 넘치는 어떤 것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안도감을 준다. 그런 평범한 기쁨, 그저 아침에 일어나 각자에게 주어진, 약간은 고달픈 일을 해낸 뒤에 느끼는 그런 일상의 기쁨은 하늘에 깊이 뿌리를 내린 나무와 같은 것이다.

물에 비친 나뭇가지. 마치 하늘에 뿌리를 깊이 둔 나무처럼 살라는 초대이며, 일상은 그렇게 하늘에 뿌리를 둔 나무처럼 살아가라는 초대. ⓒ박정은

언젠가 산길을 걷다가 물에 비친 나목을 본 적이 있는 데, 그것은 마치 뿌리가 하늘에 걸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몬느 베이유는 “나무가 깊이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빛 때문이다. 결국 나무는 하늘에 뿌리를 둔 것이다”라고 했는데, 우리가 일상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성실히 살아가며 신앙인이 되어 갈 때, 사실 우리 영혼은 하늘에 뿌리를 깊이 내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상의 단조로운, 그러나 결코 깊이를 결하지 않은 본질을 가장 아름답게 쓴 사람은 칼 라너다. 분도 소책 1권은 칼 라너의 "일상"이라는 아주 조그만 책인데, 그 책이 내 인생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다. 당시에 난 조그만 책이 너무 좋아서 꼭 끼고 다녔다. 우선 글이 쉬워서 참 좋았고, 특히 “너의 일상이 초라해 보인다고 탓하지 말라”고 한 첫 문장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거기서 그는 평범하고 진부한 일상, 일하고, 걷고, 앉고, 보고, 웃고, 먹고, 자는 것을 통해,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걸어가라고 초대하고 있다. 그는 일상은 마치 온 하늘을 담고 있는 물방울처럼 하늘나라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실 일상을 충만히 사는 것, 삶의 본질과 실재를 꾀어 보며 깨어 있는 것은 영성 생활의 기본이다. 늘 극적인 상황을 꿈꾸며, 그렇게 삶을 이어 가고 싶은 사람들을 보면, 가끔 보는 것만으로도 지칠 때가 있다. 우리가 살면서 늘 화려한 주인공일 수는 없지 않을까? 어떨 때는 조연으로, 또 어떨 때는 지나가는 단역으로 누군가의 배경이 되어 주면 안 될까? 나의 초라함으로 누군가가 찬란할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마음이 따스해지니까. 일상의 모든 순간이 늘 변화하는 조건 속에서 영원의 아름다움을 배우는 수업이라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을 묵상해 보면, 일상의 신비 속으로 묵묵히 걸어가야 하는 이 시점에 많은 위로가 된다. 예수님이 당신이 소명을 철저히 살기 위해 공생활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택한 방법은 다른 여느 사람들과 많이 다르지 않다. 당시 회개하라는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 많은 사람이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았고, 예수님도 함께 세례를 받으셨다.

플로랜스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작품. '예수의 세례', 세례받는 예수님이 선 강물에 그분의 발이 선명하게 비친다. 그렇게 고단한 일상과 소명을 따르는 그분의 길이 선명하게. ⓒ박정은

몇 년 전에 플로렌스에 있는 우피치 미술관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예수님 세례 장면을 그린 작품을 넋 놓고 감상한 적이 있었다. 다빈치는 예수님이 요르단 강에 서 계신데, 그 물에 비친 발을 아주 섬세하게 그려 놓았다. 내게 물에 비친 그분의 발은 그분이 진정 사람이 되셨음을, 우리의 친구 되셨음을 강력히 표현하는 것 같았다. 왜 그렇게 이 작품이 내 맘을 사로잡았을까 생각해 보니, 그분의 발, 특히 물에 잠긴 발은 앞으로 그분이 가시게 될 고달픈 일상의 길, 그리고 성실히 소명을 따라 걸어가실 십자가의 길을 내게 연상시켰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특별한 것, 하늘로부터 들려왔던, 성부의 소리, 그리고 비둘기 모양으로 내리신 하느님의 영도 신비이겠지만, 내게 그저 평범한 것 같은 그분의 발, 그것도 물에 비친 그분의 발이 그토록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의 신앙 여정도 그렇게 일상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을 걸어 나가는 신비이기에 그러한 것이 아닐까.

축제는 끝났다. 이제 일상 속에 숨겨진 하늘나라의 신비를 찾아 내는 평범하고, 아름다운, 내게 주어진 영적 수업을 시작해야겠다.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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