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

(편집 : 장기풍)

“모든 전쟁은 ‘형제 살인'”

교종, 2020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

프란치스코 교종은 2020년1월1일 제53차 세계평화의 날을 앞두고 12월12일 ‘평화, 희망의 여정: 대화, 화해, 생태적 회심’이라는 제목의 담화를 발표했다. 교종은 담화에서 평화란 생태적 회심, 화해, 대화의 정신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희망의 여정이며 모든 전쟁은 ‘형제끼리의 살인’이라고 강조했다. 

담화 내용.

희망은 우리를 평화의 길에 들어서게 하지만 반대로 불신과 두려움은 관계를 약화시키고 폭력의 위험을 확대합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평화의 장인’으로 거듭나 화해의 정신에 바탕을 둔 대화의 가능성을 열어 두는 한편, 생명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생태적 회심을 실천해야 합니다. 희망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평화란 위대하고 귀중한 가치이자 우리 희망의 대상이며, 전 인류의 열망입니다. 극복하기 힘든 장애물이 우리를 가로막더라도 끊임없이 추구해야 할 목표입니다. 우리 인류의 ‘기억과 육신’에 새겨진 전쟁과 분쟁의 상처는 굴욕과 배제, 비애와 불의를 야기하면서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특별히 더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모든 국가가 증오와 폭력을 부채질하는 착취와 부패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남녀, 젊은이와 노인이 존엄성, 신체적 온전함, 종교의 자유를 비롯한 자유, 공동체적 연대, 미래의 희망에서 배제돼 있습니다. 모든 전쟁은 인류의 선천적 소명인 형제애를 파괴하는 일종의 ‘형제살인’입니다. 전쟁은 타인의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곧 이기심, 자만, 증오, 그리고 타인을 파괴, 배제, 희화화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권력 강화와 지배 욕구를 불러일으킵니다. 저는 최근 일본 사도적 순방에서 핵무기 폐기를 강력히 촉구했습니다. 평화와 국제적 안정은 상호 파멸이라는 공포와 인류의 ‘완전한 절멸’이라는 위협에 바탕을 둔 시도와는 절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연대와 협력’이라는 국제적 윤리의식을 바탕으로 할 때라야 비로소 평화와 국제적 안정을 이룩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형제애는 대화와 신뢰를 만듭니다. 그러나 불신과 두려움은 관계를 약화시키고 폭력의 위험을 확대합니다. 이 악순환 안에서 평화로운 관계란 있을 수 없게 됩니다. 심지어 ‘핵 억제’도 결국 안보라는 환상만 만들어 낼 뿐입니다. 현대사회 불신의 역학을 무너뜨리는 유일한 방법은 하느님이라는 우리 공동의 근원에 바탕을 둔 진정한 형제애를 추구하고 이를 대화와 상호신뢰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평화에 대한 갈망은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 항상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이보다 못한 것에 안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기억이 곧 희망의 지평입니다. 전쟁과 분쟁의 어둠 속에 있을 때면 이전에 내게 베풀어진 작은 연대의 몸짓에 대한 기억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담대하고 영웅적인 결정들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새로운 기운을 이끌어 내고 개인과 공동체 안에 새로운 희망의 불씨를 밝힙니다. 

저는 일본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핵폭탄 피해자들과 감동적인 만남을 가졌습니다. 이들은 더 공정하고 형제애적인 미래건설을 보장하고 촉구하기 위해 지금도 과거의 공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기억이란 평화 증진을 위한 현재와 미래 결정에 그 기반을 제공하고 영감을 주는 ‘경험의 결실’입니다. 그러나 사람, 공동체, 국가 간 이해관계란 다양하고 상충되기 때문에 평화를 위한 여정에 나선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평화란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개인과 공동체의 화합 및 일치를 위한 새로운 해법을 찾으려면 정치적 의지를 늘 새롭게 해야 합니다. 따라서 평화를 이루려거든 먼저 사람들의 도덕적 양심과 개인적, 정치적 의지에 호소해야 합니다. 평화란 언제나 꾸준히 이룩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공동선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여정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필요한 것은 공허한 말이 아닙니다. 확신을 가진 증거자들이 필요합니다. 배제와 조작을 거부하고 대화의 여지를 열어 두는 중재자들인 ‘평화의 건설자’들이 필요합니다.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와 의견을 넘어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 사이의 확신에 찬 대화 없이는 진정한 의미의 평화도 없습니다. 또 경청의 자세를 통해 원수에게서 우리 형제자매의 모습까지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평화의 과정에는 인내, 헌신, 창의력이 필요합니다. 복수심보다 더 강한 공동의 희망을 향해 길을 열고 단계적으로 평화를 건설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서로를 형제자매로 인식하면서 선의를 지닌 모든 이가 타인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버리고 서로를 하나의 인격체로, 하느님의 아들딸로, 형제자매로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러한 존중의 길을 통해서만 보복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희망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용서 안에서 사는 법을 익힐 때라야 평화의 사람으로 거듭날 역량을 키울 수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진정한 평화는 무상성과 친교에 몫을 할애하는 더욱 공정한 경제 시스템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아울러 우리는 생태적 회심과 생명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을 익혀야 합니다. 인류 ‘공동의 집’(지구)을 돌보는 것에 관한 생태 회칙 ‘찬미받으소서’에 언급된 것처럼 타인에 대한 적대감, 우리 공동의 집에 대한 존중 결여, 폭력적 형태의 천연자원 착취 행위 등에 따른 결과에 대응하는 가장 건설적이고 정의로운 해결책은 생태적 회심입니다.

우리는 지역사회, 공동선, 자연에 대한 고려 없이 지구의 천연자원을 즉각적인 이득의 원천으로만 간주하고 있습니다. 최근 있었던 ‘범아마존 지역에 관한 세계주교대의원 회의’에서 시작된 여정은 우리로 하여금 지역사회와 땅(자연), 현재와 과거, 경험과 희망 사이의 평화로운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하게 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공동의 집으로 삼으라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이 세상을 관상하고 경청하는 여정입니다. 우리에게 지구를 주시고 기쁨과 절제로 이를 함께 나누게 하신 창조주의 너그러움을 우리가 생각할 때, 지금 우리가 호소하는 이 생태적 회심이 생명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과의 만남의 결실이 그들을 둘러싼 세상과의 관계에서 온전히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을 주십니다. 화해의 여정에는 인내와 신뢰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바라지 않으면 평화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 곧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사랑, 한없는 사랑, 대가 없는 사랑, 끝없는 사랑에 영감을 얻어 평화의 가능성을 믿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화해의 성사에 의지해 그리스도인의 길을 걸어 나감에 있어 분쟁의 씨앗이 되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만남의 문화를 조성하며, 보편 형제애에 생명을 불어넣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이는 우리 이웃 및 하느님 피조물에 대한 생각과 말과 행동 안에 존재하는 모든 폭력적 태도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은총은 조건 없는 사랑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은 우리는 그 평화를 이 시대 모든 이와 나눠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매일 우리 안에 생각하고 말하는 법을 일깨워 주시어 우리를 정의와 평화의 장인으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분심에 빠지지 말고 예수님께 자리를 내어 드리자”

교종, 12월15일 대림 제3주일 삼종기도 가르침

프란치스코 교종은 12월15일 대림 제3주일 삼종기도 가르침을 통해 외적인 것들의 분심에 빠지지 말고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시는 하느님’, ‘당신의 기쁨’을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했다. 

가르침 내용.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기쁨의 주일’이라고 부르는 대림 제3주일, 하느님 말씀은 우리를 기쁨으로 초대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믿기 힘들게 만드는 의심의 순간도 있음을 인식하도록 초대합니다. 기쁨과 의심은 둘 다 우리 삶에 속하는 경험들입니다. 기쁨으로 초대하는 이사야 예언자의 선포는 명확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이사 35,1) 그러나 복음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의 의심은 이와 대조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 사실 예언자는 상황 너머를 바라봅니다. 예언자 앞에는 낙심에 빠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맥 풀린 손, 꺾인 무릎, 불안한 마음(이사 35,3-4 참조)입니다. 모든 시대마다 신앙을 시험하는 현실은 똑같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사람은 그 너머를 바라봅니다. 성령께서 그의 마음에 하느님 약속의 힘을 느끼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구원을 선포합니다.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이사 35,4) 이제 모든 것은 변합니다. 사막은 꽃을 피우고, 위로와 기쁨이 마음이 불안한 이들을 지배하며, 눈먼 이들, 다리 저는 이, 말 못하는 이가 낫습니다.(이사 35,5-6 참조) 이런 일은 예수님과 더불어 실현됩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 11,5) 이 같은 묘사는 구원이 인간 전체를 감싸고 있으며 다시 태어나게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탄생은 그와 함께하는 기쁨을 동반하지만 항상 우리 안에 있는 죄와 우리 자신에게 죽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여기서 회심하라는 호소가 나옵니다. 회심은 세례자 요한의 설교나 예수님 설교의 바탕입니다. 회심은 특히 우리가 갖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하는 것과 관련됩니다. 

아울러 대림시기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과 함께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를 자극합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 생각해 봅시다. 세례자 요한은 평생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그의 삶의 스타일, 그의 몸 자체가 이 기다림으로 형성됐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그를 칭송하셨습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그럼에도 그 또한 예수님께로 회심해야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도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아들이도록 택하신 모습, 겸손하고 자비로운 모습을 깨닫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대림시기는 은총의 시기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말해 줍니다. 매일 우리 신앙을 정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동화에 나올 법한 인물이 아닌 하느님을 받아들이도록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말을 건네시고 감싸 안으시며 그분 앞에서 선택해야 하는 하느님을 말입니다.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께서는 가장 가난하고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우리 형제자매들의 모습을 하고 계십니다. 가난한 이들은 신비의 특권을 받은 이들로 대부분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인식하는 이들입니다. 성탄을 기다리면서 외적인 것들로 분심에 빠지지 말고 그분을 위해 우리 마음속에 자리를 내어 드리도록 마리아의 도움을 청합시다. 그분께서는 이미 오셨고 우리 병을 고쳐 주시며 당신의 기쁨을 주시기 위해 다시 오시는 분입니다.

 

“미지근한 그리스도인의 두 가지 태도”

교종, 12월16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12월16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을 통해 “미지근한 그리스도인의 두 가지 태도”를 경계했다. 교종은 이날 복음(마태 21,23-27)을 설명하면서 성전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던 수석 사제들이 ‘하느님을 궁지로 내몰고 손을 씻는’ 태도는 위험하다며 “만일 하느님께서 우리를 궁지로 내몰아 버리신다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라고 반문했다. 

강론 내용.

하느님을 ‘궁지로 내몰고 ‘손을 씻는’ 즉 책임을 지지 않는 미지근한 그리스도인의 두 가지 태도는 위험합니다. 이는 하느님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를 궁지로 내몰아 버리신다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고 하느님께서 우리에 관해 손을 씻으신다면 불행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치유하셨으며, 가르치고, 기적을 행하셨으며, 온유함과 군중에 대한 헌신으로 사람들을 당신께로 이끄셨습니다. 이 때문에 수석 사제들의 화를 돋았습니다. 종교 지도자였던 수석 사제들은 사람들에게서 대접을 받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신뢰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을 궁지로 내몰기 위해 뜻을 같이 했습니다. 수석 사제들은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마태 21,23) 그들의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은 사제도 아니고, 율법학자도 아니며, 우리 세계에서 공부하지도 않았소.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혜롭게 다른 질문으로 맞대응하시며 수석사제들을 궁지로 내모셨습니다. 즉 세례자 요한은 무슨 권한으로 세례를 베풀었는지 물으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례자 요한의 권한이 하늘에서 온 것인지 땅에서 온 것인지 질문하신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들의 논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마태 21,25-26) 그래서 그들은 ‘손을 씻고’ “모르겠소.”(마태 21,27)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거짓말쟁이들 범속한 이들의 태도입니다.

빌라도만 손을 씻은 게 아닙니다. 이 사람들도 손을 씻었습니다. “모르겠소”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이들은 인간 역사 안에 들어가지도 않고, 문제에 개입하지도 않으며, 선을 행하기 위해 싸우지도 않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사람을 치유하기 위해 싸우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하지 않는 편이 낫다. 손을 더럽히지 맙시다.” 예수님께서는 동일한 질문으로 응대하셨습니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태 21,27) 이것이 바로 미지근한 그리스도인의 두 가지 태도입니다. 저의 할머니께서 말씀하시듯 ‘피상적인 그리스도인들’, ‘장미 향수’를 뿌린 그리스도인(겉만 억지로 그리스도인인 체 하는 태도)인 우리의 태도입니다. 일관성이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궁지로 몰아넣는 태도입니다. ‘저에게 이렇게 해 주십시오. 아니면 저는 더 이상 성당에 나가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가거라, 잘 가려무나. 알아서 해라.”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같은 빌라도의 태도에 가담합니다. 미지근한 그리스도인의 또 다른 태도는, ‘부활절 아침 엠마오 제자들’처럼 손을 씻는 태도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뵈었기에 완전히 기뻐했던’ 여인들을 바라보면서, 그 여인들이 ‘너무 상상력이 풍부’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믿지 않고 손을 씻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성 빌라도’ 수도회에 입회한 것과 같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우리 시대 문화, 역사, 사람들의 도전 앞에서 손을 씻습니다. 우리는 자선을 청하는 사람들 앞에서 인색한 그리스도인이 자비를 베풀지 않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아니오. 저는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나중에 그 돈으로 술을 마실 게 뻔하거든요.” 이렇게 손을 씻는 겁니다. 나는 사람들이 술에 취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말이죠. “그 사람은 먹을 것이 없어요. 알아서 하라지요. 나는 술 취하는 꼴을 바라지 않아요.” 우리는 이런 말을 대단히 자주 듣습니다. 하느님을 궁지로 내몰고 손을 씻는 태도는 하느님을 불신하는 것과 같은 위험한 두 가지 태도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를 궁지로 내몰아 버리신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 봅시다.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 관해 손을 씻으신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불쌍한 처지가 됩니다. 지금 우리 안에 이런 태도가 있다면 주님께 마음을 열기 위해 이런 태도를 버리십시오. 이는 학식 있는 이들의 두 가지 위선적 태도입니다. “아니. 이것은 아니야. 나는 개입하지 않겠소” “나는 사람들이 더럽기 때문에 사람들을 궁지로 내몰고,  그 사람이 그렇게 생겨 먹었기 때문에 이런 일에서 손을 씻겠소.” 우리 안에 이런 위선적인 지식인과 같은 종류의 마음은 있는지 살펴봅시다. 오시는 주님께 자리를 내어 드리기 위해 이런 태도를 멀리 쫓아버립시다.

장기풍(스테파노)
전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
2006년 은퇴. 현재 뉴욕에 사는 재미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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