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바흐만 고바디 감독

이란과 이라크, 터키와 구소련 남부지역에 거주하며 2,500만 내지 3,000만에 이르는 아리안 계통의 쿠르드족. 대략 4,000년 전부터 하나의 통일국가 없이 떠도는 최대의 민족 쿠르드. 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이란과 이라크 및 터키 접경지역은 한반도의 2.5배 정도 면적을 가지고 있으며, 쿠르드족의 나라라는 뜻의 ‘쿠르디스탄’으로 불린다.

중앙아시아에서 ‘스탄’은 땅이나 나라를 의미한다. 따라서 아프가니스탄은 아프간 사람들의 나라, 우즈베키스탄은 우즈베크의 나라, 카자흐스탄은 카자크의 나라라는 뜻이다. 부시 같은 미국인들이 파키스탄을 ‘패키스탠’이라 발음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노릇이며, 그것을 모방하려 애쓰는 일부 국내 언론인들은 무지를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최초의 쿠르드 출신 감독 바흐만 고바디는 이란의 대표적인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의 조감독이었다. 키아로스타미의 서정적인 영상미학에 회의를 느낀 고바디는 단편영화 <안개 속의 삶>에서 처절한 일상을 견디며 살아가는 쿠르드 소년들의 삶을 담았고, 그것을 확대한 영화가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이다.


보여주는 것과 주장하는 것 사이

우리는 문학과 예술에서 ‘오락’과 ‘교훈’을 모두 얻으려 한다. 오락에 치중할 경우 허무와 우울을 극복하기 어렵고, 교훈을 강조하면 재미와 탐닉의 가능성이 사라진다. 당의정처럼 오락으로 포장되어 있으되, 교훈을 담고 있는 예술과 문학이야말로 장인의 지향점이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재미없으면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덮으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무엇이 재미있으며, 어떤 것이 교훈적이냐, 하는 문제가 남는다. 여기서는 전자에 방점이 찍히게 되는데, 그도 그럴 것이 교훈은 설명하지 않아도 이내 손에 잡히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미’에 대한 판별기준은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 만큼이나 모호하고 다양하기 때문에 하나의 잣대로 판가름하기 어려운 문제가 들어있다.

어떤 관점에서 보아도 영화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은 재미없는 영화다. 그것은 화장기 없이 있는 그대로 대상을 보여주는데 최선을 다할 따름이다. 마지드 마지디 감독의 <천국의 아이들>이나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혹은 장예모의 <책상 서랍 속의 동화> 같은 영화의 엷지만 분명한 화장기가 고바디 영화에는 없다는 뜻이다.

꾸미지도 않고 재미도 없는 영화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은 그러나 객석의 긴장을 한시도 풀어주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오래도록 망각해버린 기구한 운명에 던져진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전쟁과 궁핍과 지뢰와 죽음이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쿠르드족 어린이들의 긴장된 나날을 영사기는 생짜로 화면에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고바디 감독은 영화에서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아무것도 내세우지 않으며, 소리 높여 외치지도 않는다. 그저 우리를 둘러싼 외부세계에 이런 삶을 살아가는 아이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잔잔하게 보여주고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관객은 손에 땀을 쥐고, 가슴을 조여가면서 혹은 숨을 멈추면서 영화를 들여다본다. 진실한 영화의 힘이다.

고난을 먹고 크는 아이들

열두 살 소년가장 아윱과 난치병에 걸린 아우 마디, 막내 동생을 돌보는 큰 누이 로진과 공부 잘하는 넷째 아마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에 등장하는 다섯 남매다. 어머니는 막내를 출산하다가 세상을 등졌으며, 아버지는 밀수를 생업으로 살다가 지뢰폭발로 목숨을 잃었다. 천애고아인 그들은 삼촌에게 의탁하여 비바람을 피해 살아가고 있다.

수술하지 않으면 마디가 죽게 된다는 의사의 말에 남매들은 방도를 찾아 나선다. 그러나 아윱의 필사적인 노력도, 매매혼에 가까운 로진의 혼인도 사태를 호전시키지 못한다. 마지막 남은 출구는 하나. 그것은 로진의 혼사로 얻은 노새를 이라크에서 팔아 마디를 수술하는 길이다. 과연 눈 덮인 국경을 아윱은 성공적으로 넘을 수 있을 것인가!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에서 관객은 노동판에 몰려나온 열 살 언저리 소년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릇이 깨지지 않도록 신문종이로 포장하는 노동으로 입에 풀칠하는 아이들 말이다. 그런 소년들을 태우고 이란-이라크 국경을 넘는 낡은 트럭 안에서 아이들은 노래한다. 덜컹거리는 차 안에서 슬픔과 우울을 가득담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인생이란 놈은 나를 산과 계곡으로 떠돌게 하고, 인생이란 놈은 나를 나이 들게 하면서 저승으로 이끄네.”

아이들이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노랫말에 되풀이되는 ‘인생’이란 단어가 전해주는 무게가 묵직하게 다가온다. 가난과 질병과 부모상실과 절망에 가까운 ‘지금’과 ‘여기’를 단정적으로 드러내는 어휘, 인생은 얼마나 우울한 음조를 내포하고 있는가. 소년들에게는 이른바 ‘조국’도 없다. 그들을 한탄해줄 마지막 보루인 조국조차 없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희망은 있는가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은 우리의 눈물샘을 도처에서 자극한다. 로진이 시집가는 길에 말에 태워져 동행하게 되는 마디가 몸부림치며 울부짖다가 마침내 포대자루 속에 실려 가는 장면은 어떤가. 아마네가 오라비를 안아서 아버지 무덤으로 데려가다가 하얀 눈 위에 주저앉아 신에게 기도하는 장면은 또 어떤가. 이런 장면은 영화 곳곳에 있다.

나는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에서 희망을 읽기로 한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말이나 노새까지도 술을 먹이지 않으면 움직이기 어려운 국경마을의 한겨울까지도 이겨낼 든든한 희망을 읽기로 한 것이다. 희망은 다섯 남매의 깊은 혈육의 정으로도 가능하고, 내일을 향한 그들의 강렬한 의지로도 가능하다. 그것은 교실장면에서 현저하다.

아이가 교사의 지시에 따라 글을 읽고 있다. 인간이 어떻게 하늘을 날게 되었는지에 대한 긴 글이다. 1903년 라이트 형제가 인류 최초로 동력비행에 성공하고 난 다음 인간이 어떻게 하늘을 정복하게 되었는지를 읽는 장면이다. 아이들은 모두 진지하다. 바로 그때 누군가 교실 문을 두드린다. 아마네에게 새로운 공책을 가져온 아윱이다.

그들이 당장의 끼니를 걱정할 지경이며, 그래서 아윱은 동생을 위해 학업을 포기해야 했지만, 동생을 위해 새 공책을 사가지고 온 것이다. 내일을 알 수 없는, 희망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어 보이는 지금의 그들이지만, 그들은 보이지 않는 내일과 희망을 위하여 오늘의 난관과 고통을 주저 없이 수용하면서 한걸음씩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짧은 맺음말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의 마지막 장면은 철조망이 갈라놓은 하얀 눈과 푸른 하늘의 대비로 선명하다. 우리는 그들의 다가올 운명을 알지 못한다. 2000년에 제작되었으니, 영화의 주인공들도 어언 9년의 세월을 더 살아온 셈이다. 이제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우리는 모르지만, 그동안 일어난 세상사의 전변은 실로 엄중하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후세인 정권이 몰락하였으며, 쿠르드족은 미국의 후방기지 역할을 함으로써 독립의 기초를 만들었다. 그러나 새로운 이라크 정부가 수립되었음에도 쿠르드족 독립국가가 세워졌다는 소식은 어디도 없다. 얼마나 오래 그들은 더 기다려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은 아무런 연관도 없는 전쟁으로 고통 받고 있는 어린것들의 진혼곡처럼 우리의 영혼을 울린다. 몇몇 깡패국가들과 진정한 악의 대본영이 언제 지구에서 완전 소멸될 것인가, 알고 싶다.

덧붙이는 글

강우석 감독의 신작 <한반도>를 보았다. 언론에서 회자되는 ‘반일 민족주의’ 논쟁으로 화제가 된 영화라기에 관심이 많았다. 영화는 볼만했다. 군데군데 지루하고 시끄러운 것이 흠이었다. 국무총리가 ‘밤의 황제’인 언론사 회장들과 대면하여 강대국을 무시하는 대한민국의 ‘철없는’ 민족주의자들을 질타하는 장면은 잘 만들어졌다는 생각이다.

문제는 영화에서 내세우는 민족주의 내지는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일반시민 혹은 민중이 배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공사판에 등장하는 건설노동자들이 보여주는 행태는 문자 그대로 단순-무식-과격이며, 내시의 후예는 권문세가의 핏줄임을 여러 차례 강조함으로써 민중과 무관함을 강력하게 드러낸다. 민중과 무관한 민족과 국가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아가 고종과 대통령을 단순 대비한 도식주의도 눈에 거슬렸다.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이 돋보이는 것은 이 점에서다. 나라 없는 백성이 얼마나 우울하고 슬픈가를 영화감독은 직설화법이나 주의주장을 내세워서가 아니라, 그들의 남루하고 고단한 일상을 잔잔하게 보여주는 것만으로 목적을 달성하고 있다. 보스니아 내전을 다룬 수작영화 <비오기 전에 Before the rain>를 떠올리시라.

<기사제공: 열린문화웹진 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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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종 (현재 경북대학교 노어노문학과에서 러시아 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젊은 날 혁명가와 시인을 꿈꾸었으나 지금은 영화 평론가로 데뷔, 영화 평론집까지 낸 열혈 시네마 키드. 민교협 및 대구 민예총의 영화비평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역서와 저서로는 <마야꼬프스끼전집(3) 희곡 미스쩨리야 부프>(마야꼬프스끼),<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N.오스뜨로프스끼)>, <문학교수,영화속으로 들어가다>(경북대출판부,2005), <문학교수,영화속으로 들어가다2>(신아사,2008), <대학생으로 살아남기>(써네스트,200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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