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성찰 - 나가사와 유코] 북한과 하나원, 그리고 청진회와 만남

이 글은 <가톨릭평론> 2019년 11-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한일관계가 양국 정부의 대립으로 악화하는 가운데, 2019년 10월 5일 스톡홀름 북미 실무회담이 결렬되고 말았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관계는 불안정한 길로 치닫고 있다. 통일부가 발표하듯 북미 실무회담의 결과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동북아 국제질서가 미국에게 좌지우지되는 가운데, 필자는 한반도의 평화문제를 남북한의 번영뿐만 아니라 일본을 포함한 주변국 간의 공통된 미래를 위한 과제로 생각하면서 새로운 방도를 추진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남북한의 평화를 일본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문제로 실감하게 된 데는 북한 방문과 하나원(북한이탈주민 정착지원사무소) 및 한겨레 중고등학교 방문이 큰 영향을 주었다. 2019년 5월, 필자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해 평양과 개성에 1주일 동안 체류했다. 7월에는 통일부의 외국인 신진지도자 연수로 새터민(북한이탈주민, 탈북자, 탈북민)과 관련 담당자를 면담했다. 8월에는 시즈오카현(静岡県) 쇼인지(松蔭寺)에서 개최된 ‘청진회'(淸津會) 총회와 전몰자위령제(戰沒者慰靈祭)에 참석했다. 청진회는 일제 강점기 때 북한 청진에 거주하다가 해방 후 일본으로 돌아간 일본 민간인 인양자(引揚者, 귀환자)와 유가족들의 모임으로, 북한에서 사망한 일본인 유골을 수습하는 일을 추진하는 민간단체다. 쇼인지 주지 스님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금각사(金閣寺) 주지 스님과 함께 방북해 북한 령통사(靈通寺)와 교류하면서 북한 잔류 일본인의 유골 조사와 위령제를 개최하여, 귀국한 일본인 인양자와 유가족의 교류를 지원 중이다.

현재 한국인이면 쉽게 접할 수 없는 ‘북한’을 여러 측면에서 경험하고 당국자와 만나 조일국교정상화를 위해 논의할 수 있었던 것은 필자가 외국인 여성 전문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소중한 기회를 한반도의 평화를 열린 마음과 새로운 눈으로 생각하는 독자들과 함께 나눌 수 있어 감사하다.

약탈 문화재 반환 문제 논의로 북한에 가다

2019년 4월 말부터 5월 초, 조일국교정상화를 준비하는 일본인 전문가(배상문제, 고고학, 정치학 등) 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북한 외교 당국자들과 사회과학원의 각 연구소 소장들과 만났다. 그들과 논의한 주제는 일본 소유 약탈 문화재와 잔류 일본인 유골의 반환 문제였으며, 현장을 함께 견학하고 의견도 교환했다. 일본 소재 약탈 문화재는 현재 북한과 일본정부 간에 326점의 관련 목록이 작성된 상황이다. 일본정부는 국내관련 기관에 통보했고, 도쿄대학교도 소유 문화재에 대한 조사보고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일본인 유골 약 3만 5000주(柱)는 소련이 진주하며 귀국하지 못한 일본인의 유골이다. 반환 문제는 일본의 식민지배 청산과 관련된 문제이며, 일본인의 납치 문제 해결과 함께 2014년 스톡홀름선언에 들어간 주요 조항이다. 특히 문화재 반환은 2000년 제9회 조일국교정상화 교섭에서 과거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으로 북한 측에서 거론한 주된 이슈다. 더구나 2002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방북하여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나 발표한 평양선언에도 국교정상화 교섭에서 문화재 반환 문제를 성실히 논의할 것을 합의한 바 있다.

조일국교정상화 교섭은 2004년 조일국교정상화 회담 및 실무자 회담 후, 북한의 미사일 발사 문제로 중단되었다. 그런 가운데 2016년 일본 국회에서 전몰자의 유골 수집에 대한 국가의 책임과 추진을 약속한 ‘전몰자의 유골 수집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어 관련 법인도 설립되면서, 일본 언론에서 일본인들의 문제로 관심이 높은 편이다. 북한 측의 우선도가 높고 조일국교정상화의 과정에서 결렬된 회담을 재개할 수 있게 물꼬를 튼 것은 늘 문화재 반환이었다. 남북한 학자 간에 문화재 반환 문제를 함께 논의하여 협력하자는 이야기도 개인적 수준에서 논의되었고, 개성 만월대에 대한 한국 문화재청의 공동 발굴 사업도 추진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에서 북한 측과 문화재 반환 문제와 관련해 전문가가 방북하고, 이를 유골 문제와 함께 협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송악산과 개성 만월대(유네스코 세계유산). 제재 중에도 남북공동발굴조사가 이뤄지는 문화 교류의 모범 사례다. ⓒ나가사와 유코

경제제재의 영향은 북한만 피해자가 아니다

처음 방문한 북한은 여러 측면에서 경제제재의 영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평양공항에서 평양 시내로 가는 길, 안내원은 창가에서 보이는 경치는 시내 중심지로 갈 때까지 촬영하지 말라고 했다. 평양에서 개성으로 가는 고속도로, 개성 시내, 관광지나 유적지도 사람을 찍을 수 없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눈으로만 보고 느끼고 기억했다. 5월 초, 봄을 맞이한 개성의 농촌은 자연의 생명력과 농사꾼들의 활기가 넘치는 시기여야 했음에도 그러지는 않았다. 5월 1일 노동절에 안내받은 평양 만경대와 주체사상탑의 인파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너무 많은 문제를 한꺼번에 접한 것 같아, 귀국길 평양공항에서 북경으로 가는 기내에서 무력감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경제제재는 주로 김정은 체제와 북한 사회에 대한 경제적 압력 측면에서 북한에 대한 영향만을 논의한다. 그러나 경제제재는 제재를 가하는 측의 경제적 및 문화적 영향력과 위상을 북한 내에서 약화하는 결과도 초래했다. 평양에서 묵은 호텔은 외국인이 많이 이용하는 대동강 강가에 있는 보통강호텔이었는데, 이제는 NHK 방송도 볼 수 없었다. 우리 대표단과 늘 함께 움직인 북한 당국자들은 일본 전문가였는데, 한 달 전부터 널리 알려진 일본의 일반적인 시사정보(예를 들어 새로운 천황의 원호)를 아직도 접하지 못했다고 나에게 물어봐 놀랐다.

개성 남대문의 연복사 종. ⓒ나가사와 유코

제재로 인해 일본 제품뿐만 아니라 일본의 학술정보와 교육적 자료도 들어오지 않아 일본을 접할 기회가 없다고 했다. 개성 남대문(유네스코 세계유산, 북한 국보유적 제124호)에는 조선 5대 명종(名鐘)인 연복사(演福寺)의 종이 있으나, 개성의 안내 담당자는 비문의 내용을 최근에 밝힌 일본의 최신 연구를 접하지 못해 알아볼 수 없다고 했다. 게다가 제재 자체가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거론되었기 때문에 반일감정이 재생산되고 악화되어, 일본 교육자뿐만 아니라 일본 전공자도 많이 없어졌다고 한다. 경제제재가 오히려 북한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여 강화하는 사례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 와중에도 북한 외무성 당국자, 학자, 관광지 안내원들이 모두 한국이나 일본과의 학술 교류, 특히 자료 교환에는 적극적이었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하나의 실마리를 찾듯이 작은 희망을 품었다.

개성 남대문의 연복사 종. 최근 일본 규슈대학교 하마다 코사쿠(濱田耕策) 명예교수가 그 내용을 밝혔다. ⓒ나가사와 유코

한편 북한 체류 중 민간인 전문가로서 당국자들과의 정치적 논의와 활동이 매우 제한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평양공항에서는 입국 직전에 신체검사 대신에 받게 된 소지품 검사가 대단했다. 모든 인쇄물을 가방에서 꺼내 확인하고, 언어를 이해할 수 없는 외국인에게는 통역자까지 붙어 인쇄물의 내용을 본인이 모두 밝히게 했다. 검사의 목적은 북한 체제를 비방하거나 민주주의 국가의 문화와 정치를 선전하는 인쇄물의 반입을 막는 것이다. 일본을 비판하는 한국 물건도 정치 활동을 유발할 것으로 여겨져, 가지고 입국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우리 대표단의 일원이 한국 대법원의 ‘징용공’ 판결과 관련된 한국 사람의 서명이 들어간 독도 영유권 주장 수건을 가져갔는데, 공항에서 몰수당했다가 출국할 때 겨우 돌려받아 북한 당국자에게는 전달하지도 못했다.

조선 후기의 대표 화가 겸재 정선이 그린 '연광정도'. 겸재의 '연광정도'가 들어간 화첩은 일제강점기 때 독일 선교사가 구입해 성 베네딕도회 상트 오틸리엔(St,Ottilien) 수도원에서 소장하다가 2006년 왜관수도원에 영구대여 형식으로 돌아왔다. (이미지 제공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내가 간절히 바랐던 성 베네딕도 수도원 부지와 건물인 현 원산 농업대학교와 평양 장충 성당의 방문도 허락되지 않아 실망이 매우 컸다. 그러나 호텔 객실에 배치된 호텔 주변 지도를 유심히 찾아보니, 지도 끝자락에 ‘장충성’이라는 글자가 간신히 들어가 있는 것이 보였다. 호텔 직원들에게 지도에서 잘린 듯해 보이는 ‘장충성’의 글자를 보여 주고 물어보니, 그들은 곧바로 장충 성당이라고 답했다! 평양 시민에게 성당으로 인식되는 걸 보면, 실제 성당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어 감격했다. 아울러 같은 호텔에서 아는 외국인 사제를 우연히 만난 것도 매우 기쁜 일이었다. 서로가 평양을 떠나기 전날이라 짧은 만남이었으나 얼마나 큰 위안이 되고 축복의 시간으로 느껴졌는지 모른다. 아울러 내가 한국 문화재 반환의 이상적 사례라고 생각하는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연광정도'(練光亭圖) 속 연광정(북한 국보유적 제16호)을 직접 방문해 대동강을 바라본 것도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연광정에서 바라본 대동강 풍경. ⓒ나가사와 유코
연광정이 북한 국보유적이라는 안내 표지석. ⓒ나가사와 유코

한국에서 만난 북한이탈 주민들, 감추어야 할 정체성

7월에는 한국 정부의 외국인 전문가에 대한 연수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하나원과 한겨레학교, 통일부와 통일교육원 등을 방문해 새터민과 한국의 남북관계 관련자들을 만났다. 우리를 맞이한 새터민들은 준비된 우수한 교육생과 학생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한국 사회에 대한 평가는 하나같이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곳이라는 긍정적 내용으로, 마치 선전 영화를 보는 것 같고 마치 방문자가 심문을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이러한 나의 방문 감상을 들은 한국 친구들의 답은 하나같이 냉철했다.

내 친구들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도 한국 사회에서 새터민들의 코리안드림 현실 가능성에 대한 시각은 매우 부정적인 것 같다. 한국의 학술논문 데이터를 봐도 분단된 지 71년이 지난 현재, 한국 사회에서 통일에 따른 경제적 부담을 감당할 만큼 새터민에 대한 애정이나 민족감정은 높지 않다. 실제로 새터민의 주민등록번호는 주거지를 나타내는 뒷자리를 연수원 주소와 무관한 지방의 번호로 임의 배정하여 발급한다. 주민등록번호로는 그들의 주거지와 일치하지 않아, 하나원에서 연수를 받은 새터민임을 알 수 없게 한 것이다. 새터민이 한국 사회에 적용하기 위해 거쳐 가는 연수기관은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큰 밑거름이 되어 새로운 생활을 일구어 갈 터전일 것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자신을 증명하는 데 흔히 사용되는 주민등록번호에서 그들의 배경을 감추고 있다. 유학시절 초기, 나도 시내에 나갈 때 일본인으로서 받게 될 불이익이 무서워 한국 사람인 척했던 적이 있다. 외국인 유학생이 경험한 작은 좌절감쯤이야 어느 나라에서도 있을 법한 일이다. 그런데 한국 사람과 새터민의 만남은 서로에게 매우 특별하고 더 어려운 경험일 것이다.

한국 정부와 지방자치 단체들은 최근 많은 다문화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한다. 내 주변 일본인과 교포 가족들도 한국 사회와 문화를 익히는 다문화 가정 지원을 받는다. 그런데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일본 사회도 새터민뿐만 아니라 소수민족과 소수파를 끌어안는 데 매우 소극적이다.

최근 새터민이 한 달에 100여 명씩 하나원에 입소한다고 한다. 1년에 천 명이 넘으면 결코 작은 숫자는 아니다. 하나원에서는 어린이 돌봄시설과 유아 입소자들을 위한 기저귀나 분유가 들어간 짐 꾸러미들도 보게 되었다. 그러한 장면을 보면서 일본 대학생들과 수업에서 읽은 새터민에 대한 논문 데이터 이상으로 여성 새터민과 유아를 둘러싼 과제가 심각하고 문제 해결이 절박하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한국 사회에 새로 들어오는 이웃이 적지 않고, 무엇보다도 자기 인생의 대부분을 한국 사회에서 지낼 어린이와 청소년 새터민의 인구가 점점 많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 대한 한국 사회 적응 교육은 이제 일반 의무 교육기관이 맡게 될 것이며,

그들과 같은 연령층의 한국의 일반 교육기관에서 소수자 포용정책과 교육을 적극적으로 전개할 필요가 생길 것이다.

고향인 ‘북’과 일본 사회에서 소외된 평범한 사람들

8월 15일, 북한지역 전몰자를 위한 위령제에서 만난 청진회 일본인 인양자는 이제 10명도 안 된다. 모두 고령이며 1945년 패전 당시 어린이나 청소년이었다. 유가족들도 나이가 많다. 그들이 하나같이 나에게 말하기를 자신들은 ‘소수자’로 일본 사회에서 정체성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어린 시절에 소련이 점령한 북한 지역에서 구속되면서 일본인의 시체 매장터에서 처리를 담당하게 된 사람의 경험담도 개인 수기로 남겼을 뿐이다. 그들은 가족이 사망하는 가운데 간신히 귀국했지만, 패전터에서 겪었던 말할 수 없는 체험은 귀국 직후는커녕 현재까지 가까운 가족도, 일본 사회도, 정부도 귀담아 듣지 않아, 마치 없는 존재로 간주되었다고 한다.

5월 평양에서 일본인 유골의 매장터를 견학했을 때도 그들에 대한 일본 사회의 무관심을 알 수 있었다. 북한의 지역 주민들이 지킨 유골 매장터는 묘 비석도 없고 공동묘지 기념비도 없었다. 유골 조사와 일본 정부와의 협의를 담당하는 북한 당국자의 표현대로 개와 짐승 이하의 매장터였다. 식민지배 측에 있던 많은 일본인은 조선에서 부유층에 속했지만, 패전 후 평범한 민간인이었던 그들은 본국에 돌아오는 과정에서 일본 정부의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했고, 귀환 후에는 같은 일본인에게 차별과 냉대를 받았다. 현재 북한에 남겨진 유골은 군인과 민간인이 합쳐 3만 5000여 주라고 한다.

평양의 일본인 유골 룡산 매장터. ⓒ나가사와 유코

북한과 하나원 그리고 청진회와의 만남은 나에게 다양한 각도에서 북한을 경험할 계기가 되었다. 내가 만난 일본 담당 북한 고위 당국자 중에는 일본정부가 추진한 북송사업(1959년 12월-1984년 7월, 총 9만 3000여 명 귀환)으로 북한에 이주한 재일 조선인이 몇 명 있었다. 젊은 실무자들은 북한의 외국어대학교에서 일본을 전공한 젊은이들이었다. 새터민도 인양자도 모두 그들의 인생을 다른 나라에서 시작한 이들이었다. 그런데 북송귀환자, 새터민, 인양자 모두 국가 간의 전쟁이나 정책에 희생되어 그들의 인생이 완전히 다른 정치적 체제로 이송되었다. 자발적 의지로 이주한 것처럼 보이는 각자는 모두 그 시대환경 속에서 전쟁이나 빈곤, 부자유 속에서 제한된 선택을 강요당했다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상태는 각자 대조적이지만, 근본적인 사회적 기저(基底)는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그 시대에 따라 사회가 늘 약자를 소외하는 방향으로 일체화하면서 다수와 강자를 우선시한 것 같다. 필자가 본 ‘북한’은 결코 남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자기만족으로 독주하는 각 나라와 내 안에도 존재하는 이기심과 나약함, 빈곤을 본 듯했다. 제재가 남에 대한 압박뿐만 아니라 자신의 입지를 오히려 좁게 만들어 자신에 대한 상대방의 악감정을 강화할 계기가 된다는 것도 이번 방북을 통해 새롭게 깨달았다.

나가사와 유코(長澤裕子)
일본 도쿄대학교 한국학연구센터 간사. 고려대학교 정치학 박사(국제정치(한미일 외교사) 전공). 주요 저서와 논문으로 "한반도 분단과 일본-미국의 대한정책에 대한 일본의 영향 1941-1952"(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 2020 출간 예정. 하버드옌칭연구소 출판 조성), "‘해결 완료’ 후의 외교교섭: ‘가라후토 잔류 한국인·조선대학교 인가문제·대일여론’(1965-1970년)"(도쿄: 사회평론사, 2019; 한국어판은 동북아역사재단 후원으로 곧 출간 예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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