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 구영주]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김관욱, 인물과사상사, 2018

이 책은 지난번 필자가 서평을 썼던 조한진희 작가의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와 많은 부분이 닮아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에서는 질병의 사회화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면 이 책은 차별과 배타, 혐오로 인해 배제된 이들의 ‘아픔’을 얘기하고 있다. 제목인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에서 ‘아픔’은 우리가 부당하게 겪은 사회적 질병으로 인한 육체적 아픔과 고통은 물론이거니와 정신적 아픔과 상처에도 깊이 아프지 않길 바라는 저자의 염원을 담은 제목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런 표현을 썼다. “이 아픔은 발화할 때부터 이미 ‘향’이 다르다. 병원 소독약 냄새가 아닌 안방 포근한 이불 냄새다.

저자는 가정의학과 의사이자 의료 인류학자다. 국내에서 인류학 석사를 마쳤고 영국 더럼 대학교(Durham University)에서 의료 인류학 박사과정을 마쳤다. 현재는 서울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연구원으로 흡연과 중독, 감정노동, 공황장애, 이주노동과 자살 등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저자 역시도 개인의 질병을 사회적 질병의 문제로 보고 아픔이 사적 공간을 넘어 공적 공간으로 넘어갈 때 세상으로부터 아픔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제약을 받으며, 그때의 아픔은 실제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임을 제기한다. 힘의 문제고 도덕과 윤리의 문제다. 고로 정치의 영역이다. 이 책은 그 목격담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누군가의 ‘아픔’에 덧씌워진 오해와 곡해 더 나아가 몰이해를 보여 주고자 한다.

이 책은 모두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김관욱, 인물과사상사, 2018. (표지 제공 = 인물과사상사)

첫 장은 가족의 아픔이라는 소제목으로 한국 사회에서 점점 더 문제가 되고 있는 ‘정상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 영역은 북한이나 섹슈얼리티가 아닌 ‘정상가족’ 담론이다.

한국의 비정상적 ‘정상가족’의 담론과 그로 소외되고 차별과 배제를 당한 ‘정상가족’의 범주 안에 들지 않는 사람들의 아픔에 대해 이야기다.

한국 사회에서 오랜 가부장적 가치 아래 이어져 온 ‘정상가족’은 곧 계급이고, 부모는 자신들의 부와 문화 자본 건강 모든 것을 세습한다. 이로 인해 미혼모와 그들의 자녀는 계층 사다리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머물 위험에 처한다. 국가에서는 저출산을 우려하면서도 이런 자녀들에 대한 보호는 없고 오히려 가부장적 ‘정상가족’이 이런 아이들에게는 인격 부여의 시기를 지연시킬 뿐이다. 출산에 따른 영아들의 입양률이 가장 높은 게 지금의 한국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대목에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이렇게 구조적으로 아이 버리기를 부추기는 사회에서 아이를 버리는 ‘주범’이 여전히 미혼모라 할 수 있는가? 저자는 이른바 ‘정상가족’이 아닌 다른 삶은 잘못되었다고 차별하고 배제하면서 교육받을 권리와 일자리까지 위협하는 한국의 가족주의에 그 혐의를 두고 싶다고 말한다.

두 번째 장은 낙인의 아픔이다.

우리 사회 장애를 바라보는 비열한 시선과 미투운동과 그 피해자에 대한 잘못된 시선과 낙인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서울시 강서구에 있는 공진 초등학교가 폐교하고 2013년 11월 25일 서울시 교육청은 그 자리에 장애인 특수학교 설립을 예고했다. 그런데 자유한국당 모 의원이 총선을 앞두고 그 자리에 국립 한방병원 설립 공약을 내세웠고 당선됐다. 하지만 그 국회의원은 불가능한 공약을 내세웠고 결국 장애인 특수학교 설립을 원하는 장애우 학부모들이 그걸 반대하는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는 잔인한 장면이 연출됐다. 실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식이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어머니들이 죄인처럼 ‘무릎 사죄’를 하는 사회. ‘무릎 호소’를 하던 부모들을 가리켜 “저거 다 연기야”라고 외친 주민들도 있었다. 그야말로 참담한 사회가 아닐 수 없다. 장애를 가진 것이 마치 죄나 병인 듯이 낙인 찍는 사회의 단면이다.

2017년 미국에서 일어난 미투운동을 시작으로 한국에도 사회문화 전반에 걸친 미투운동이 빠른 속도로 확산했다. 문학, 미술, 연극, 정치, 법조계까지 그 범위는 무궁무진했다. 하지만 미국의 미투운동이 상대적으로 피해자의 수치심보다 가해자의 낮은 죄의식을 비난하는 데 비해, 한국의 미투운동은 피해자 혹은 피해자가 속한 집단의 명예와 수치에 더 큰 비중을 둔다. 정작 용기를 내어 자신의 피해사실을 알렸던 여성들에게 왜 이제야 얘기하는 거냐? 주목받고 싶었냐? 등의 억측과 낙인으로 또 다른 2차 피해의 상처를 받아야 했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은 그런 끔찍한 피해사실을 마음 편히 터놓고 말할 수 없는 사회구조라는 사실과 여성의 위치성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무지한 발언들이 아닐 수 없다.

세 번째 장과 네 번째 장은 각각 재난의 아픔과 노동의 아픔이다.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 사회의 민낯을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어서 끔찍하고 절망스럽기까지 했다. 특히 재난의 아픔은 가습기 살균제 참사와 삼성이라는 대기업에서 일하다 산재로 죽어간 그러나 조금도 보상받지 못한 젊은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한국은 공식통계로 잡힌 것만 봐도 직장에서 네 시간마다 한 명씩 사망하고 OECD 국가 중 산업재해 사망 1위다. 심지어 갑작스러운 사고사가 아니라 독성물질이나 과도한 업무로 질병에 걸려 서서히 죽어 갈 경우는 산재로 인정조차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필자는 이 책을 읽던 중 부산에 계신 이모부님이 돌아가셔서 조문을 다녀오게 되었다. 조금은 젊은 나이에 허망하게 가신 이모부님의 죽음을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죽음’에 대한 묵상을 오래도록 했다. 육신의 죽음뿐 아니라 영적 죽음의 상태에 대해. 그러면서 한 가지의 큰 의구심이 들었다. 우리 사회의 지나친 불평등 속에서 벌어진 수많은 죽음, 특히 젊은 청년들의 안타까운 죽음들에 대해.

그리고 자문했다.

우리는 왜 대기업의 횡포나 부조리에는 맞서 ‘광장’으로 나가지 않는 것일까? 우리는 구의역 스크린도어 노동자 사망사건, LG 콜센터 노동자 사망사건, 공무원 워킹맘 사망사건, 경산 CU편의점 사망사건, 넷마블 사망사건, 삼성 중공업 크레인 사망사건, 삼성 하청업체 실명사건, 태안 화력발전소 사망 사건 등에는 왜 촛불을 들지 않는 것일까?

이것들은 전부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해서일까? 검찰개혁과 정치개혁은 대의(大義)에 속하고 이런 노동자들의 사망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대의가 아닌 것일까? 이런 청년들의 죽음이 곧 나의 자식의 일이 될 수도 있고 조카나 가까운 친구의 자녀들이 될 수도 있는데 우리는 왜 우리 자녀나 혈육은 마치 영원히 그런 열악한 환경의 노동자로 살지 않을 것처럼 확신하는 것일까? 이런 부분에 적극 힘을 모아 광장에서 외치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1퍼센트를 위해 99퍼센트가 부역하는 헬조선에서 사는 것이 아닐까? 정작 그런 헬조선은 여전히 기득권을 비난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과 내 자식만은 기득권으로 살게 하고 싶어 하는 우리 모두가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정 무엇이 더 우선되어야 할까?

필자는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살아온 노동자들의 삶이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이미 영적 죽음의 상태였다는 사실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마음이 너무나 아프고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대통령도 바꾸었고 이제는 검찰도 바꾸겠다고 촛불을 드는 힘 있는 시민들이다. 스무 살도 채 되지 못한 우리의 아이들이 스크린 도어에서 끼어 죽어 가는 그런 차별과 불평등 속에서 인간의 존엄과 생명을 잃은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 국민 모두가 촛불을 든다면 어떤 국가가 그런 국민의 소리를 외면할 수 있을까? 여전히 사회적 죽음, 영적 죽음을 겪는 비인간적으로 열악한 환경의 노동자들의 죽음 앞에 우린 모두 유죄가 아닐까.

마지막으로 중독의 아픔이다.

저자는 여러 중독의 종류 중 담배를 언급한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에서 나온 한 구절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흡연은 질병입니다. 치료는 금연입니다"와 "당신이 스스로 구입한 질병, 후두암 주세요."라는 문장은 사실상 흡연자들에겐 협박으로 들릴 수 있다. 실제로 암에 걸린 환자들이 이런 문구를 본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저런 식의 광고 문구는 아픈 이들의 인권 차원에서도 문제적이지만, 흡연자들에게도 그렇다. 흡연이 질병이라니....! 과거에는 사소한 특질들이 현대 사회에서는 모두 과도한 병명으로 개발된다. 금연 보조제와 금연 관련의 약품이 추가되면서 금연과 관련된 제약시장은 넓어지고 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개인이 담배를 피우게 되는 조건이나 문화, 빈곤층의 흡연율이 높은 이유와 같은 사회적 맥락은 휘발되어 있다. 이 책의 저자 또한 이야기한다. 노동에 지친 이들에게 담배는 삶의 위안이 되기도 하고 고된 작업을 버티는 힘이 되어 주기도 한다. 감정노동자의 방패이기도 하고 지나친 감정노동으로 스트레스가 극도로 차오른 자기 자신을 지키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담배를 피우는 게 당연하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적어도 우리 사회가 금연을 강조하기 이전에 수많은 사람이 왜 담배를 계속 피울 수밖에 없는지 사회구조적 문제를 더 면밀히 바라보아야 한다.

건강주의의 핵심은 건강 문제를 철저히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긴다는 점이다. 생각해 보자.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골프를 치며 풀기가 쉬울까 담배를 피우는 것이 더 쉬울까. 선택지가 많지 않은 이에게 무턱 대고 흡연자를 혐오하는 분위기에는 모순이 있다. 과도한 노동, 주말에도 마음 편히 쉴 수 없는 환경, 끊임없이 성과를 내야 하는 직장생활, 이런 근본적 사회구조는 바꾸지 않고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에게 수치심과 개인의 끈기 부족으로 모든 것을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 그들에게 담배는 그저 향을 즐기기 위한 기호식품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고통을 버티게 해 주는 생존을 위한 수단처럼 이용되고 있기 때문에 담배회사의 농간과 국가의 가격 상승 정책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다.

필자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무척 복잡했다. 그것은 딱히 무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슬픔 같기도 하고 어떤 울분 같기도 했다. 여전히 인간의 존엄이 매일같이 훼손되고 있는 이 땅에서 지금도 하루에 4시간마다 1명씩 직장에서 죽어 가는 그야말로 지옥 같은 곳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실감 나지 않지만 그 사실을 떠올릴 때면 서늘하도록 몸이 떨린다.

마지막으로, 얼마 전 다큐영화 '어른이 되면'의 장혜영 감독이 정의당에 입당해 정치를 시작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개인적으로 정치란 장 감독처럼 자신의 문제, 내 가족의 문제, 나와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 직결되어 있는 문제, 즉 가장 절박한 이유와 절박한 심정을 가진 사람들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50-60대, 남성, 기득권 세력의 정치에서도 탈바꿈해 젊은 여성 정치인으로의 세대교체와 성별의 확산도 이루어져야 한다. 여성 정치인이 많아질수록 여성들이 남편이나 남자친구에게 맞아 죽지 않고 귀갓길에도 안전하게 죽지 않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장 감독의 표현대로 여성들이 죽지 않고 '무사히 할머니가 되는 것'.

이 작고 소박한 바람이 불가능하다면 우린 이미 지옥을 살고 있는 게 아닐까?

구영주(세레나)
11살, 세례 받고 예수님에게 반함. 뼛속까지 예술인의 피를 무시하고 공대 입학. 돌고 돌아 예술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며 피는 절대 속여서는 안 됨을 스스로 증명. 아이들과 울고 웃으며 화가로, 아동미술치료사로 성장.
칼럼과 서평 쓰기가 특기며, <가톨릭 다이제스트> 외 여러 잡지에서 자유기고가로 활동. 현재 남편과 7살 아들, 두 남자와 달콤 살벌한 동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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