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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으로 불쑥 다가온 십일월[신학 오디세이아 2 - 박정은]

이번 십일월은 내게 축복으로 불쑥 다가왔다. 익숙하지 않은 땅, 낯선 동네에서, 잃어버린 내 맘의 조각들을 다시 만난 것이다. 학기 중에 열리는 본원에서의 미팅이라, 교수회의를 마치고, 부랴부랴 짐을 싸서 밤새 날아가, 이른 아침 몬트리올에 도착했다. 우리 수도회 모원은 몬트리올에서 삼십 분쯤 떨어진 롱게이(Longueil)라는 조그만 지방 도시에 있다. 몬트리올은 불어를 쓰는 캐나다의 도시로, 거리의 이정표도, 안내방송도 모두 불어로 되어 있다. 

잠이 덜 깬 눈으로 공항 밖으로 나온 나를 맞아 주는 차가운 공기, 그리고 풀풀 내리는 눈에, 내가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십일월의 느낌을 다시 만나며 설레임을 느꼈다. 캘리포니아에 살면서 결코 맛볼 수 없는 이 싸늘한 공기가 내가 좋아하던 십일월의 정경들을 떠올리게 한다. 나를 마중 나온 캐롤 수녀님은 프랑스 액센트가 강한 영어로, “맑은 날 네가 왔다면 경치가 정말 아름다웠을 거야”라며 연신 미안해 했는데, 사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날씨는 바로 이런 흐린 잿빛 하늘에, 공기가 차가운 이런 날씨이며, 그건 한국의 11월을 많이 닮았다고 이야기해 드렸다. 그래서 고향에 온 것 같다고.

11월은 제각기 색깔을 피워 내던 잎새들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떠나 보낸 뒤, 벌거벗은 채 의연히 서 있는 나무들을, 그 가지 사이로 보이는 차가운 저녁달을 만나는 시간이다. 사실 이런 11월의 날들은 돌아가신 사람들을 기억하고, 또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을 생각하게 한다. 한 치의 미련도 없이 가벼이 그렇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털어내는 나무들을 보는 것만큼, 코끝이 쌔 한 바람을 맞으며 지는 초겨울을 석양을 마주하는 것만큼, 하느님을 그리고 영원을 생각하게 하는 일이 또 있을까?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이 길에서, 내가 만났던 많은 사람에게 감사했다고, 또 미안했다고 다 이야기하고 갈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

우리 회의 창설자, 마리 로즈 더로셔(Marie Rose Duroche)는 복녀인데, 수도 공동체를 창설하고, 선교의 꿈을 꾸면서, 32살의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나는 그분의 방에 들어가서, 그분이 덮었던 침대보를 만지면서, 창설자가 꿈꾸던 비전을 생각했다. 마루로 된 그 방은 빨간 머리 앤에 나오는 그 방처럼, 조그만 침대가 있고, 한쪽 구석에는 램프가 달려 있고, 거리가 내려다 보이는 창문이 전부다. 침실 옆은 사무실로 쓰시던 더 자그만 방인데, 아주 조그만 책상, 그리고 그 위에는 펜이 놓여 있다. 그런데 그 자그만 방 벽에 안 어울릴 만큼 커다란 사베리오 성인의 그림이 걸려 있다. 그 그림 속에 사베리오 성인은, 몸이 아파 보였는데, 그 몸으로 미션을 꿈꾸었던 중국을 바라보고 계셨다. 몸이 아파 어느 곳에도 선교를 할 수 없었던, 19세기의 젊은 여성이 처연히 바라보았을 사베리오 성인의 그림을 보면서, 난 맘이 짠해졌다. 당신을 대신해서 역마살이 있는 나는 어디든지 가겠노라고 약속을 드렸다.

모원에서 찍은 롱게이 전경. ⓒ박정은

사실 이번에 내가 본원에 참석한 회의는, 그동안 거대한 조직으로서 해 왔던 총회가 아닌, 작은 그리고 무언가 삶의 방향을 전환할, 그런 새로움을 모색하는 회의였다. 아프리카 로소토에서, 캐나다에서, 미국에서 모두 9명이 모였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해가 저물어 가는 몬트리올의 한 구석에서, 우리는 초창기 수도회의 열정과 가난, 그리고 작음을 기억했다. 회의가 시작되면 우리는 또 습관대로, 완벽한 것, 그리고 잘 갖추어진 어떤 것을 만들어 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또 서로 날을 세웠지만, 그때마다, 우리는 이제 가볍게, 그동안의 전통의 무게를 잊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환기시켜야 했다.

수도생활의 시작은 결코 세련되었다거나, 완벽했다거나 한 것이 아니었으며, 나는 오늘도 여전히 수도생활은 작은 것, 소박한 것, 그러나 정성스러운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걸 상기시켜 주듯 우리 본원 마당 앞에는 수녀님들이 처음 열었던 학교 건물이 있다. 너무 조그마해서 놀랄 정도인데, 낮에는 교실로, 밤에는 자기들의 숙소로 쓰는 작은 공간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마루를 들쳐 내면, 지하로 내려 계단이 나오고, 수녀님들은 거기서 식사를 준비했으며, 가난한 아이들에게 행복을 가르쳐 주기 위해 어느 곳에서든지 음악을 가르쳤다. 내가 우리 본원 동네를 참 좋아하는 이유는, 불어를 사용하는 캐나다 사람들의 소박한 모습 때문인 것 같다. 수녀님들이 가르치던 그 동화 속에 나오는 것 같은 돌로 지은 조그만 집 밖을 나서면, 성당이 있고, 그 마을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모든 사람을 위한 기념 동상이 나온다. 그리고 조그만 이발소에서 이발사 할아버지가 신문을 게으르게 보고 계시고, 커피숍에는 조그만 의자들이 놓여 있다.

모든 것을 다 떠내 보내고 의연히 서 있는 벗은 나무. ⓒ박정은

모든 것이 참으로 작고, 참으로 친절하고, 또 참으로 다정하다. 그래서 나는 이곳이 정겹다. 내 맘속의 십일월은 늘 그렇게 느리고, 또 그래서 다정했던 것 같다. 느릿느릿 슈베르트가 세상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며 지었다는 “아르페지오를 위한 소나타”를 들으며, 거리를 걷다가 예쁜 카드를 사서는, 주일학교 어린이들한테 보낼 편지 생각에 행복했었던 것 같다. 그때 그렇게 내가 좋아했던 정서를 난 한국의 십일월이라 불렀는데, 이제 생각해 보니, 사실 작음과 친절함과 또 다정함이라는 내 맘의 공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꼬박꼬박 시간 안에 보내는 이메일의 답장이 아니라 답장을 보내는 친절함이어야 하는 거였다.

모원에서의 미팅을 마치고, 하루의 여유를 나는 사랑하는 후배와 함께 보냈다. 그는 박사 논문을 마치고, 워털루 교구에 속한 모든 가톨릭 학교 중학생들에게 피정을 지도하는 일을 얻었다. 십대 아이들이 하느님을 만나도록 돕는 정겹고 중요한 일을 하는 그에게서 선함과 친절함과 그리고 정다움이 묻어났다. 그가 주로 일한다는 피정 집의 숲을 산책하면서, 소박한 채플을 구경하면서, 그리고 “하느님은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을 다 다르게 만드셨을까요?”라는 경이로운 질문을 한 학생의 이야기를 기쁨에 찬 표정으로 들려주는 그 후배를 보면서, 11월에 내가 배우고 싶은 것: 단순함, 친절함, 그리고 깊이라고 내 일기에 적었다. 

내 친구의 말처럼, 꽃보다는 단풍이고, 단풍보단 다 내려놓은 나무다. 내가 한 사람의 수녀로 산다는 것은 자그마하게 산다는 것이고, 느리게 산다는 것이고, 그래서 친절하게 산다는 것이다. 내 영혼의 치명적인 약점으로, 무언가 근사하게 일을 해내고 싶을 때마다, 지금 난 누군가에게 친절하고 싶은 건지를 반문하면서, 천천히 숨 돌리는 십일월을 보내야겠다. 난 이 아름다운 세상에 잠시 살다 떠나는 나그네임을 기억하면서.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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