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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하면 가라앉는다, 우리 모두[수도자가 바라본 세상과 교회]

최근 모교 도서관에 갔다가 대자보 벽면 앞에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그 벽은 작년 문 대통령의 평양 방문시 평양 시민들에게 한 연설문과 김정은 위원장의 답사가 전문으로 나란히 붙던 자리이고, 학생들이 함께 고민할 이슈와 주장을 선별하여 게시하는, 나름 학생의 시선으로서의 대표성을 띄던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날 그 벽을 거의 유일하게 채우고 있던 것은 학교에 소속되어 있던 긴 시간 동안 학내에서 한 번도 찾아볼 수 없던 낯선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소위 ‘조국 사태’를 학생으로서 바라보는 입장인 듯 시작된 첫 줄부터 거짓 정보와 비논리가 점철되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잘못 볼 수도 있다고,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하려 애쓰며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몇 줄 안 가 곧 등장한 것은 ‘이승만(영도자)’ 찬양과 그를 한반도에 보내주신 ‘하나님’께 대한 찬미, 대한민국의 ‘적(악마)’인 북한/중국으로부터 우리를 구해 줄 ‘혈맹(구원자)’인 미국/일본에 대한 무한 신뢰와 감사였습니다. 그러므로 현 정부는 이 구도를 무너뜨리는 ‘빨갱이(악마)’로서 빠른 시일 안에 처단해야 하며 그 대표 인물이 조국 전 장관, 그리고 수괴인 문재인 대통령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뜻이라며, 이승만을 보내주신 주님께 그 못다한 사명을 완수하겠노라는 비장함으로 대자보는 마무리됐습니다. 

내가 보고 있는 이것이 무엇이며 여긴 어디인가. 거리 어느 특정 집회의 입간판이 아니라 학생의 대표 목소리라는 형식을 띠고 붙어 있는 자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글 말미 작성자와 출처를 보고서야 생각보다 더 큰 비극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믿고 싶지 않은 저의 안일함이 힘을 보태고 있던 비극. 

한동안 소위 ‘조국 사태’를 두고 서울대 학생들과 동문들이 분노의 촛불을 들었다며 많은 언론이 헤드라인을 생성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도된 영상과 이미지들은 아무리 보아도 학내 집회로 볼 수 없는 너무나 생경한 장면이었습니다. 이 대자보가 바로 그 집회들 중 하나에서 낭독된 글이었습니다. ‘서울대 총학생회 조국 반대 촛불 집회’라는 제목으로 이 날짜의 집회를 생중계 한 유튜브 채널은 방대한 콘텐츠와 후원자들을 갖춘 보수 개신교 언론 소유의 계정이었습니다. 실제 그날의 장면 안에는 극소수의 학생(으로 보이는 이)들과 대다수의 (모자나 가슴에 성조기와 일장기를 새기거나 간간이 군복을 입은) 어르신으로 구성된 참가자들이 위의 대자보와 결을 같이하는 선언문들을 낭독하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그날 그 자리를 스쳐가기라도 한 사람이라면, 그 선언문들을 몇 분만이라도 들은 사람이라면, 저런 헤드라인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검찰이 그리는 그림에 보탬이 되는 보도를 위해 거짓 선동의 조각들마저 이용하는 언론, 이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외치는 학내 집단과 이의 뒷배경이 되어 주는 외부 세력, 그리고 이 아수라장을 보며 침묵함으로써 용인하는 대다수의 학생과 교직원. 이 연결의 양태는 복사해서 붙이듯 반복되면서 그 사이 이 방식은 거대한 규모와 당당한 태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보수 개신교 집회라고 칭하기에도 개신교 신자들에게 민망한 정치 집회/기도회가 시내 한복판 광화문과 청와대 앞에서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열리고 있습니다. 대통령을(사실 대통령이라 칭하지도 않습니다) 한 달 이내에 반드시 하야 시키고 내년 총선에서 승리한다는 외침의 주인공은 최근에 ‘하늘나라’에 다녀와서 ‘하나님’에게 이 지시를 직접 받았다는 어느 목사입니다. ‘자유한국당의 방향’이 곧 ‘복음’이라는 이 목사 곁에는 자한당의 대표와 그 당의 차기 대권 주자들, 주요 의원들이 포진해 결을 같이하는 외침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집회의 규모를 뒷받침하며 ‘문**을 죽여 달라’고 통성기도하는 신도들, 이런 내용들은 전혀 보도하지 않은 채 ‘많은 인원이 모인 보수 개신교 집회’라고만 보도하는, 주요 야당의 대표 의원들의 참여와 선동도 문제시하지 않는, 아니 묵인해 주는 언론들. 

대자보를 중심으로 재확인할 수 있는 학내 사태와 이 대규모 집회는 동일한 이야기와 방식을 갖추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런데 이 비극의 구성 어딘가에 내가 위치합니다. 저 확성기를 든 목사-정치인들도, 거기에 ‘할렐루야’를 외치는 신도들도, 그 실체를 가려주는 언론인도 아니지만, 나 역시 이 비극의 구조를 형성하는 한 사람입니다. 

불편한 것을 보고 싶지 않던 나의 발걸음, 더는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 노력하지 않는 나의 적당함, ‘지금껏 그래 왔던 것을 내가 어쩌겠냐’며 방관하는 안이함, 그래서 침몰의 비극을 바라만 보는 나의 비겁함. 나의 침묵, 나의 침묵. 

“안이함은 매력적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였으며 우리는 언제나 어떻게든 살아남기 때문에, 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안이함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습관의 힘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악에 맞서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 ‘그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둡니다. 또는 다른 이들이 결정한 대로 그대로 놓아 둡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무기력한 우리를 일깨워 주시고 우리가 무력감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도록 합시다. 우리의 타성에 젖은 행동 방식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눈과 귀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온 마음을 열도록 합시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부활하신 주님의 살아 있으며 힘 있는 말씀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합시다.”(교황 프란치스코 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37항)

그리스도인의 침묵의 정체와 책임은 복음에 기인해 있기에 더 피할 수 없이 분명합니다. 이 사태의 희한함이 오히려 이를 분명히 해 줍니다. ‘우리 주님의 뜻’, ‘복음’이라며 온갖 왜곡과 혐오의 외침을 ‘기도’의 이름으로 하는 이들. 다만 나는 저렇게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일까요. 내가 ‘복음’을 제대로 살고 있었다면, ‘주님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었다면, ‘기도’ 안에서 살아가고 있었다면 저런 외침이 당당히 거리를 울리고, 대학생들의 머리를 채우고, 진실을 가리게 하는 수단으로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교황님이 저 권고의 말씀 중 함께 제시한 '파레시아'(parrhesia)는 그 어원인'pan, 모든것'+'rhema, 말해진 바'의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을 말하기'의 의미를 갖습니다. 보다 정확히는 말의 내용을 의미하기보다 말하는 이가 자신과, 타인과, 세상과 관계 맺는 방식에 있어 진실을 바탕으로 한 자유로운 주체로서의 삶의 실천과 태도를 뜻합니다. 미사 말미에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실천합시다”로 파견받아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찾고 살려고 애쓰지 않은 결과가 오늘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거리와 대자보에서 100퍼센트의 싱크로율로 메아리 치는 ‘하느님의 뜻’은 그래서, 그 ‘하느님의 뜻’을 삶으로 살아내지 않고 있는 나에게 있습니다.

'눈먼'(Blind 2), 최미영(Young Kearton), 2009. (이미지 출처 = 최미영 작가 홈페이지)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 작가는 미술학교에 늦게 들어간 턱에 아직 작가로서의 여정은 길지 않지만 한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깨어남의 과정을 작품으로서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폭격의 현장이라 짐작할 수 있는 이 장면 속에는 폭격하는 이들, 당하는 이들, 그리고 이를 보고 있는 우리들이 있습니다. 모두 눈이 멀었기에(blind) 가능한, 침묵하고 있기에 가능한 비극입니다. 이 그림 속 가득한 공포와 긴장과 죄책감은 이후 십 년간의 지난한 과정을 거치며 변모합니다. 

'우리 모두 계속 침묵한다면, 모두 가라앉는다'(If We All Keep Silent, We May All Sink 2), 최미영(Young Kearton), 2019. (이미지 출처 = 최미영 작가 홈페이지)

우리 모두의 침묵으로 가능했던 비극인 세월호 참사는 아직도 그 진실을 밝히지 못한 채 가라앉아 있습니다. 수많은 비극이 우리 모두의 침묵으로, 아니 나의 침묵으로 켜켜이 쌓여만 갑니다. ‘주님의 뜻’이라며 혐오와 왜곡을 조장하고 이용하여 이 모든 침묵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저 고함들은 그래서 나의 ‘침묵’의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만듭니다. 

‘침묵을 깨고’(Breaking Silence), 최미영(Young Kearton), 2019. (이미지 출처 = 최미영 작가 홈페이지)

침묵을 깬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몰라서, 답을 찾기 어려워서 못하는 것입니까. 하느님이시면서 몸소 침묵을 깨는 삶을 보여 주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에게 심지어 그 길은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길을 가지 않을 때, 그 책임을 다 하지 않을 때 ‘복음’의 정반대의 길이 ‘복음’의 이름으로 모두를 침몰시키는 상황의 책임은 우리에게, 나에게 있을 것입니다.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미카 6,8)

하영유(소화데레사)
성심수녀회 수녀
서강대학교, 서울교육대학교 출강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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