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다우트(doubt)’. 이 글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영화의 제목이다. 유명한 연기파 배우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플린 신부 역)과 메릴 스트립(알로이시스 수녀 역)이 열연했다는 것이 무색하게도, 올해 초 개봉했던 이 영화를 기억하는 이가 별로 없다. 그러니 이 영화가 ‘망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영화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 블로그나 여러 인터넷 글들을 살펴보니 그 반응이 흥미롭다. 마치 영화의 의미에 대해서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듯 일종의 합의가 있는 것 같다. 인터넷에서 본 영화평들의 공통점을 요약하면, 애초부터 잘못된 믿음에 근거해 누군가를 의심(doubt)하던(유죄를 확신하던) 원장수녀가 결국 자신의 확신을 회의(doubt)하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 청년부 사람들과 이 영화에 대한 인상을 함께 이야기했을 때 나왔던 이야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으로 미뤄볼 때, 대다수 사람이 이 영화를 읽는 방식에 일종의 ‘합의’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이 꼭 ‘오버’는 아닐 듯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의심할 필요 없이 자명해(doubtless) 보이는 ‘교훈’이 아니라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영화’라는 단어를 ‘삶’이라는 단어로 바꿔 보면, 우리가 아무 의심 없이 수용하고 있는 삶의 전제들이 어떻게 해서 그런 확고한 지위를 얻게 되는지, 그리고 그 전제들을 성찰하지 않는 것이 현실에서 어떤 효과를 낳고 있는지 사유할 수 있는 단초를 우리는 이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플린 vs. 알로이시스, 당신은 누구에게 끌리는가?

이 영화의 스토리 전개를 끌고 나가는 주된 동력은 한 가톨릭계 학교에서 벌어지는 주임신부 플린과 원장수녀 알로이시스의 갈등과 대립이다. 이들의 갈등은 새내기 수녀 제임스가 자신이 목격한 플린 신부의 의심스러운 행동을 원장수녀에게 고백하면서 수면 위로 부상한다.

제임스 수녀는, 수업 중 도널드 밀러를 사제관으로 불렀던 주임신부가 도널드의 속옷을 사물함에 갖다 놓는 것을 목격하고 원장수녀에게 이를 이야기한다. 도널드가 사제관에 다녀온 후 ‘겁에 질린 듯 이상한 자세로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술냄새가 났다’는 의혹 혹은 의견도 이야기에 덧붙여졌다. 제임스 수녀의 말을 듣고 ‘이제야 확실한 것을 잡았다’고 확신한 원장수녀는 주임신부를 ‘권력형 아동성추행범’이라 단정 짓고 그를 추궁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문제는 주임신부가 ‘설마 이렇게 좋은 사람이 그런 범죄를 저지를 리가 없다’고 믿고 싶을 만큼 타인의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말과 태도를 가진 사람이라는 점이다. 반면, 원장수녀는 주임신부와 대조적으로 말과 행동이 차갑고 권위적인, 한마디로 ‘비호감’인 인물이다. 게다가 그녀는 자신의 의심을 증명할 ‘직접적’ 증거를 명확하게 제시하지도 않는다.

비호감 원장수녀가 ‘증거’도 없이 호감형 주임신부를 몰아붙이는 이야기가 이 영화의 기본 얼개이다. 원장수녀의 ‘쥐몰이’같은 공격에 질린 주임신부는 마치 자신이 큰 양보를 하듯 학교를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학교를 떠난 주임신부는 더 좋은 직위로 ‘승진’해 자리를 옮긴 것이다. 이 때문에 마지막 장면에서 원장수녀는 “나에게 (믿음에) 회의가 생겼다”는 절규를 한다.(그녀는 ‘진실은 승리한다’는 믿음을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결부시키고 있었던 듯하다.)

이 영화는 절묘한 대사의 배치와 장면 구성으로 인물들의 갈등을 첨예하게 보여주고 있으므로,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만으로는 이 영화의 느낌을 도저히 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위의 이야기만으로도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정식화하는지를 보는 데에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를 정식화하는 가장 흔한 방식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편들기’라고 할 수 있다. 이 방식은 플린 신부와 알로이시스 수녀의 갈등관계에서 어느 쪽이든 한쪽이 ‘옳은 편’일 것이라는 전제 하에 영화의 서사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이 영화는 원장수녀의 의혹을 정당화해줄 증거를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원장수녀는 터무니없는 의혹을 진실인 양 여기며 엄한 사람을 범죄자로 몰아가는 인물로 해석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블로거들이 자신의 영화해석을 어떤 방식으로 현실에 오버랩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쉽게 확인된다. 한 블로거는 미네르바 사건과 용산참사를 예로 들며 이명박 대통령과 경찰 등이 보이는 행태를 원장수녀의 그것과 동일시하고 ‘도덕적 확신범’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함께 이야기했던 교회 청년들 사이에서는 한국 보수세력의 터무니없는 태도를 비판하는 맥락에서 알로이시스 수녀를 비판하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편들기’가 실패하는 지점

그런데 사실 영화에서 제시된 ‘불충분한 증거’를 문제 삼는다면, 의혹을 제기한 원장수녀만 비난할 수는 없다. 조금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의혹의 당사자인 플린 신부도 자신의 결백을 명확하게 증명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가 보이는 몇몇 태도는 그에 대한 의혹을 증폭시키기도 한다. 원장수녀의 면담 요청으로 학교를 방문한 도널드의 어머니(밀러 부인)를 보고 긴장하는 장면, 알로이시스 수녀가 플린의 예전 교구 수녀에게 그에 대해 묻기 위해 전화를 했다는 말을 듣고 ‘왜 주임사제가 아니라 수녀에게 전화했냐’며 흥분하는 장면, 알로이시스가 대화의 주도권을 쥐고 다그치자 ‘수녀님도 죄를 지은 적 있으시죠? 인간은 누구나 죄를 짓습니다’라고 딴소리 하는 장면 등이 그 예이다.

알로이시스 수녀나 플린 신부나 모두 자신이 옳고 상대가 틀렸다는 명백한 증거를 제시할 수 없다면, 우리는 명확하게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가 누군가를 편드는 방식으로 이 영화를 해석하는 것도 쉽게 정당화될 수 없는 읽기 방식인 것은 아닐까?

이런 측면에서 영화를 다시 살펴보면, 이 영화는 오히려 애초부터 특정한 이를 편드는 것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첫째는, 이 영화가 은유와 생략을 무수히 나열하는 방식으로 장면들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그렇다.

원장수녀와 제임스 수녀의 대화, 원장수녀와 주임신부의 논쟁, 원장수녀와 밀러 부인의 대화 등에서 대화의 주체들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명확하게 지칭하기를 회피하며 끊임없이 은유적인 표현과 암시들을 나열한다. 가령, 알로이시스 수녀는 플린의 혐의가 ‘권력형 아동성추행’임을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고, 밀러 부인도 자신의 아들이 동성애적 성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직접 말하지 않는 식이다. 오히려 자신의 결백을 정돈된 언어로 명확히 지칭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알로이시스가 플린에게 두는 혐의는 더 짙어진다.

때문에 이 영화 속의 대화들은 의미를 고정시키고 의사소통을 순조롭게 하기보다는 모호함만을 끊임없이 생산해내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는 우리는 이들의 대화나 표정, 몸짓 등 이 모든 것이 어떤 의미의 경향성 안에 포섭된다고 생각한다. 즉, 이 영화는 의미의 공백을 만드는 방식으로 서사가 구성되나, 영화를 보는 이는 그 공백을 채우는 방식으로 서사를 이해한다. 그리고 이렇게 의미를 채우는 과정에서 우리는 ‘편들기’를 하게 된다.

‘호감=진실’ vs. ‘비호감=거짓’ 구도 뒤틀기

그리고 두 번째는, 이 영화가 초반 장면을 배치하는 과정에서 ‘호감 vs. 비호감’과 ‘옳은 것 vs. 그른 것’의 배열을 의도적으로 교란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 영화의 앞부분은 알로이시스와 플린의 갈등이 시작되기 전 이들이 각기 어떤 캐릭터인지를 묘사하는 데에 치중하고 있다. 한 장면 한 장면 교차하며 두 인물에 대한 묘사가 대립되는데, 두 인물의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되기 전까지 전개됐던 장면에 편의상 이름을 붙여보면 다음과 같다.

<플린의 강해>-<등교 시간>-<교실>-<수녀들의 식사>-<학생 식당>-<교실>-<농구장>-<신부들의 식사>.

이러한 배열 이후 알로이시스는 자신과 플린의 대립을 ‘진실 대 거짓’의 구도로 보고 플린이 은폐하고 있는 거짓을 드러내기 위해 그를 표독스럽게 몰아간다. 반면 플린은 오히려 자신이야말로 진실의 자리에 있고 알로이시스가 거짓의 자리에 서 있다고 항변한다. 아마 위에서 이야기한 장면들 중 <신부들의 식사> 장면이 없었다면 플린의 시각으로만 이 영화의 갈등을 이해하는 것이 별 문제가 없었을 수 있다.

 <신부들의 식사> 장면은 핏물 흐르는 고기를 탐욕스럽게 먹으며 뚱뚱한 모녀에 대한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플린과 두 명의 나이든 신부를 담고 있다. 장면 배치 속에 호감=플린, 비호감=알로이시스의 순서를 분명하게 지켜오던 것을 상기해보면 이 장면은 분명 이물질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 이물질 같은 장면 때문에 우리는 ‘부당하게’ 누군가를 편들지 않고도 이 영화를 감상할 수 있다.

조금 더 풀어서 이야기하면, 이 영화를 본 대다수의 사람들이 알로이시스 수녀가 부당한 의혹을 전제로 한 신부를 괴롭혔으나, 결말에서 플린 신부가 오히려 승진이라는 보상을 받고 알로이시스는 자신의 확신에 회의를 품게 된다고 보는데, 이러한 해석은 전적으로 플린의 시선으로 이 영화를 보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는 무엇이 ‘사실’인지 우리에게 ‘객관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서로 자기가 옳다며 대립하는 두 개의 주장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한쪽의 주장에 쉽게 감정이입한다. 그리고 다른 한쪽이 진실일 가능성은 거의 생각해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무서운 상상을 해볼 수도 있는 것 아닐까? 플린은 이곳저곳 자신이 옮겨온 곳마다 거기서 따돌림 당하기 쉬운 아이를 보호하는 척하며 사실은 성폭력을 행사한다. 그는 권위적이지 않고 사교적이며 언변도 좋기 때문에 권력을 가진 윗사람들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다. 그래서 누구도 그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평소 비호감이던 한 수녀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플린이 성범죄자라는 ‘되도 않는 소리’를 하고 다닌다. 사람들은 그 수녀를 더 미워하게 되고 나아가 그녀를 학교에서 쫓아내기로 결정한다. 이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플린을 지지하는 사람이 바로 ‘나’일 가능성에서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공감의 체계’ 속에서 작동하는 ‘죽임의 질서’

<신부들의 식사> 장면을 통해 드러나는 ‘진실’은 우리가 이 영화를 감상하는 태도에 우리의 삶의 태도가 반영돼 있다는 것이다. 영화에서처럼, 우리가 내리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들은 우리에게 내면화된 ‘선호’ 또는 ‘공감’의 체계와 칼로 자른 것처럼 구분되지 않는다. 우리가 옳다고 굳게 믿고 했던 행동들을 시간이 지난 후에 되돌아보면 그다지 일관성 있지도 않고 심지어 서로 모순되는 지점이 발견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일관성 있게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일관성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우리의 ‘올바른 행위들’이 아니라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때문에 플린 신부의 시선을 빌려 현 정권과 보수세력의 아집과 편견을 비판하며 그들을 ‘적’으로 규정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이 내면화한 아집과 편견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행위들은 이 사회 보수층의 ‘아집과 편견’을 옹호하고 있다. ‘뉴타운’과 ‘경제성장’이라는 구호 혹은 정책이 얼마나 많은 이들을 ‘같은 편’으로 만들었는지를 떠올려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동시에 이 ‘같은 편’들은 광우병에 반대하며 ‘미친소, 너나 처먹어’라는 공통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고, 김수환 추기경의 마지막 말을 따라 ‘서로 사랑하자’고 말하기도 했으며, 노무현 대통령을 추모하며 ‘지못미’를 부르짖기도 했다. 그런데 이 ‘같은 편’들이 마치 용산참사는 ‘그런 일이 있었나’ 생각하는 듯 조용하다.

이 글의 논지를 이해하는 이라면, 지금 용산참사를 언급하는 것이 단순히 용산참사 현장에 나가서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거나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는 걸 이해할 것이다. 또한 이 글의 목표가 현 정권과 보수세력의 편에 서서 그들에 대한 비판에 반비판을 하거나, 용산참사의 희생자들에게 편드는 것을 ‘잘못됐다’고 말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도 이해할 것이다.

요점은, 상대가 ‘틀리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을 노무현 대통령과 같은 세대, 계급, 이념적 성향의 사람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을 사람마저 그에 대한 추모 의례에 참여했던 것을 돌이켜볼 때, 세대, 계급, 이념, 이해관계 등을 기준으로 나뉜 ‘적’은 ‘나’와 그렇게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때문에 우리는 적과 동지의 명백한 대립이 은폐하는 ‘공감의 체계’, 그 공감의 체계가 있기 때문에 작동하는 ‘죽임의 질서’, 그리고 죽임의 질서에 ‘공모하는 자로서의 나’에 대한 성찰과 반성에까지 이르지 않는 한 ‘참사’는 계속될 것이다.(‘참사’의 의미는 여러분 각자가 채우시라. 우선 나는 그 자리에 ‘이명박 정권’을 두겠다. 바꿔 말하면, ‘이명박 정권’은 ‘적’이라는 실체가 아니라 ‘참사’(=사건)이다.)

결론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알로이시스가 자신의 패배에 절규하는 장면을 보며 통쾌함을 느낄 것이 아니라 영화의 서사를 모호하게 하고 교란하는 그 지점에 착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서도 우리가 굳게 믿는 ‘편들기’의 기준들이 어느 지점에서 교란되고 있는지 성찰하는 것이 우리가 죽임의 질서를 극복할 방법을 모색하는 단초가 되지 않을까. 이러한 자기 성찰의 과정이 구원과 해방의 과정인 것은 아닐까. <기사제공: ⓒ 웹진 '제3시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유승태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상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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