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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를 아는 지혜- 기울어진 내 그림자를 보면서[신학 오디세이아 2 - 박정은]

기울어진 내 그림자를 보고 걷는 오후, 느릿느릿한 걸음 때문인지, 내가 서 있는 텅 빈 거리가 갑자기 말을 걸기 시작한다. 빡빡하게 짜인 스케쥴에 균열이 가기 시작할 때, 사실 당황했다. 홍콩에서 하기로 한 수업 때문에 그 주간의 수업을 온라인으로 다 바꾸느라고 힘이 들고 많이 피곤했었다. 그런데, 짐을 대충 꾸려서 공항으로 나가려는 찰나, 걸려 온 전화는 홍콩의 사정이 너무 안 좋아져서 수업을 취소한다는 내용이었다. 갑자기 어떡하지 하는 난감한 마음. 수업을 다시 교실로 바꾸어야 하나 하다가 학생들에게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 그냥 온라인으로 하기로 했다. 

갑자기 주어진 텅 빈 시간. 학교에서 일하는 분들은 잘 알겠지만 학기 중에 쉽게 누릴 수 없는 호사이기에, 더구나 홍콩에서 고통받은 사람들의 현실 때문에, 이렇게 느릿하게 보내는 시간을 보냄이 죄스럽다. 하지만 그런 미안함을 살짝 누르고, 캠퍼스를 벗어나 인근 동네의 거리를 걷노라니, 갑자기 마음의 결이 느슨해지면서 하늘과, 약간은 서늘해진 바람과, 지나가는 꼬마아이들의 눈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엄마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를 향하는 아이들의 거칠 것 없고 또 만족한 표정을 바라보노라면, 샬롬이란 말이 바로 저런 뜻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카페에 들어가면, 많은 젊은이가 귀에 이어폰을 끼고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시월이다. 이제 2019년도 막바지를 향해 달리는 시간이다. 기울어진 내 그림자가 땅에 닿으면, 헤이즐넛 커피처럼 담담하고 향기로운 가을의 저녁은 금새 어둠에 잠길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여지없이 흐를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루어 놓은 것이 없는 내 영혼이 조급해지려고 한다. 물론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사니 행복하다고 하겠지만, 어느 시간이든 주님이 부르시는 곳으로 떠날 자유가 있는가를 물어야 하며, 이 여행을 마치고 다른 곳으로 길게 떠날 때, 담담히 떠나도록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으니. 떠날 때는 그저 아무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는 내면의 가난을 자주 기도해야겠다.

더운 와중, 잎이 물든 나무. ⓒ박정은

한국이었다면, 국화꽃 한 다발을 사 들고 친구를 방문하고 싶은 그런 눈부신 시월의 오후인데, 팍팍한 미국의 생활은 이런 여유를 좀처럼 찾기가 힘들다. 그저 친한 수녀님께, 나 동네 카페에서 공부하니까, 혹시 시간되면 그리로 나오라는 건조하기 짝이 없는 초대를 했다. 그래도 반가운 얼굴을 보고 잠깐 수다를 나누며 우리가 얼마나 늙어 가고 있는지, 또 얼마나 삶의 결을 살펴보고 있는지 점검해 보는 일은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참 어리석은 것이, 거울 속 나는, 이렇게 흰머리가 많이 났는데도, 내가 나이 들었다는 것을 잘 느끼지 못한다. 대학교 때 너무 신기하고 예뻐서 학생 수첩에 넣고 다니던 사진 속의 조카가 자라서 아기 엄마가 되었는데도, 나는 세월의 흐름을 잘 모르는 채 여전히 발을 동동 구르고 산다.

관상에 대한 정의로 실재(the real)를 본다는 표현을 영성학에서 많이 쓰는데, 사실 실재란, 내가 살아가야 하는 현실뿐 아니라, 상상과 꿈, 혹은 이루어질 수 없는 혹은 가질 수 없는 무한을 향한 모든 역동을 어우르는 개념일 것이다.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 그리고 언어 혹은 문화는 나를 어떤 사람으로 규정하려 들고, 그 틈새에서 나는 상상 속의 나, 그건 어린 시절의 나이기도 하고 혹은 죽음 후의 나, 그래서 하느님을 뵈옵는 그런 나이기도 하며, 알 수 없는 하느님 신비를 인정하는, 그래서 내가 우주의 한 점임을 겸허히 수용하는 나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때를 아는 지혜는 내가 살아가는 그리고 사라질 삶의 정점을 찍은 지혜일 것이다.

오래전 한국에서 수련자 때 시편 강의를 들었는데, 강사 신부님은 때를 아는 지혜를 이야기하면서, "우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라는 시편 구절(시편 90,7)이 얼마나 의미 있는 기도인가를 강조했었다. 지금은 그 강사의 이름도, 그 강의의 내용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럼에도, “우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라는 그 주절을 힘 주어 이야기하던 그 강사 분의 열정과 진정성은 아직도 내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다. 그래서 이 시편을 만날 때면 때를 아는 지혜와 함께 우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달라고 기도하게 된다. 시월을 보내며, 때를 아는 지혜와 함께 우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달라는 그 기도가 떠오른 것은 아마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수선하고, 불확실하기 때문일 것 같다.

내가 사는 이곳도 이상 기후 때문에 어제는 30도를 웃도는 날씨를 기록했다. 여름에 입던 옷을 아직도 치울 생각을 전혀 못한 채, 정말 이제 가을이 없어지면 어쩌나 걱정스러워졌다. 시애틀에서는 청소년 수천 명이 “기후 위기”에 대해 반응하지 않는 대통령과 자연을 훼손하면서 자본을 축적한 기성세대, 특히 베이비 부머를 비판하는 데모를 했고, 다른 많은 도시에서도 청소년들이 자신들이 살아갈 지구를 보호하는 정책을 요구했다. 현재 미국에서는 많은 젊은이가 일도 없어지고, 망가져 가는 이런 세상에서 자녀를 가진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하는 비판적인 생각들이 만연해지고 있다.  

수년 전 화재로 다 타버린 나무들이 그래도 새로 또 생명을 틔우고 숲을 만들어 내고 있다. ⓒ박정은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는 유명한 구절은 전도서(코헬렛)에 나온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울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고" 등으로 이어지는 이 구절은 모든 것에는 흐름이 있고 그것은 인간이 어쩔 수 없다는 가르침이다. 전도서가 쓰인 때는 기원전 300년 경으로 보는데, 많은 학자는 전통적 가르침이 통하지 않고, 많은 변화를 경험하던 시대에 쓰였다고 보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시절과 비슷하다는 데서, 다시 한번 놀라움과 함께 하늘 아래 새로울 것이 없다는 가르침을 새삼 새기게 된다. 전도서가 쓰인 때는 천하를 통일한 알렉산더가 죽은 뒤 세상이 나누어지고, 경제적 위기, 정치적 불확실 속에서 많은 이가 고통받은 시대였다. 사회의 질서가 혼돈을 겪을 때 쓰인 전도서는 우선 우리에게 숨을 고르고, 자기가 하는 일을 즐기기를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즐거움들을 충분히 누리라고 가르친다.

많은 사람이 불확실성 속에서 고통받는 현실 속에서,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숲은 여전히 가을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비정상적으로 더운 이 날씨 속에서도 잎이 물들어 가는 나무들을 보니 마음이 울컥한다. 이 더위에 홀연히 때를 아는 지혜를 가진 나무를 만나는 것 같아서. 또한 3년 전 산불로 다 타버린 칼리스토가의 나무들은 그래도 또 여전히 생명을 피워 내고 있음에 나는 말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시간여의 숲을 달려 만난 젊은이들의 신앙적 고뇌는 여전히 나를 위로한다. 한 청년이 온라인에서 만난 한 아이콘을 사랑하는데, 그래서 온통 마음이 그녀에게로 가게 되는데, 그 마음 때문에 가슴 졸이는 그가 아름다웠다. 아이콘은 실재일까 아닐까? 아이콘에 담긴 인격은 얼마나 실재일 수 있을까? 실재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그 사랑은 사실 우리가 한 인격을 만날 때, 역시 고민하면서 알아 가야 하는 부분 아닌가? 그렇다면, 온라인 공동체에서 만나는 그 아이콘 혹은 아이콘에 담겨 있는 인격을 사랑하는 맘은 하늘로부터 오는 감정이기에, 무조건 축복해 주고 싶어졌다. 나이를 먹어 가는 내게 때를 아는 지혜란 젊은이들의 새로운 고민들 속에서 변해 가는 세상을 배우며 그들의 아픔 속을 함께 걸어가는 일이다.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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