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제3회 국제학술대회

돈으로 해결하자는 경제 만능주의적 태도를 버리고 피해자를 중심에 두는 과거사에 대한 깊은 토론, 역사 교육, 시민 간 교류와 연대가 한일관계를 푸는 데 중요한 열쇠임을 확인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가 9일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를 위한 종교의 역할, 한일 관계의 역사, 그리고 기억의 치유’를 주제로 연 국제학술대회에 한국, 미국, 일본, 러시아의 관련 전문가와 각 교구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등 200여 명이 참여해 진행됐다. 

이날 일본 천주교 주교회의 가톨릭 정의와평화협의회 의장 가쓰야 다이지 주교(삿포로 교구장)는 기조강연에서 한일 간 관계회복을 위해 상대를 인정하고 경청하는 사랑의 자세를 강조했다. 

첫 발표로 세르게이 쿠르바노프 교수(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 한국학 센터)는 남북과 미국, 일본, 러시아 각국이 상대를 바라보는 적대적 태도는 역사적 기억에 기초한다면서 "국가 차원에서 대중과 정치인의 마음에 있는 오래된 적 이미지를 해체하고 친구 이미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역사적 기억이 동북아 평화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도록 "상호 이해를 돕고, 공감하고,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서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성공회대 일본학과 양기호 교수는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해 "갈등과 불신에 매몰되기보다 미시적 시각에서 문제를 하나씩 풀어 가는 진지함과 차분함이 필요하다"면서 "강제징용 대책, 전략물자 통제관리, 위안부 3개로 나눠 대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양 교수는 두 나라가 "한반도 비핵화와 역사 화해, 동아시아 평화체제 구축과 공동번영"을 위해 솔직한 의견 교환과 진정한 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츠노부 이치로 신부(예수회, 일본 가톨릭정의와평화협의회 총무) ⓒ김수나 기자

이어 한일관계 개선과 동북아 평화를 위한 교회의 역할을 모색하는 미츠노부 이치로 신부(조치대 신학부 교수, 예수회)와 의정부교구장 이기헌 주교의 발표와 종합토론이 있었다.

먼저 미츠노부 신부가 1970년대 한국 민주화에 연대하면서 시작된 일본 교회의 정의평화 활동의 역사를 짚으며, 동북아 평화와 역사적 화해를 위해 한일교회와 시민사회 간 교류와 연대, 협력을 강조했다.

미츠노부 신부는 한일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던 지난 8월 가쓰야 다이지 주교가 성모 승천 대축일에 낸 담화의 초안을 작성했다. 한일관계 문제의 핵심은 일본이 한반도 식민 지배에 대한 가해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 담화의 골자였다.

발표에서 그는 “일본 천주교회가 역사 문제를 계속해서 의식, 반성하지는 않았다. 1986년 처음으로 시라야나기 세이이치 도쿄 대주교가 아시아주교회의연합회 총회에서 전쟁을 반성하는 입장을 밝혔고 한국 천주교회와의 관계가 그렇게 되기까지 큰 역할을 했다”고 설명했다.

1974년 만들어진 일본 가톨릭 정의와평화협의회가 지학순 주교, 김지하 시인 구속에 강하게 항의하며 기도회, 성명, 심포지엄, 집회 등 적극 활동하며 일본 천주교회는 당시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사회적 공동체를 통해 함께 행동하는 것을 배웠다.

그 뒤 일본 천주교회는 재일조선인 지문 채취, 일본군위안부 문제, 광주 민주화항쟁 등에도 관심을 두고 일본 신자들에게 한국 상황을 알리며 한일문제에 직접 참여하기 시작했다.

미츠노부 신부는 “일본교회가 1970-80년대 한국과의 관계를 통해 한일 역사 문제에 대한 책임을 자각하기 시작했고, 사회문제에 어떻게 참여할지, 특히 한국 교회의 행동에 크게 감명받고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이기헌 주교(의정부교구장)는 이날 한일 그리스도인이 먼저 화해와 연대에 나서 달라고 요청했다. ⓒ김수나 기자

일본, 과거사에 대한 책임 깨달아야 진정한 해방

미츠노부 신부는 “일본 정부가 문제의 근원인 역사 문제에 대한 책임을 전혀 말하지 않고 나라 사이의 경제적 이해관계만 말해서 관계가 나빠지고 있다.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대한 책임의 중심에 일본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야말로 일본이 진정 해방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1970년대부터 역사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지만 많은 이에게 전달되지 않은 것이 문제”라면서 “매우 어렵겠지만 시민운동을 지원하고 함께해 나가며 일본 천주교회가 작으나마 힘을 쏟고 사람들 마음에 교훈과 영적 희망을 전달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의정부교구장 이기헌 주교가 두 나라 그리스도인이 먼저 연대하고 화해하자고 촉구했다.

이 주교는 “한일관계가 온전히 회복되려면 먼저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의 성실한 사과가 필요하고, 한일 지식인과 시민이 과거를 기억하면서도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잊지 않고 연대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한일관계에 대한 교회의 문제 제기는 바로 ‘화해’라면서 “화해는 그리스도인의 임무이며 우리는 평화의 사절로 파견됐다. 화해의 전제는 사죄이지만 아베 정권이 과거사를 인정하고 사죄하기는 쉽지 않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연대하고 화해하자”고 당부했다.

이어 백장현 교수(한신대)의 사회로 최형묵 목사(NCCK 정의평화위원회), 브라이언 그림 이사장(종교의 자유와 비즈니스 재단), 나가사와 유코 교수(도쿄대 한국학 센터), 미츠노부 이치로 신부(조치대 신학부 교수), 세르게이 쿠르바노프 교수(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 한국학 센터), 박문수 운영연구위원(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종합토론이 이뤄졌다.

종합토론 참가자 (왼쪽부터) 최형묵 목사, 브라이언 그림 이사장, 나가사와 유코 교수, 백장현 교수, 미츠노부 이치로 신부, 세르게이 쿠르바노프 교수, 박문수 박사. ⓒ김수나 기자

“시민 간 깊은 토론 없어.... 양국의 대화와 문제 해결, 경제 만능주의로 일관”

이 자리에서는 한일관계 악화의 원인으로 일방적 대화방식, 아베 정권의 성격과 출신 배경, 1965년 한일협정에 대한 해석 차이, 경제 만능주의로 일관된 해결책, 과거사 사죄에 대한 한국 사회의 촉구 등이 지적됐다.

쿠르바노프 교수는 “한일이 자기주장만 내세우고 상대 의견을 듣지 않는 것이 문제”라며 “압력, 분쟁, 전쟁과 같은 국가 간 낡은 문제해결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될 수 없다”라고 지적하며 상대 의견을 듣고 분석해 과학적 해결법을 찾는 것이 가장 지혜롭다고 조언했다.

미츠노부 신부는 아베 총리가 만주 침략의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손자이며 메이지 시대 아시아 침략 사상의 중심지인 야마구치 출신으로 신자유주의를 구축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면서, 1990년대만 해도 고노, 무라야마 담화 등 인도적으로 과거사를 반성하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아베 집권으로 우경화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특별히 문재인 정부는 촛불혁명으로 탄생했기 때문에 아베가 많이 두려워한다. 박근혜 정권은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가 관련이 있어 두려워하지 않았다”면서 “지금 일본은 전쟁 이전 천황 중심, 일본 중심의 세계로 돌려놓고 싶다는 의지가 있고, 이것이 한국에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유코 교수는 시민 간의 깊은 대화와 토론의 장이 없었다고 짚었다. 아베 정권의 성격도 문제지만 1965년부터 최근까지 양국 정상의 대화와 문제 해결방식을 보면, 경제 만능주의로 일관됐으며, 일본은 한국에 재정 지원만 해 주면 대일여론을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미래지향이란 의미로 정부 주도로 이뤄졌던 대화는 보고 싶지 않은 과거는 이야기하지 않고, 미래에 손을 잡을지만 이야기했다”면서 “역사에 대한 토론은 교사, 정치인 등 관계자들이 격화되지 않도록 눌러 깊게 토론한 적이 없다”고 지적했다.

9일 파주 참회와 속죄의 성당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 200여 명이 참여했다. ⓒ김수나 기자

최형묵 목사는 “위안부 합의의 사실상 파기, 강제징용 노동자에 대한 개인청구권 보장 판결 등이 갈등의 직접적 원인”이고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서 전쟁 위기의 책임을 북한에 물을 수 없게 되자 한반도 전체를 대결의 상대로 삼아 일본 내 위기를 조장하고 평화헌법을 개정해 한반도를 일본의 통제 아래 두려는 것이 숨은 원인”이라고 짚었다.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을 두 나라가 다르게 해석하는 것도 갈등의 원인으로 지적됐다. 일본은 이 협정을 통해 모든 사안이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해결됐다는 입장이고, 한국은 이 협정으로 개인 피해자의 청구권까지 해결되기 어렵다고 보고 보상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1995년 국제노동기구(ILO)는 일본 정부가 강제 동원 피해자들에게 사죄, 보상할 것을 촉구했으며, 2006년 유엔 국제법 위원회는 국가 간 우호를 위해 개인 희생을 강요할 수 없다며 국제 사회는 피해자 중심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이에 대해 유코 교수는 “1965년 당시 양국 대표가 서로 납득하지 않고 양국 국민의 많은 반대 속에 협정을 맺었고, 여론을 억누르고 탄압한 역사가 있다. 조문 자체가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고 언론을 통해 마치 어느 쪽이 옳고 그른 것처럼 판단하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각자 입장에서 조문을 해석하고 주장한다면 나름대로 옳을 수 있지만 결국 남는 것은 희생자들뿐이라고 학생들은 말한다”면서 “옳고 그름을 따지고, 서로 주장을 정당화하기에 급급할 때가 아니라 희생자 중심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형묵 목사도 “한일협정으로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하는 것은 아니며 반인륜적 범죄행위는 시효를 두지 않고 끝까지 책임을 묻는 것이 국제법적 인식이자 유엔의 규범”이라면서 “강제징용과 위안부 문제는 책임 물을 수 있고 가장 중요한 것은 피해자 중심의 정의회복”이라고 말했다.

일본인들 한국에 대한 호감 크지만 역사는 몰라

토론 참가자들은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음악 등 다양한 문화교류를 통해 한일 두 나라가 이해, 양보하고 협조할 방법을 찾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일본의 젊은이나 학생들은 케이팝, 케이뷰티, 방탄소년단 등을 통해 한국에 대한 호감이 크지만 정작 한일관계의 역사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들이 역사를 제대로 알고 인식해 미래를 내다볼 수 있도록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미츠노부 신부는 “일본 젊은이들은 위안부 문제나 의병 활동 등을 알지 못한다. 교과서에 없고 가르치지 않고 힘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문제”라면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역사를 바라보고 서로 제대로 이해하며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먼저”라고 말했다.

유코 교수도 “전쟁조차 모르는 젊은이들이 있고,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기억을 가지고 고통스럽게 사는 이들도 있다. 국가 간 대립 속에서 역사를 하나하나 검증하지 못한 것, 사죄한다고 돈만 주는 것이 아닌 국가를 뛰어넘는 적극적, 도덕적 행동이 필요하다”면서 “정부 주도로는 논의되지 않았던 사죄의 형식, 더 많은 이가 납득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날 참가자들은 한일관계 개선과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두 나라 교회는 함께 기도, 연대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특히 한일주교교류모임을 통해 교회의 각 단위 간 교류, 협력을 늘리며 역사를 함께 공부하고, 반일과 혐한감정을 없애며, 한일갈등으로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재일조선인을 위해 노력하기로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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