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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길-부성과 모성을 간직한 아버지[큘라, 엄니와 화해하다 7]

2019년 2월 23일 아버지는 92살 생신을 4일 앞두고 돌아가셨다. 연로한 부모님을 둔 자식은 아침 일찍 전화벨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날 아침 6시경 큰오빠로부터 걸려온 전화로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며칠 전까지 음식물을 사서 배낭에 짊어지고 와서 직접 요리해 드시던 아버지가 사전 예고 없이 우리 곁을 떠나셨다.

나에게 아버지는 부성과 모성을 동시에 보여 주셨던 분이다. 어린 시절 엄니가 막내인 내게도 피부접촉을 허락하지 않자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나 주워 온 딸이지? 그래서 엄마가 그렇게 쌀쌀맞게 대하는 거지?” 딸이 불쑥 내민 황당한 질문에 아버지는 ‘허허’ 웃으시며 ‘너는 내 딸이고 엄니가 친모임’을 강조하셨다. 아버지는 이런 내가 안쓰러워서 나를 껴안아 주셨다. 내가 당신 팔을 괴고 누워 엄니 대신에 아버지의 젖꼭지를 만져도 그대로 두셨다. 그 시절의 아버지를 떠올릴 때 아직도 잊히지 않는 또 다른 기억이 있다. 나는 혈액 순환이 잘 안 돼 다리에 쥐가 잘 났는데 장사를 마치고 밤늦게 오시는 아버지에게 주물러 달라 하면 피곤하셨을 텐데도 짜증 내지 않고 내 다리를 주물러 주셨다.

20대 후반 부모님 모습. 효성이 지극하신 아버지는 약수동과 상계동에 살 때 친할머니를 우리 집에 모셨다. 엄니는 젊어서 시집살이시키고, 늙어서는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모시느라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으셨다. 그것 때문에 노년에 엄니는 아버지에게 화풀이를 많이 하셨다. ⓒ최금자

아버지는 농촌에서 정미소를 운영하여 대식구를 먹여 살렸다. 그런데 아버지가 군복무 대신에 경찰로 타지에 가 있는 동안 형(내게는 큰아버지)이 노름빚으로 정미소를 날려 버렸다. 복무를 마치고 온 아버지는 이 난관을 극복하고 자식들을 잘 키우기 위해 서울행을 결정하셨다. 나에게 지난날 이야기를 하시던 중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때 아버지가 현명하게 판단하여 시골에 주저앉지 않고 서울로 올라온 것에 너희는 감사해야 한다. 만약 시골에 남아 있었으면 너희들은 지금처럼 하고 싶은 것 하지 못했을 것이고 평생 힘들게 일하고 고생했을 거다.”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지만, 아버지는 수중에 가진 돈이 없어 처음에는 집 근처 담벼락에서 채소 몇 가지를 팔았다. 차츰 장사에 자신이 붙은 아버지는 시장에서 좌판을 벌일 장사 밑천을 마련하려고 사방팔방으로 뛰었다. 약수동 시장에서 장사할 돈 마련에 대한 아버지와 엄니의 기억이 다르다. 아버지는 평소 신뢰를 쌓았던 지인으로부터 돈을 빌려서 시작했다고 한다. 반면 엄니는 외삼촌들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어쨌든 부모님은 남에게 빌린 돈으로 가게를 얻어 처음에는 채소류, 나중에는 쌀-쌀을 포함한 곡류, 연탄, 얼음, 과일, 담배 등-를 팔아 다섯 자식을 키우셨다. 

나는 학교가 끝나면 곧장 집에 가지 않고 가게에 들렸다. 삶의 활력을 느낄 수 있는 시장의 시끌벅적함이 좋았고 군것질을 할 수 있어 행복했다. 가게 천장에 고무줄로 매달아 놓은 바구니에서 부모님 몰래 동전과 십 원짜리 지폐를 훔치기도 했다. 최근에 엄니에게 어릴 때 가게에서 돈을 훔쳤다고 자백하고 알았냐고 했더니 몰랐다고 하셨다. 어쩌면 알고도 모른 척했을 것 같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오빠와 언니도 슬쩍했다고 고백했다. 자식이 돈을 훔치는 것을 알고도 그냥 넘어가 준 부모님에게 감사한다.

2012년 부모님을 모시고 여수박람회 관람. 5월 햇볕이 쨍쨍하게 내리쬐는 날, 그 넓은 장소를 걸어 다니느라 비지땀 흘리고 발바닥에 불이 났지만 두 분을 모시고 여행할 수 있어서 좋았다. ⓒ최금자

아버지는 무거운 쌀가마를 배달하느라 척추에 무리가 가서 급기야는 40대에 척추 수술을 받으셨다. 수술 뒤 경과가 좋아 재발하지 않았고 걸을 때 한쪽 다리를 약간 저는 정도의 후유증만 있었다. 수술로 힘을 쓸 수 없으셨던 아버지는 몇 년을 버티다 한동안 장사를 도왔던 두 아들도 군대에 가서 부득불 약수동 쌀가게를 정리했다. 살림집과 가게를 정리하고 나니 남은 돈이 많지 않아 약수동보다 변두리였던 쌍문동으로 이사했다. 가게 딸린 집을 사서 동네 사람들에게 쌀과 잡곡을 팔아 힘겹게 살았다. 나는 그때 고등학생이었는데 학교 끝나고 집에 오면 그날그날의 장사 상황이 그대로 눈에 드러나서 오늘은 쌀이 얼마나 팔렸는지 무척 걱정했다. 경제적으로 지독히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따뜻한 느낌으로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있다. 집에서 콩나물을 시루에 키웠는데 물만 주면 무럭무럭 자라는 콩나물을 보면서 삶의 희망을 잃지 않았다. 엄니가 다 자란 콩나물을 섞어 밥을 해서 간장과 파를 송송 썰어 비벼 줬던 기억이 난다.

쌍문동에서 장사가 너무 안 돼 경제난에 시달린 아버지는 또 한 번의 결정을 해야 했다. 계속 버티다가는 집마저 날려 버릴 수 있기에. 아버지는 쌍문동 집을 팔고 논밭으로 둘러싸인 상계동으로 이사하고 복덕방(부동산소개업)을 시작하셨다. 복덕방은 중곡동 한국화장품 회사(그 당시에 이곳에 본사가 있었다) 근처에 마련했다. 80년대 전후로 부동산 붐이 일어서 매매, 전월세가 빈번하게 계약되어 소개 수수료가 쏠쏠하던 시기였다. 아버지의 복덕방 성업 덕분에 나는 대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한번은 아버지가 “내가 네 대학공부 시킨 거다. 너 학교 졸업하고 나서도 학자금 대출을 이 아버지가 다 갚았다”고 강조하셨다. 나는 이 말씀에 “아버지, 정말 고맙습니다!” 하고 껴안아 드렸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다 독립하고 나서도 소일거리 겸 용돈 벌이로 70살까지 부동산소개업을 하셨다.

아버지는 근면, 정직, 성실, 자애를 평소에 실천하심으로써 자손들에게 이런 소중한 가치를 유산으로 남겨 주셨다. 인생의 고비마다 삶의 변화를 잘 읽으셔서 슬기롭게 대처한 아버지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이다. 고맙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장례식 사진. 장례식 사진들을 모아 ‘꽃길’(김정식 노래 제목)이라는 영상물을 만들어 삼우제 날 가족과 함께 보았다. 6.25 전쟁 때 경찰로 복무한 아버지는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아 임실 호국원에 안치되셨다. ⓒ최금자

최금자(엘리사벳)

주일학교 중고등부 교리교사. 30년 넘게 청소년들과 희로애락을 나누며 즐겁게 살고 있다. 인생의 동반자 베드로와 함께 지난 6년 동안 열었던 붙박이 ‘어린이카페 까사미아’를 이어서 청소년들을 위한 ‘무빙 까사미아’를 준비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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