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

(편집 : 장기풍)

“신앙은 서로 섬기는 기쁨입니다”

교종, 10월6일 연중 제27주일 삼종기도 가르침

프란치스코 교종은 10월6일 연중 제27주일 삼종기도 가르침을 통해 이날 복음(루카 17,5-10)에 나오는 보상과 칭찬을 요구하지 않는 종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면서 “믿음이 있으면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마태 17,20 참조)이라며 희망을 갖고 인생의 흥망성쇠를 바라보라고 권고했다. 또한 교종은 아마존을 위한 주교 시노드 작업에 기도로 동반해 달라고 초대했다. 

가르침 내용.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복음(루카 17,5-10)은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라는 제자들의 청원으로 시작된 신앙에 대한 주제를 소개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루 일과 중에 자주 해야 할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이미지에 빗대 대답하십니다. 겨자씨와 충실한 종입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 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돌무화과 나무는 땅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바람에 잘 견디는 든든한 나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비록 작은 믿음이더라도 신앙은 돌무화과 나무까지 뽑을 힘을 가질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주고자 하십니다. 게다가 그 나무를 바다에 심는 것은 훨씬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있으면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마태 17,20 참조) 자신의 힘을 믿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느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겨자씨에 견줄 수 있는 신앙은 교만하거나 자기 자신을 확신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때때로 나쁜 인상을 주면서 신앙이 깊은 신자인 체하지 않습니다! 겸손 안에서 하느님이 몹시 필요하다고 느끼고 자신의 작음을 인정하는 가운데 완전한 신뢰를 갖고 그분에게 자신을 내어 맡기는 신앙입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희망을 통해 인생의 흥망성쇠를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또 악은 결코 우리의 마지막 말이 아니며, 결코 우리 삶의 끝이 아닐 것이라는 인식 안에서 실패와 고통까지 받아들이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우리가 정말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즉 우리 신앙이 비록 보잘것없지만 진실되고 순수하며, 흠 없는 것인지 어떻게 깨달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척도가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십니다. 곧, 섬김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고압적이고 냉정한 주인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다소 혼란스러운 인상을 주는 비유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주인의 이런 모습은 비유의 참된 핵심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 주인의 시중을 들 준비를 갖춘 종의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앞에서 신앙인도 그와 같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곧, 계산이나 변명 없이 그분 뜻에 완전히 내어 맡기는 겁니다. 하느님께 대한 이러한 태도는 공동체 안에서 처신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묵상하게 합니다. 얻을 수 있는 이익이나 칭찬이 아닌 섬김 안에서 자신의 보상을 찾으며 서로 섬기는 기쁨을 묵상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내용은 이 비유의 말미에 나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쓸모없는 종, 다시 말해 칭찬이나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종입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는 교회에 많은 유익을 주는 겸손, 준비된 자세의 표현이며, 교회 안에서 활동하기 위한 올바른 태도입니다. 겸손한 섬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며 우리에게 보여 주신 본보기입니다.(요한 13,3-7참조) 신앙의 여인이신 동정녀 마리아께서 이 겸손한 섬김의 길로 나아가도록 우리를 도와주시길 빕니다. 묵주기도의 성모님께 전통적으로 해마다 드리는 ‘간청기도’를 위해 폼페이에 모인 신자들과 일치하여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축일 전날 오늘 성모님의 도움을 청합시다.

 

교종, 아마존 주교 시노드 개막 연설

프란치스코 교종은 10월7일 아마존 주교 시노드 토론을 시작하며 참가자들에게 이 모임의 사목적 차원과 아마존 지역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섬김에 중점을 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마존 지역을 위한 세계주교대의원회 특별회의(아마존 주교 시노드)는 성 베드로 대성전 행렬로 시작됐다. 행렬은 성 베드로 대성전부터 성 베드로 광장을 지나 종탑 아래 문을 통과해 시노드 회의장 안으로 이어졌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스페인어로 개막 연설하면서 이번 주교 시노드가 사목, 문화, 사회, 생태 등 네 가지 논점으로 이뤄진다고 설명했다. 교종은 첫 번째 사목적 관점은 모든 것을 포용하는 본질적 관점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교종은 ‘그리스도인 마음으로’ 주교 시노드에 접근해야 하며 제자의 눈으로 아마존 지역의 현실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야 우리가 이 주제를 이해하고 해석해 낼 수 있다고 말했다. 

또 교종은 사목적 관점은 우리로 하여금 아마존 지역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 삶의 방식을 존중하도록 도와준다며 모든 사람은 현실을 바라보는 그들만의 고유한 지혜와 인식, 감수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교종은 이념적 식민지화가 사람들의 고유성을 축소하거나 파괴한다고 경고하면서 이념(이데올로기)은 우리가 어떤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지성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만 부풀린다고 경고했다. 교종은 우리가 현실을 범주화하거나 ‘이즘'(ism)으로 축소시킨다면 바로 사람들에 대해 편견을 갖는 슬로건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교종은 그 예로 사람들에게 자격을 부여하여 그 자격에 따라 사람들 사이에 거리를 만듦으로써 분열과 말살을 야기한 ‘문명화와 야만주의’를 언급했다.

교종은 10월6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봉헌된 주교 시노드 개막미사 도중 봉헌예물을 바친 원주민에 대한 조롱하는 말들이 들려온 것을 개탄한다고 말했다. 조롱의 말은 원주민이 머리에 썼던 깃털 장식과 관련돼 있었다. 교종은 “저에게 말해 보십시오. 그가 머리에 썼던 깃털과 바티칸 일부 관료들이 머리에 쓰는 비레타(성직자들이 쓰는 삼각모)와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라고 반문했다. 교종은 또 우리가 사람들의 현실에서 나온 관점, 곧 전형적 방법으로 생각해야 하는 데도 실용적 방법만 제시하는 것을 경계했다. 또 박물관 안에서만 문화를 보존한다고 지적하면서 우리는 사회개발 프로그램을 고안하려고 이 자리에 모인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섬기고, 이해하고, 관상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주교 시노드는 국회가 아니며 누가 더 권력을 지니고 있는지 보여 주기 위한 것도 아니고 누가 다수를 차지하는지 보여 주는 자리가 아니라 성령의 영감과 인도 아래 함께 걸어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교종은 성령이야말로 주교 시노드 주인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므로 교종은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우리와 함께, 우리를 통하여, 우리의 한계에도 당신을 드러내셔야 한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교종은 참가자들에게 ‘성찰과 대화, 겸손한 경청, 용기와 담대한 열정으로 목소리를 낼 것을 주문했다. 교종은 주교 시노드 참가는 ’변화의 과정‘에 뛰어드는 것이지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또한 교종은 주교 시노드가 분란의 메시지만 양산하는 절차가 되지 않고 ’안으로부터의 주교 시노드와 밖으로부터의 주교 시노드‘를 위해 서로 존중하고 신중하게 소통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청컨대, 유머감각을 잃지 않도록 하십시오.”라고 끝맺었다.

 

“연민 어린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시오”

교종, 13명 신임 추기경 서임식에서 강조

프란치스코 교종은 지난 10월5일 재위기간 중 6번째 추기경회의에서 13명의 신임 추기경을 임명하고 교회의 선교사명을 강조했다. 13명 가운데 8명이 선교 수도회 출신이며, 교종 선출권 있는 추기경 10명, 선출권 없는 80세 이상 추기경 3명이다. 이번 임명으로 추기경단은 228명이 됐다. 이날 추기경 서임식은 5대륙 대표단이 참석한 가운데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자비로 우리를 바라보신 분을 증거하는 이가 되기 위해 ‘연민 어린 마음’의 은총을 청합시다.”고 말했다. 신임 추기경 13명은 이날 하느님 백성의 선익을 위해 베드로의 후계자에게 충성과 순명을 맹세했다. 추기경 모자와 반지, 교종칙서는 그들 봉사의 상징이며 임명장에 나타난 것처럼 ‘용기’와 피를 흘리기까지 섬기며 살아가겠다는 책임을 상징한다. 

강론 내용.

연민은 하느님 마음이자 아버지의 마음이기에 항상 하느님 마음에 새겨 있었지 어느 한 순간 구원역사에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복음 안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연민을 자주 봅니다. 우리가 더 자주 읽고 묵상할수록 깨닫게 되는 것은 주님의 연민이 즉흥적이며 이따금씩 일어나는 태도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분 마음은 하느님 자비가 육화된 자세인 것처럼 일관적입니다. 예수님은 ‘병든 육신에 펼친 하느님 손’이며, 버려진 사람들을 찾으러 가십니다. 그렇게 나병환자를 고치고, 벳자타 연못가의 고립된 중풍환자를 살리셨습니다. 하느님과 모세의 대화가 있는 구약성경에서도 백성들에 대한 ‘연민 가득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불행히도 인간은 연민이 많이 부족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 같지만 성덕은 연민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도 종종 연민이 없는 모습이 보입니다. 

수도자나 예식을 거행하는 사제이거나 상관없이 인간의 공통된 태도입니다. 우리는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우리 역할은 사제나 레위인이 길에서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는 행동을 보여 주는(루카 10,31-32) 가엾은 마음을 지니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그들은 속으로 “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항상 다른 쪽을 쳐다보기 위한 어떤 핑계나 변명이 있습니다. 교회의 사람이 단순히 직원이 될 때 이런 태도는 최악일 것입니다. 그곳에는 항상 변명이 있습니다. 가끔 그 변명은 문서화되어 ‘쓸데없는 제도’를 만듭니다. 나병환자 경우처럼 말입니다. ‘그들은 밖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옳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비-연민적 단체는 바로 이 같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태도에서 생겨납니다. 연민은 선택이 아닌 본질입니다.

여러분은 가장 먼저 우리가 하느님의 연민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을 알고 계십니까? 그분 자비에 항상 우선적이고 동행된 존재라는 점을 알고 계십니까? 가장 먼저 우리가 연민의 자녀라는 점을 알고 계십니까?” 마리아께서는 항상 그랬습니다. 연민은 ‘선택의 문제’나 ‘복음적 권고’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연민은 본질적 요구입니다. 만약 제가 하느님의 연민의 대상이라는 점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분의 사랑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연민을 느끼든 못 느끼든 그것은 설명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닙니다. 만약 제가 연민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떻게 전달하고 증거하고 내어 줄 수 있겠습니까? 연민을 느끼지 못했다면 저는 그것들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해 봅시다. ‘나는 저 형제, 저 주교, 저 사제에게 연민의 마음이 있는가?’ 혹은 ‘나는 비난이나 무관심 태도, 내려다보는 태도, 손을 씻으며 ‘나는 상관없어’라는 식으로 실제로 무관한 태도로 항상 번민의 나날을 보내는 것은 아닌가?’ 직무의 충실함은 연민에 근거합니다. 따라서 무관심이나 쓰고 버리는 것은 추기경 직무가 아닙니다. 추기경 직무에 충실할 수 있는 역량은 다음과 같은 자각에 달려 있습니다. 진홍색 수단의 의미대로 피를 내어 주는(순교) 것에 대한 기꺼이 열린 자세는 연민을 받았다는 인식과 연민을 갖는 역량에 근거할 때 확실해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추기경 직무에 충실할 수 없습니다. 교회 사람의 많은 불성실한 태도는 연민을 받았다는 의식부족, 다른 쪽에서 바라보는 습관, 무관심 습관에서 생겨납니다.

한편 이날 신임 추기경들을 위한 교종의 마침기도는 ‘연민 어린 마음’의 은총을 청하는 것이었다. 연민의 마음을 통해 자비로 우리를 바라보시며, 우리를 선택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그분 구원의 복음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신 분을 증거하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강론 뒤 시작된 추기경 서임예식에서 교종은 ‘그리스도의 용감한 증거자들’이라는 임명장을 낭독한 뒤 한 사람 한 사람을 호명했다. 신임 추기경들은 자신의 차례에 각자 대답하고 신앙고백한 후 복음과 교종과 그의 후계자들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이제와 항상 영원한’ 순명을 서약했다. 교종이 추기경 모자를 씌워 주고 주교반지 수여예식이 있었으며, 명의를 수여한 뒤 평화의 포옹을 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기도를 노래를 부르고 난 뒤 교종은 성모찬송을 노래하기 위해 거룩하신 동정 성모상 앞에서 짧게 머물며 기도했다.

 

“교종에 대한 충성의 가치를 기억하시오”

베네딕토 16세 전임교종, 신임 추기경들에 당부

신임 추기경 13명은 프란치스코 교종과 함께 바티칸 ‘교회의 어머니’ 수도원으로 베네딕토 16세 전임교종을 예방했다. 이들의 예방을 받은 베네딕토 16세는 신임 추기경들에게 교종에 대한 충성의 가치를 상기시키고 프란치스코 교종과 함께 이들을 축복했다.

 

“주님께서 당신을 부르십니다”

교종, 특별 전교의 달 개막 저녁기도

프란치스코 교종은 10월1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특별 전교의 달’ 개막 저녁기도를 주례하고 강론을 통해 언제나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선교하는 교회의 증거자가 되라고 촉구했다. 

강론 요지.

오늘은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소화 데레사) 축일입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는 선교사를 꿈꿨지만 생전 가르멜회 수도원 밖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성녀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선교의 수호성인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성녀 소화 데레사는 기도를 세상 안에서의 선교활동을 위한 연료로 삼으셨습니다. 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어쩌면 성 바오로 이후 가장 위대한 선교사일지 모릅니다. 또 바티칸 전교기구 기초를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한 프랑스 평신도 여성 폴린 자리코 가경자가 계십니다. 이 세 분 선교사가 우리가 행동하도록 정신을 번쩍 들게 합니다. 이분들은 우리로 하여금 껍데기를 깨고 나와 복음을 위해 안락함을 포기하라고 외치고 계십니다.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탈렌트의 비유’처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가장 귀한 보화를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우리 자신과 타인의 생명이 그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담대한 마음으로 독창성을 발휘해 당신께서 주신 탈렌트의 열매를 맺으라고 부르십니다. 올해 ‘특별전교의 달’은 우리가 정신차리고 능동적으로 선을 행하도록 동기를 부여해야 합니다. 단순히 신앙 공증인이나 은총의 수호자가 아닌, ‘선교사’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선교사는 증거자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핵심 단어는 ‘증거’입니다. 증거자란 ’순교자’와 같은 뿌리를 가진 말입니다. 순교자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평화와 기쁨을 전하고 원수를 포함한 모든 이를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번 한 달 동안 우리는 각자 좋은 증거자의 삶을 살고 있는지 자문해야 합니다.

마태오 복음 탈렌트의 비유에 나오는 두려움에 떠는 세 번째 종을 예수님께서 “악하고 게으르다”고 하신 이유는 그가 태만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가 아무런 선의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악하다는 평가를 받은 것입니다. 태만한 삶은 소명을 거부하는 삶입니다. 태만은 선교의 반대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기쁨을 전하지 못할 때 스스로를 희생자로 여기고 누구도 우리를 사랑하지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체념의 유혹에 굴복하거나 세상과 교회의 상황이 점점 더 악화돼 간다며 불평을 늘어놓을 때, 우리를 마비시키는 두려움의 노예가 될 때, 삶을 선물이 아닌 짐으로 느끼며 살아갈 때, 사랑의 손길을 기다리는 우리 형제자매가 아닌 나 자신을 중심에 두고 살아갈 때 우리는 선교사명을 거스르는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교회란 잘못된 일들에 집착해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며, 안락함을 위해 안전한 오아시스를 찾지 않으며, 그저 이 세상의 소금과 누룩이 되길 간절히 소망하는 선교의 교회를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선교사입니다. 

오늘 우리는 ‘수녀’(성녀 소화 데레사), ‘사제’(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평신도(가경자 폴린 자리코)와 함께 2019년 10월 특별 전교의 달의 시작을 선포합니다. 이분들은 누구라도 교회의 선교사명에 헌신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 주고 계십니다. 오늘 저녁기도에 함께한 어머니, 아버지, 젊은이들 여러분 주님께서 당신을 부르고 계십니다. 공장, 상점, 은행, 식당에서 일하는 모든 이들, 직업이 없는 모든 이들, 병상에 있는 모든 이들, 주님께서는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 하느님의 ‘선물’로서, 여러분 각자의 모습 그대로 주변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길 바라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단순히 삶을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삶을 내어 주는 것, 삶에 대해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며 공감할 줄 아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증거하는 삶을 사는 여러분을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이 갈 길을 미리 닦아 놓으셨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장기풍(스테파노)
전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
2006년 은퇴. 현재 뉴욕에 사는 재미동포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