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가 바라본 세상과 교회]

(그림1) 성녀 안나와 함께 있는 성모와 예수, 레오나르도 다 빈치. (1503 추정) (이미지 출처 = 파리 루브르 박물관 홈페이지)

예수님의 외할머니. 언뜻 떠오르지 않습니다만 우리가 분명히 알고 있는 분입니다. 성녀 안나, 성모님의 어머니입니다. 예수님의 외가 삼대를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독특한 그림은 두 가지 버전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무에 유화로 그린 ‘그림1’, 다른 하나는 종이에 목탄과 백회로 그린 ‘그림2’입니다. 첫째 그림과 두 번째 그림은 재료 면에서만이 아니라 등장 인물과 몇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그림에 주목해 보고자 합니다.

(그림2) 성녀 안나와 세례자 요한과 함께 있는 성모와 예수, 레오나르도 다 빈치. (1499-1500 추정) (이미지 출처 = 런던 내셔널 갤러리 홈페이지)

처음 이 작품을 본 것은 도판이 아니라 실물이었습니다.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수많은 작품을 보다가 동선이 한 방으로 이어지고 사람들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방 밖의 작품 정보를 보고 들어간 순간, 이 큰 그림(141.5cm x 104.6cm)이 유리 벽 속에 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꽉 차 있어 처음에는 어깨 너머로 보이던 그림에 점차 가까이 가자 이 종이 그림이 만드는 아우라는 마치 동굴 속 새겨진 그림을 보는 듯, 아주 오래전 이 인물들과 함께한 이가 흙 벽 속에 새겨 놓은 이야기를 마주하는 듯, 이들이 숨쉬는 공기를 이곳에서 함께 숨쉬고 있는 듯, 놀랍게 다가왔습니다. 작품을 위해 유지하는 온습도에 비해 관람객이 많아 좀 더웠지만 사람에 이리저리 밀리면서도 한참을 머물렀습니다.

미술관 기념품 가게에서 큰맘먹고 이 엽서를 사 가지고는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습니다. 볼 때마다 왜 그렇게 위로가 되던지요. 지난 주말 서초동 앞 촛불 집회에 다녀오고는 이 그림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좀 더 정확히는 이 그림의 성녀 안나의 손가락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왜 이 그림이 제게 큰 위로가 되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인물들의 시선을 따라가 봅니다. 성녀 안나는 딸 성모님을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성모님은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은 사촌 형 세례자 요한을 보며 축복하고 있습니다. 다시, 세례자 요한부터 인물들의 몸이 서로 기대고 있는 모습을 따라가면, 세례자 요한은 성녀 안나에게 기대고 있고 예수님은 성모님께 안겨 있고, 성모님은 그 어머니의 무릎에 안겨 있습니다. 이 모든 인물들을 받치고 있는 할머니 안나의 손가락은 하늘을 향해 있습니다. 이 손의 존재감과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은 그 상세 묘사가 끝나지 않아 오히려 더 두드러집니다. 축복하는 아기 예수님과, 이를 겸손하게 받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사이에서 그 축복이 하느님께로부터 옴을 분명히 하고 있는 성녀 안나의 손가락은 이 그림 속 인물들 사이의 깊은 신뢰와 사랑의 신비가 하느님께로부터 오며 그로 인해 보는 이들에게 깊은 위로와 힘을 준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인간적으로도 이들은 서로 깊이 사랑하는 이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의 신비는 이 그림 속 사랑을 대대손손 모든 피조물들에게 끝없이 넘치는 사랑과 자비로 살아 있게 합니다.

지난 토요일 수녀님들과 함께 서초역 촛불 집회에 나갔습니다. 파주에 있는 피정의 집을 재단장해 재개원 하느라 감사한 날이었지만 공사 뒷마무리로 몸이 힘들어 서초역이 참 멀게 느껴졌습니다. 그래도 한 사람 한 사람씩 힘을 보태야 한다는 생각으로 많은 수녀님이 일손을 놓자마자 서둘러 떠났습니다. 그러나 서초역에 내리자마자 보게 된 사람들의 바다는 눈물이 날 만큼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서초역 일대는 광화문과 달리 본래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의 성격을 가진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생긴 사람들의 대형은 서초역 사거리를 중심으로 십자가 형태가 되었습니다. 촛불로 밝혀진 그 십자가의 끝은 각각 이 긴 도로가 또 다른 대로와 만나 끝나는 지점까지였습니다.

공식적으로 집회가 시작하는 시간이 지나 도착하기도 했고 너무나 많은 사람이 모여 중앙 무대가 위치할 대검찰청 근처는 보이지도 않는 곳에 있었지만, 사람들은 서로 모여 함께 빛을 밝히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보이는 대형 스크린도 없고 주동하는 이도 없이 누군가 외치면 함께 구호를 외치고 휴대폰의 손전등을 켜서 촛불 대신 흔들었습니다. 배가 고파서 할머니 수녀님 가방에 싸 온 떡을 꺼내 먹었으며 옆에 함께 서 계시던 아주머니께 권했더니 가방의 초코바를 꺼내서 주셨습니다. 나중에 수녀님들이 주변 분들과 나눈 이야기를 들어 보니 가족 몰래 혼자 오신 주변 성당 신자분, 먼 교구 신부님의 어머니 등 각자 너무 속상한 마음으로 힘 하나 더 보태고자 나오신 분들이라 합니다. 제 앞 아버지 어깨에 무등 탄 초등학교 어린이 곁에는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계셨습니다. 다리가 불편해 걷기 어려우신 데도 혹여 많이들 모이지 않았을까 봐 걱정돼 나오신 할머니 수녀님은 수녀원에 돌아가는 길 내내 ‘너무 다행이다, 다행이다’ 하시며 오히려 큰 위로를 받았다 하셨습니다.

이날 그 대로를 가득 채운 촛불의 바다를 보며 떠오른 단어는 ‘상식'(常識, common sense)이었습니다. 단순한 정보 차원이 아니라 ‘양식, 판단력’,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등의 의미를 가진 ‘상식’. 자신만의, 내 가족만의, 내 집단만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아는 정보나 왜곡된 생각이 아니라, 공공의, 모든 피조물의 이로움을 추구하기 위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고 행동하는 ‘상식’. 우리 안에 이 상식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하느님에게서 나온 자녀들임을 증명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0만의 상식적 이웃들이 모인 이 집회를 보도하면서도 굳이 진영의 논리로 나누어 보여 주고 싶어 하는 여러 언론들의 오도의 태도는 이제 안타깝기까지 합니다.

요한 23세 교황님은 50여 년 전 “가톨릭 세계”뿐 아니라 “선의의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회칙 '지상의 평화'를 발표하시면서 전쟁 반대에서 나아가 평화를 제안하셨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찬미받으소서' 3항) 레오나르도 다 빈치 작품 속 ‘성가정’의 인물들은 분명 혈연으로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을 가리키는 외할머니의 손가락은 이 안에 머물고 끝없이 커지며 흐르는 사랑이 하느님에게서 오며 모두에게 끝없는 축복으로 넘치고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우리는 사랑할 수 있고, 서로를 돌볼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기도 일부를 함께 바치며 우리의 오늘을 하느님께 다시 봉헌하고, 어둠 속 촛불의 바다 가운데 성령의 빛이 함께해 주시길, 그리고 모두를 축복해 주시길 청합니다. “성령님, 성령님께서는 당신의 빛으로 이 세상을 아버지의 사랑으로 이끄시며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피조물과 함께 하시나이다. 또한 성령님께서는 저희 마음 안에 머무르시며 저희를 선으로 이끄시나이다. 찬미받으소서!”('찬미받으소서' 중 ‘그리스도인들이 피조물과 함께 드리는 기도’)

하영유(소화데레사)
성심수녀회 수녀
서강대학교, 서울교육대학교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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