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

(편집 : 장기풍)

“순교자들은 상본 속 성인이 아닌 진정한 승리자”

교종, 9월25일 수요 일반접견 사도행전 교리교육

프란치스코 교종은 9월25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진행된 수요 일반접견 교리교육에서 사도행전에서 루카 복음사가가 전해 주는 일곱 부제들을 뽑은 내용과 최초의 그리스도교 순교자인 스테파노에 대해 설명했다. 

가르침 내용.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사도행전을 통해 우리의 여정을 계속해 나갑시다. 이는 세상 안에서의 복음의 여정입니다. 성 루카는 생생한 사실을 바탕으로 이 여정의 결실과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몇 가지 문제들을 보여 줍니다. 문제들은 처음부터 항상 있었습니다. 대립과 분열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에서 공동체 안에 있는 차이들을 조화시키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히브리인뿐 아니라, 자신들의 문화와 감수성 및 다른 종교를 가진 디아스포라 출신 그리스인들도 받아들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들을 ‘이방인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이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러한 공존은 약하고 불안정한 균형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어려움에 직면하여 ‘가라지’가 나타난 것입니다. 

공동체를 파괴하는 최악의 가라지는 무엇입니까? 불평과 험담입니다. 그리스계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과부들이 홀대받는다고 불평합니다. 사도들은 어려움을 고려하고 해결책을 찾는 식별과정을 시작합니다. 사도들은 복음의 ‘질주’뿐 아니라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해 교회 전체의 평온한 성장을 위한 다양한 임무를 나누는 것에서 해결책을 찾습니다. 

사도들은 점점 주요 소명이 기도와 하느님 말씀의 설교, 곧 기도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임을 인식했습니다. 사도들은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사도 6,3)을 선발해 직무를 맡김으로써 문제를 해결합니다. 이들은 사도들로부터 안수를 받은 뒤 식탁 봉사를 수행합니다. 이들은 이러한 봉사를 위해 세워진 부제들입니다. 교회 안에서 부제들은 사제 다음이 아니라 전혀 다른 직무입니다. 제대를 위한 것이 아닌 봉사를 위한 직무입니다. 교회 안에서 봉사를 수호하는 이들입니다. 부제가 제대 가까이 가기를 너무 좋아하면 실수하는 것이고 부제의 길이 아닙니다. 말씀 봉사와 자선봉사 사이의 이러한 조화는 교회의 몸을 자라게 하는 누룩입니다.

사도들은 일곱 부제를 세웠고, 일곱 부제들 중에 특별한 방법으로 스테파노와 필리포스가 구별됩니다. 스테파노는 능력과 담대함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지만 완고한 저항을 만납니다. 그를 저지하기 위해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 반대자들은 어떻게 합니까? 그들은 한 인간을 죽이기 위한 가장 비열한 방법을 택합니다. 곧, 중상모략과 거짓증언을 택합니다. 우리는 중상모략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악마적 암’은 한 사람의 평판을 파괴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되고 교회 지체를 공격하며, 비열한 이익이나 자신의 불성실함을 은폐하기 위해 누군가를 대상으로 진흙 싸움을 벌이려고 서로 동맹할 때 공동체에 심각한 손상을 입힙니다. 

거짓 증인들과 모함으로 예수님과 모든 순교자에게 한 것과 똑같은 방법, 거짓 증인들에 의해 고발당해 최고 의회에 끌려 온 스테파노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거룩한 역사를 설교합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파스카 신비는 전체 계약 역사의 키워드입니다. 이처럼 풍성한 천상 은총 앞에서 스테파노는 예언자들과 그리스도께서 다루신 적이 있는 위선을 용감하게 비난합니다. 스테파노는 역사를 상기하면서 반대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예언자들 가운데 여러분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들은 의로우신 분께서 오시리라고 예고한 이들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여러분은 그 의로우신 분을 배신하고 죽였습니다.”(사도 7,52) 스테파노는 모호한 말이 아니라 분명하게 진실을 말합니다.

이로 인해 최고의회에서 스테파노의 말을 듣던 사람들은 난폭한 반응을 보였고 스테파노는 돌팔매 사형선고 받았습니다. 그러나 스테파노는 그리스도의 제자의 참된 ‘소양’을 보여 줍니다. 그는 도망치지 않고 자신을 구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호소하지도 않고 대신 주님 손에 자신의 생명을 맡겼습니다. 그 순간 스테파노의 기도는 아름다웠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사도 7,59) 그리고 스테파노는 예수님처럼 사람들을 용서하면서 숨을 거둡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 7,60) 스테파노의 이 말들은 좋은 설교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손에 우리 각자의 삶을 맡기고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을 용서하며 우리 신앙의 질을 바라보게 해 주는 이들을 용서하는 것뿐이라고 가르칩니다. 

초대교회 때보다 오늘날 더 많은 순교자가 존재합니다. 어느 곳에나 순교자들이 존재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많은 순교자가 존재하고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인 순교자들의 피로 물들어 있으며, 하느님 백성들에게 성장과 결실을 보장합니다. 순교자들은 ‘상본 속 성인‘이 아니라, 살과 뼈가 있는 실제 사람들입니다. 요한 묵시록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습니다.”(묵시 7,14) 그들은 진정한 승리자들입니다. 우리 또한 어제와 오늘의 순교자들을 바라보면서, 복음에 대한 매일의 충실함의 순교와 그리스도를 닮는 순교를 받아들이면서 충만한 삶을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주님께 청합시다.

 

“하느님은 항상 여러분의 인생 재건을 도우신다”

교종, ‘새 지평’ 공동체 방문 미사 봉헌

프란치스코 교종은 9월24일 오전 로마 남부에 있는 ‘새 지평’ 공동체를 방문하여 회원들과 미사를 봉헌했다. 새 지평 공동체는 학대, 빈곤, 중독, 정신장애 등으로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자활을 돕는 공동체로 현재 수백 명이 함께 생활하고 있다. 교종은 이날 미사에 참석한 이들에게 비록 큰 어려움과 패배를 겪었더라도 용감히 인생을 재건하도록 전진하라고 격려했다. 

강론 내용.

완전히 파괴됐던 하느님의 집(성전)을 다시 짓는 공사와 관련한 오늘 독서말씀(에즈 6,7-8.12ㄴ.14-20)처럼 다시 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에 따르면 유다인들은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실 때만 다시 지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짓는 것보다 다시 짓는 것이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폐허가 된 것을 본 수많은 사람, 그리고 잔해라도 주워 들기 위해 분투노력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파괴적인 상황은 사고방식의 변화를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폐허생활에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건설하는 일이 언제나 모든 이에게 편리한 것만은 아닙니다. 낮 동안 쌓아 올린 벽을 밤중에 파괴의 ‘상인단체’가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보십시오. 이 사람들이 건설하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성경은 한편엔 성전을 짓기 위한 벽돌을, 다른 한편엔 건물을 지키기 위한 칼을 들었다고 말합니다. 성전 건축공사가 ‘작업’과 ‘칼’, 다시 말해 투쟁을 통해 지켜졌던 것입니다. 인생의 재건은 은총입니다. 그것은 과분한 은총이지만 작업과 투쟁으로 지켜져야 하는 것입니다. 파괴의 상인들로 하여금 인생을 돌무더기나 폐허더미, 벽돌더미로 되돌리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하느님 백성들은 수차례 앞으로 나가야 했고, 또 패배해서 되돌아 왔으며,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그렇게 반복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폐허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힘을 위해서입니다. 인생의 재건과 구원의 힘에 대한 사람들의 증거는 옹호돼야 합니다. 성서는 이 사람들이 혼자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과 함께 그 일을 이뤄 냈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희망의 뿌리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백성을 재건하러 오시고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기 때문에 우리는 희망의 사람들입니다. 항상 자신 안의 성전을 재건하며 주님께 신뢰하는 열망을 갖고 있는 여러분들이지만 자기 파괴 열망에는 단호하게 대항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언제나 재건하려는 열망과 패배에도 절대 낙심하지 않는 은총을 주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은 패배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승리하는 검이십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길 빕니다.

 

“목소리 없는 이의 목소리가 되기를”

교종, 이탈리아 가톨릭신문출판인협회에 당부

프란치스코 교종은 9월23일 이탈리아 가톨릭신문출판인협회 회원들을 접견하고 가톨릭 언론인들이 평화의 언어를 사용할 때 사람들이 악에서도 선을 식별하도록 도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교종은 이들을 격려하면서 특히 협회 정관에 명시된 ‘인류, 복음, 그리고 가톨릭교회 가르침에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전문 교회단체’라는 창립자의 정신을 상기시켰다. 

연설 내용.

기자들은 ‘역사의 기록자’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악에서 선을 식별할 수 있고 비인간적인 것들에서 인간적인 것을 선택하는 양심의 목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진실을 말하십시오. 언제나 정중하고 절대 오만하지 마십시오. 수많은 공허한 말 중에 참된 말을 선택하십시오. 왜냐하면 여러분의 말이 세상의 이야기를 말하고 세상의 꼴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말은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이 공간들은 자유를 증진하거나 노예도 될 수 있습니다. 또 권력의 책임을 지는 자리가 되거나, 권력에 의존하는 자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직 ‘평화, 정의, 연대’의 언어를 사용할 때 더 정의롭고 지지하는 사회가 건설됩니다. 잘못이나 파괴적인 말이 있을 때도 여러분이 제대로 공헌해 주길 바랍니다. 특히 최근 디지털 시대를 맞아 언론인들은 어려운 과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인터넷 사용에 있어 여러분은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파악하고, 맥락을 확인하고 분석해 무엇보다 우선순위를 파악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목소리 없는 이들의 목소리가 되기 위해’ 뉴스 기사의 순서를 재배치하는 것을 절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사명은 수식어 없는 그리스도인의 소통”

교종, 바티칸 홍보부 직원들에게 강조

프란치스코 교종은 9월23일 바티칸 살라 레지아에서 ‘바티칸 홍보부서’의 모든 직원을 접견했다. 파올로 루피니 장관 인사말에 이어 교종은 소통에 관해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기 위해 사전 준비한 연설문을 배부한 다음 원고 없이 연설했다. 이번 만남은 부서의 총회 참가자들을 만나는 기회였다. 바티칸 홍보부 장관 루피니 박사는 바티칸의 첫 번째 평신도 장관이다. 

연설 요지.

모든 커뮤니케이션의 기원은 하느님이십니다. 곧, 소통하는 것은 하느님의 열망이었고,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 안에서 소통하시며 우리와도 소통하십니다. 이것이 소통(커뮤니케이션)의 시작입니다. 소통은 예컨대 광고와 같은 업무활동이 아닙니다. 소통은 하느님 현존에서 나온 행위며 그에 맞는 태도를 취합니다. 홀로 머물 수 없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내가 진실이라고 여기고, 옳고, 좋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을 소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홍보분야 전문가이고, 기술자들입니다. 완전히 참여하지 않고는 소통할 수 없습니다. 영혼과 육체를 통해 정신과 마음을 통해, 손을 통해 소통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통해 소통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소통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 주고 자신을 모두 소통하는 데 쏟으며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소통은 사랑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하는 일들 중 하나는 언제나 더 많은 인력을 얻으려고 애쓰는 세상 기업이 하는 것과 같이 단순히 광고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개종 강요’를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개종 강요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소통하길 바랍니다.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종님 말씀처럼 매력이 없으면 교회는 성장하지 못합니다. 소통이 증거를 통해 성장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선과 아름다움 없이 진실만 전하길 원하신다면 멈추십시오.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참여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살로 부딪히며 진실을 증거하지 않으면서 그저 그런 사실을 전달하길 원하신다면 멈추십시오. 우리가 행하는 일들 각각에는 항상 증거의 서명이 새겨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증거자라는 뜻입니다. 증거자, 곧 순교자입니다. 이것이 우리 소명의 ‘순교자’적인 차원입니다. 증거하십시오. 우리는 소수이지만 모든 이에게 복음을 전하길 바랍니다.

두 번째 강조할 사항은 종종 그리스도인 마음속에 스며드는 일종의 ‘체념’입니다. 세상은 세속적이며 언제나 그랬습니다. 세속주의란 새로운 것이 아니라 항상 교회의 위험요소였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작은 교회에 불과하지만 ‘진정한’ 교회라는 것을 많은 이가 지지하고 따릅니다. 저는 ‘진정한’이라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떤 것이 진정하다면 굳이 그것을 ‘진정한’ 것이라고 정의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체념의 유혹에 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소수에 속해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누룩과 소금과 같은 존재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문화적 패배 안에서 체념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악한 정신에서 옵니다. 체념의 불평은 그리스도인 정신이 아닙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고 싶은 두 번째 사항은 이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소수입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선교사가 되려는 우리가 누구인지 타인에게 보여 주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증거를 통해 말입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설교를 위해 형제들을 파견했을 때 말했던 구절을 한 번 더 되풀이합니다. “복음을 전하십시오. 혹시 필요하다면 말을 통해서도 전하십시오.” 이는 말보다는 증거가 우선이라는 뜻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강조하고 싶은 세 번째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수식어에 자리를 내주기 위해, 현실을 말하는 주어의 힘을 망각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주어에는 ‘진정한’이라는 수식어가 필요 없습니다. ‘형용사의 문화’에서 ‘명사의 신학’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소통은 간결해야 하지만 아름다워야 합니다. 아름다움은 18세기 로코코 예술이 아닙니다. 아름다움은 생크림 케이크에 딸기가 없이도 본질적으로 스스로를 드러냅니다. 이러한 점을 배워야 합니다. 증거를 통해 소통하고, 홍보 분야에 참여하고 전달하며, 사물의 본질을 통해 소통하고 순교자로,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증거자로서 소통하고 순교자로 소통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장기풍(스테파노)
전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
2006년 은퇴. 현재 뉴욕에 사는 재미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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