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화해평화네트워크, 한일 그리스도인들의 성찰과 나눔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년을 맞이한 올해, 한일 관계가 정치, 외교, 경제 전반에 걸쳐 대립과 갈등이 커지는 현실은 한일 가톨릭 신앙인들에게 화해와 평화를 위한 실천이 절박한 시대적 징표임을 보여 줍니다."(동아시아화해평화네트워크 참가자 결의문 가운데)

동아시아화해평화네트워크가 26일 ‘동아시아 화해와 평화의 길을 묻다’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진행했다.

새세상을여는천주교여성공동체,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한국가톨릭여성연구원 등이 참여하는 ‘동아시아화해평화네트워크’는 한국과 일본 간 오랜 갈등과 반목을 극복하고 나아가 동아시아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활동하는 가톨릭 신앙인들의 모임이다.

이들은 지난해 11월 나고야에서 열린 일본 가톨릭 정의평화 전국 집회에서 첫 세미나를 열며 활동을 시작했다.

올해 한국에서 열린 두 번째 세미나에서 한일 참가자들은 강연과 토론회에 이어 둘째 날인 27일에는 DMZ평화순례를 진행했다.

이날 세미나에서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장 이기헌 주교는 기조 연설을 통해, 화해와 평화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임무와 교회의 역할을 말하면서, “연대성은 의심 없이 그리스도인의 덕목이자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식별하는 표지”라는 교회 가르침을 들고, “그러나 연대를 위해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은 화해 이전의 사죄”라고 말했다.

이 주교는 진정한 사죄는커녕 한국을 무시할수록 힘을 받는 아베 수상과 우익 단체, 매스컴의 혐오가 도를 넘는 것을 보며 슬픔을 느낀다며, “더욱 슬프고 문제가 되는 것은 일본 국민, 특히 일본의 젊은이들이 한일 역사, 특히 식민지 침략의 역사를 모르거나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기게 만드는 일본 정부와 사회 분위기”라고 말했다.

그는 일본 교회와 한국교회의 연대를 비롯해 선량한 시민들의 연대에 희망을 갖는다며, 1986년 도쿄 FABC에서 일본 주교회의 의장이 전쟁의 책임을 고백하고, 1995년 2월 일본 주교단이 평화의 결의라는 교서를 발표한 것을 들어, “이러한 반성과 고백은 이해와 교류의 필요성을 낳았고 한국과의 화해를 위한 만남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일본 정의평화위원장 가쓰야 주교의 담화문대로 모든 것의 시작은 역사 문제인 식민지 가해에 대한 사과와 책임 인정에 있다고 다시 강조하는 한편, “적개심을 허물고 평화를 주는 분은 그리스도이고, 우리는 그분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일하는 사명을 받은 사절임을 다짐한다”고 말했다.

9월 26-27일까지 열린 동아시아화해평화네트워크 세미나. ⓒ정현진 기자

이어진 기조발제에서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변진흥 연구위원장은 먼저 한일 간 그리고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접근의 단초는 한일 관계의 위기를 보는 관점은 단순히 지난 역사 문제나 징용공 배상과 같은 사건이 아니라 더욱 깊숙이 자리 잡은 구조적 위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제시했다.

변 위원장은 한일 관계는 양국의 전략적 세계관이 다르다는 점에서 구조적 위기로 봐야 한다며, 한국의 입장에서 이 구조적 위기의 출발은 ‘냉전의 불완전한 해체’에서 비롯되며 한국은 여전히 냉전이라는 이름의 전쟁을 겪으며 반영구적인 분단, 이로 인한 갈등과 대립의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아베 정부에게 한일 관계는 동북아 냉전을 전제한 한미일 안보 삼각형의 하위 동맹으로 보지만, 문재인 정부는 동북아 냉전과 한반도 정전 극복을 전제로 남북일 평화삼각형의 밑변으로 한일관계를 재정립하려는 차이를 보인다고 부연했다.

그는 인간의 욕망을 국가이익으로 포장한 패권주의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평화사도직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두고, “평화사도직의 영성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평화황금률에 비춰, 모든 형태의 폭력이 평화와 배치됨을 전제로 한다. 평화는 평화를 이루려는 그 과정에서조차 폭력을 원천적으로 배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한일 그리스도인 평화사도직의 실천 과제를 제시하며, 일본 가쓰야 다이지 주교가 지난 8월 담화에서 언급한, 요한 갈퉁의 초월법적 접근 방식을 다시 주목했다.

변 위원장은 가쓰야 다이지 주교가 언급한 “양측이 바라는 바가 이루어짐과 동시에 무엇을 함께 만들어 내면서 갈등을 극복해야 한다”는 내용을 들어, “이는 갈등을 극복하는 초월법의 접근이 화해와 치유 과정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평화사도직 수행의 방향과 일치한다”고 말했다.

그는 갈퉁의 초월법에 따르면, 분쟁의 해결 역시 비폭력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뤄져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평화 워커’라는 중재자가 필요하다면서, “중재자는 분쟁 당사자들의 목표, 치유과정, 공동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조건 등을 살피고 합리적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대립의 타협점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적 해결법을 찾는 것이며, 이것이 동아시아 화해를 위한 한일 그리스도인 사도직의 출발점이자 목표”라고 강조했다.

강연 뒤, 참가자들은 화해와 평화를 위한 구체적 실천 과제를 논의했다. ⓒ정현진 기자

이어진 발제에서 히로시마교구 평화의사도추진본부 후루야시키 카즈요 수녀는 ’한일 역사문제를 바라보는 가톨릭교회의 입장‘에 대해, 그동안 일본 주교단의 메시지를 중심으로 그 특징과 내용의 변화를 살폈다.

먼저 카즈요 수녀는 일본 주교단이 처음으로 일치해 한일 역사를 언급한 문서는 1995년 낸 ’평화로의 결의‘로 사순절에 발표된 이 담화의 특징은 “2차 세계대전이 빚은 비극에 대해 용서를 청한 것, 위안부가 전쟁의 가해자가 일본임을 밝히는 산 증인이라는 점, 일본이 아시아인들에게 준 상처를 보상할 책임이 있으며, 다음 세대에 이를 부담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 등을 밝힌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주교단의 메시지가 일본의 전쟁 책임을 명확히 하고 그 죄값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천명하기까지 과정을 살피면서 그 시작은 1984년 사회주교위원회의 ‘외국인 등록법에 관한 건의서’에서 일본 국적을 상실한 재일조선인에 대한 인권침해를 인식한 것에서 비롯된다.

당시 이 건의서에서는 처음으로 한일 관계가 언급되는데, 이후 1970년대 일본 내 진보적 그리스도인들이 식민통치야말로 최대의 인권 침해임을 직면하는 등의 변화가 시작되면서, 1986년 한일 주교단은 공동으로 외국인 등록법 개정과 지문날인 제도의 철폐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냈다. 이는 역사 속에서 죄를 갚고 한일 간 신뢰관계를 만들겠다는 표현이었다.

카즈요 수녀는 이어 1993년 일본 정치권에서 위안부에 대한 일본의 관여와 책임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 일본 교회도 1995년 ‘평화로의 결의’에 그 내용을 담게 됐다며, 일본 주교단은 2005년과 2015년 전후 60년과 70년을 기해 메시지를 내는 등 한일 간 평화와 화해를 위해 인내심 있게 호소하는 주교단의 자세는 1995년부터 일관되었다며, 앞으로도 한일 관계에 대한 일본 교회의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일탈핵평화순례 담당자 박유미 씨는 한일 교회 교류의 하나인 ‘한일탈핵평화순례’의 사례를 두고 한일 가톨릭교회의 교류와 연대를 살폈다.

탈핵평화를 위한 한일 교회의 교류와 연대는 2011년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본격화됐으며 한일 교회는 핵발전소 폐지에 뜻을 모았다.

이렇게 시작된 한일 간 탈핵평화운동은, 탈핵, 반핵으로부터 군축 평화 등의 주제로 확대됐으며, 2015년에는 한일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차원으로 전환됐고 다시 생태환경위원회도 결합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꾸준히 연대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평화와 화해를 위해서는 연대와 상대방을 알아가는 일, 친구가 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정현진 기자

마지막으로 예수회 도쿄 사회사목센터에서 활동하는 야나가와 토모키 씨는 일본 가톨릭 청년의 입장에서 한국과 일본의 역사와 평화 문제를 살폈다.

“우리 마음속에는 여러 가지 무기가 있습니다. 긍지와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명분의 편견이라는 견고한 갑옷, 불편한 주장에 귀를 막는 철벽 방패, 마음에 안 드는 생각이나 존재를 부정하고 싶어 하는 날카로운 칼. 우리는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무장을 하지만, 마음의 무장 해제가 필요합니다.”

그는 예수회 평화청년 프로젝트 가운데 지난해 일본 청년 9명이 ‘역사화해를 위한 여행’으로 한국을 방문한 체험을 소개하며, “참가자들의 공통점은 모종의 긴장감, 공포와 불안을 느끼는 괴로운 여행”이었다면서도, “그럼에도 참여한 것은 젊은 세대로서 과거와 미래에 대한 책임을 강하게 느꼈기 때문이며, 평화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자 정의를 추구하는 신앙인으로서 화해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눈감아 버리고 싶고, 잊어버리고 싶은 부정적인 역사를 용기 있게 기꺼이 직시하는 일, 풀기 어려운 일이고, 이미 지나간 일이라는 변명을 하지 않으며 아픔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일, 혼자가 아니라 동료와 서로 나눠지는 것이 여행에서 얻은 배움”이라며, “짐을 나눠 질 동료가 있다는 것 자체가 희망인 동시에 화해를 향한 첫걸음”이라고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날 한일 참가자들은 세미나 마지막에 ‘한일 그리스도인의 평화선언’을 발표했다.

이들은 “동아시아의 화해와 평화를 저해하는 모든 대립과 갈등, 폭력을 넘어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으로 새로워지는 평화의 길을 찾아 나설 것, 원수도 사랑하라는 평화 황금률에 따라 집단지성의 힘을 강화하고 연대를 확장 강화할 것”을 결의했다.

또 이와 함께, 가톨릭 신앙인은 물론 이웃 종교와 선량한 시민들, 나아가 세계 시민과 연대할 구체적 과제를 찾고 실천하겠다고 다짐했다.

동아시아화해평화네트워크 한일 참가자들. ⓒ정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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