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큘라, 엄니와 화해하다 6]

엄니(89살)가 속한 세대의 여자는 평생 3명의 남자에게 귀속된다. 자신을 낳아 준 아버지는 결혼 전까지 딸의 인생을 좌지우지했다. 결혼 후 살게 되는 남편은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시집 식구와 함께 부인의 삶을 억압했다. 자신이 낳은 아들은 남편과 사별 뒤 어머니가 기대야 할 기둥 역할을 한다. 가부장 제도의 위력이 지금보다 훨씬 강했던 그 시절의 여자가 한 주체로서 독립된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을 살려면 죽음을 각오하는 결정을 해야 했다. 그 당시 여자는 가부장 제도의 희생자였고, 남자는 가부장제의 수혜자였다. 엄니의 인생은 그 시대의 문화와 정신에 따라 자신의 의지, 욕망, 꿈과는 상관없이 정해졌다.

4남3녀의 넷째였던 엄니는 딸 중에서 가장 학구열이 높았다. 큰오빠는 마을에서 흔치 않게 서당에 다녔는데 그런 오빠를 보며 엄니는 참으로 부러웠다고 한다. ‘나도 오빠처럼 서당에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계집애가 배워서 뭣 하려고’ 하며 단칼에 딸의 욕망을 잘라버렸다. 한학을 많이 배웠던 오빠는 배움을 펼쳐 보기도 전에 후두암으로 젊은 시절에 생을 마감했다. 엄니의 세 남동생은 각각 대학교, 육군, 해군사관학교를 나와 자신의 꿈을 이루며 살았다. 한번은 도시에서 살다가 시골로 내려온 사람이 간이 학당을 차려서 아버지(외조부) 몰래 그곳에 갔던 것이 발각되어 엄니는 물론 딸 관리를 못한 어머니(외조모)도 엄청나게 맞았다. 배움의 길이 막혀서 우울한 어린 시절이었지만 어린 엄니의 숨통은 다행히 막히지 않았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가난한 집 막내아들로 태어난 할아버지는 무일푼으로 남의 집 머슴을 살다가 곱게 자란 할머니와 결혼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불 같은 성격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셨다. 내가 엄니를 따라 외갓집에 갔을 때, 할머니는 치마 속바지 주머니에 소중하게 간직한 손수건에서 돈을 꺼내 나에게 주신 기억이 생생하다. ⓒ최금자

무성영화의 변사처럼 흉내를 잘 내고 판소리 사설과 민요를 맛깔나게 불렀던 엄니는 고향인 명당리에서 스타였다. 지금처럼 농사일 말고는 딱히 여가생활이 없었던 농촌에서 엄니는 마을 아줌마들에게 불려가 자신의 끼를 마음껏 발휘하였으니 말이다. 엄니는 지금도 기분이 좋으면 판소리 사설을 한 가닥 뽑거나 민요를 부르신다. “엄마, 그건 뭔 사설이야?”고 물으면 “그건 잘 모르겠다”라고 하신다. 지인들의 나에 대한 첫인상은 까칠녀, 일명 ‘까칠한 금자 씨’인데 그런 선입견과 다르게 나는 엄니의 끼를 이어받아 명랑하다. 엄니로부터 상처만이 아니라 재능을 물려받은 것이 다행이다.

엄니는 19살에 아버지와 결혼했다. 한학자인 엄니의 큰아버지는 학문교류를 활발하게 했던 절친 한학자 눌암공(친조부의 호)에게 조카인 엄니를 소개하여 아버지와 엄니의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결혼 첫날밤을 치르고 다음 날부터 엄니는 시어머니의 혹독한 시집살이를 10년 동안 손위 동서와 함께 힘들게 견뎌야 했다. 시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으로 들어온 시어머니 서 씨-성차별이 심했던 당시는 딸에게 이름을 지어 주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친손자, 손녀보다 외손자, 손녀를 엄청나게 챙기셨다. 엄니는 자신은 성씨가 다른 남의 식구라 치더라도 친손자와 손녀를 차별하는 시어머니의 행동에 많이 서운하고 분했다. 시어머니 자신은 시집살이를 전혀 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았는데도 두 며느리에게 지독한 시집살이를 시켰다. 

쌀가게 안쪽 주인집에 세 들어 살았던 아줌마 식구와 함께. 아이를 안고 있는 사람이 엄니다. 60년대 우리가 살았던 집은 시장에서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었고 수도시설이 없었다. 엄니는 가게 주인집 수돗가에서 빨래도 하고 김칫거리도 씻어 머리에 이고 집까지 오셨다. 다섯 자식뿐 아니라 시숙, 시동생들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던 엄니의 어깨는 늘 무거웠다. ⓒ최금자

자식 양육, 시집 식구 수발, 밭농사, 길쌈 등 새벽에 일어나 종일 식구와 일꾼들의 세 끼니 챙기고 뙤약볕에서 밭일하고 저녁에는 반쯤 조는 상태로 길쌈을 메고 나면 자정이 훌쩍 지났다. 그야말로 등골이 휘고 손이 닳도록 일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삶에 눈물도 많이 흘렸다. 더군다나 친정이 엎어지면 코앞인데도 ‘한 번도 친정 다녀오라’라는 말을 하지 않은 시어머니가 너무도 미웠다. 엄니는 꿈 많았던 소녀였던 자신의 인생을 단숨에 바꿔 놓은 그 큰아버지를 지금도 원망한다. “큰아버지는 왜 날 그 집안에 엮었는지 모르겠다. 니 애비를 만나서 내 인생은 요 모양 요 꼴이다”는 말은 힘들 때마다 아버지에게 눈을 힐끗 흘기며 하는 엄니의 푸념이다.

여러 사정으로 시골 생활을 정리하고 징글징글한 시어머니의 품을 벗어나 1959년 서울에 안착한 뒤에도 엄니의 고생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 아버지가 정미소를 운영해서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게 살았다. 그런데 큰아버지의 노름빚으로 정미소가 남의 손에 넘어가는 바람에 쫄딱 망했다. 빚더미에 내몰린 부모님은 야반도주하듯이 고향을 등져야 했다. 부모님은 큰아들과 둘째 아들을 시골에 남겨 두고 아직 어렸던 딸과 막내아들만을 데리고 맨몸으로 서울로 올라오셨다. 서울 생활을 시작한 이듬해에 나는 태어났다. 부모님의 서울 삶은 맨땅에 헤딩하는 생활이어서 맘과 몸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엄니는 다섯 자식을 키우면서 약수동 시장에서 장사하는 아버지를 도우랴, 서울까지 따라와 우리 집에 얹혀살았던 큰아버지, 고모와 삼촌 때문에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지옥과 같은 삶을 살았다. 

한 번은 자신의 인생이 너무도 한탄스럽고 일상이 너무도 버거워 가출을 했다. “엄마는 지금 집을 나가버린다.”라는 말에도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한 큰아들과 둘째 아들은 멀뚱멀뚱 엄니를 쳐다보았다. 더 버티다가는 죽을 것 같다는 생각에 집을 나와 약수동에서 서울역까지 무작정 걸었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나오는 바람에 수중에 돈 한 푼 없어서 기차표를 살 수 없었다. 다음 순간 자식들의 얼굴이 눈에 밟혀 다른 삶을 택할 수 없었다. 서울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평소 엄니가 힘들 때마다 잘 다독거려 주었던 ‘재현 할머니’-그녀 자신도 비행 청소년이었던 손자를 어렵게 키우며 살던-집에 들러 그간의 사정을 얘기하고 나니 한결 기분이 풀렸다. 언니와 나는 하마터면 엄마 없는 험난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그날의 사건을 엄니의 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엄니의 젊었을 때(40대 전후반) 모습. 삼성그룹의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의 비서실장이 부모님 가게에서 정기적으로 쌀을 주문했다. 그가 엄니를 보고 ‘쌀장사하기에는 아까운 인물’이라 했다며 큰외삼촌처럼 배웠더라면 장관은 하고도 남았을 것이라고 지금도 아쉬워하신다. ⓒ최금자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 가사처럼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하고~♬ 고달픈 인생길을 허덕이면서 아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낸” 엄니는 긴 세월 동안 무지 고생했다. 누구의 딸로, 아내로, 며느리로, 어머니로서 하루하루가 힘겹고 고달파 자신조차도 버거웠던 엄니가 자식에게 어떻게 따뜻한 말 한마디, 한 번의 포옹, 칭찬을 할 수 있었겠는가? 사랑을 받아 본 사람만이 사랑을 줄 수 있으며, 칭찬과 격려를 체험한 사람만이 제 경험에 비추어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행동을 할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내가 엄니 시대에 태어났다면 엄니보다 더 잘 살 수 있었을 것 같지 않다. 

한 번은 언니와 대화 중에 “만약에 엄니가 우리를 버리고 집을 나갔다면, 아버지는 재혼했을 테고 우리는 계모 밑에서 구박을 받으며 천덕꾸러기 되었을 거다. 재혼하지 않았다면 보육원에 보내지고 뿔뿔이 헤어져 지금과는 전혀 다른 불행한 삶을 살았을 거다. 우리가 엄마에게 받은 상처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지만, 엄마가 우리를 버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그건 그렇지, 뭐.” 그래서 언니와 나는 엄니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해 지금도 종종 아프지만, 고아로 살거나 계모 밑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라는 것에 동의했다. 우리를 버리지 않고 지금까지 우리를 키워 준 엄니에게 감사해야 하는 이유를 찾았다. 

내가 엄니에 대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장면 하나가 있다. 내가 결혼해 인천시 십정동에 살고 있을 때 엄니는 연락도 없이 김치를 가득 담은 배낭을 들쳐 매고 왔다. 서울에서 전철을 타서 인천 동암역에 하차해 내게 전화를 하셨다. “나 지금 동암역에 있다. 나와라!”, ‘오 마이 갓!’ 당시 엄니 연세가 70대였고 나는 40대였는데 배낭을 짊어진 순간 너무 무거워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에 몸으로 사랑을 보여 주신 엄니를 잊을 수 없다.

최금자(엘리사벳)

주일학교 중고등부 교리교사. 30년 넘게 청소년들과 희로애락을 나누며 즐겁게 살고 있다. 인생의 동반자 베드로와 함께 지난 6년 동안 열었던 붙박이 ‘어린이카페 까사미아’를 이어서 청소년들을 위한 ‘무빙 까사미아’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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