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

(편집 : 장기풍)

“항상 선을 통해 악을 치유할 시간이 있다”

교종, 9월22일 연중 제25주일 삼종기도 가르침

프란치스코 교종은 9월22일 연중 제25주일 삼종기도 전 가르침에서 이날 주일 복음에 나오는 ‘약은 집사’의 비유를 설명하면서 이 비유 말씀은 그리스도인을 세속적인 성공이 아니라 재산의 소유보다 사람과 관계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며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데 ‘영민한’ 사람이 되라고 초대하는 것이라고 풀었다. 

가르침 내용.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복음(루카 16,1-13)은 주인의 재산을 낭비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하게 된 부정직하고 약은 집사를 주인공으로 소개합니다. 이 상황에서 그 집사는 반박하거나 합리화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안정된 미래를 보장하기 위한 탈출구를 궁리합니다. 먼저 그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명석하게 반응합니다.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루카 16,3)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주인의 재산을 뒤로 빼돌려 영악하게 행동합니다. 실제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나중에 그들로부터 보상을 받기 위해 그들을 불러 주인에게 진 빚을 탕감해 줍니다. 부패를 통해 친구가 되고, 부패를 통해 치하를 받는 것은 불행하게 오늘날 세태와 같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그의 불의가 아니라 영민함을 권면하시기 위해 이 사례를 소개하십니다.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6,8) 다시 말해 지성과 약삭빠름이 섞인 행동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게 해준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는 키워드는 비유의 마지막에 나오는 예수님의 초대입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 이야기가 약간 혼란스럽게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불의한 부’는 ‘악마의 배설물’이라 불리는 돈이며 일반적으로 물질적 재산을 가리킵니다.

부는 장벽을 세우고 분열과 차별을 조장하도록 부추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와 반대로 진로를 바꾸라고 초대하십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재산과 부를 ‘관계’로 변화시킬 줄 알라는 초대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사물이나 재산의 소유보다 더 가치 있고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생에서 결실을 맺는 것은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다양한 ‘부’, 즉 하느님께서 주신 여러 가지 선물을 통해 많은 결속, 많은 관계, 많은 친구를 만들고 활기차게 유지하는 사람입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는 권고의 최종목표를 알려주십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 천국에 받아들여지기 위해 우리가 ‘부’를 형제애와 연대의 도구로 변화시킬 수 있다면 천국에는 하느님뿐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의 손에 맡겨 두신 재산을 관리하며 우리가 함께 나눴던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이 복음말씀은 주인에게 쫓겨난 약은 집사의 질문을 우리 안에서도 반향시킵니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루카 16,3)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잘못이나 실패 앞에서 항상 선을 통해 우리가 저지른 악을 치유할 시간이 있다고 보장해 주십니다. 눈물을 흘리게 한 사람은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부당하게 재물을 훔친 사람은 필요에 처한 사람에게 재물을 주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영민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에게 칭찬을 듣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자녀임을 인식하고 하늘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현명함으로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최후 심판의 순간 우리가 도와주었던 필요에 처한 사람들이 그들 안에서 우리가 주님을 보았고 그분을 섬겼다고 증언할 수 있도록 거룩한 동정녀께서 세속적인 성공이 아닌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는 데 영민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우시길 빕니다.

 

“교회는 하느님 자비의 집입니다”

교종, 9월21일 로마근교 알바노 사목방문 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9월21일 로마 인근 알바노 교구를 사목방문하고 주교좌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강론했다. 교종은 강론에서 우리 각자는 이웃을 심판관의 눈이 아니라 형제로서 바라봐야 한다며 “우리는 타인의 삶을 감시하는 감찰관이 아닌 모두의 선을 증진시키는 사람들”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교종은 교회를 세속적인 부수적인 것으로 채우거나 사교모임으로 만들지 말라며, 교회는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는 장소임을 기억하라고 말했다. 

강론 내용.

교회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이나 잊혀진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자캐오의 이야기(루카 19,1-10)에서 보듯이 자캐오는 비록 작은 체구지만 예리코를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돌무화과 나무로 올라갔습니다. 그곳 마을사람들 눈에 자캐오는 구원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을 위해 세금을 징수하던 세리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위를 쳐다보시며 그의 집에 머무르고 싶다면서 얼른 내려오라고 초대하셨습니다. 이처럼 죄와 험담의 방해와 한계들에도 하느님께서는 ‘가장 큰 죄인을 기억하십니다. 여러분의 주교좌성당 축성기념일의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첫 글자를 대문자로 쓰는 모든 교회는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신다는 기억을 사람들 마음속에 생생하게 새겨 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교회는 우리 각자에게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도 다음과 같이 말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여러분은 사랑받았고 예수님에게 이름을 불리며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분을 마음에 간직하십시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처럼 여러분의 도시를 지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가장 잊혀진 사람에게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당신을 기억하십니다”라고 말하기 위해 수치심이나 두려움, 고독의 나뭇가지 뒤에 숨어 있는 사람에게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의 ’먼저“가 삶을 변화시킵니다. 사랑의 대용품으로 자신을 내팽개치지 마십시오.

자캐오가 예수님이 어떤 형태의 스승님인지 이해하려고 애쓰는 동안 주님께서 직접 그를 먼저 찾아 주셨음에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먼저 보고 말씀하십니다. 이같이 하느님의 ‘먼저’를 발견할 때, 무엇보다 먼저 우리에게 도달되는 그분의 사랑을 발견하게 될 때, 삶이 변화됩니다. 여러분이 만일 자캐오처럼 삶에서 의미를 찾지만 찾지 못하고 재산, 경력, 쾌락 그리고 일종의 약물의존 같은 ‘사랑의 대용품’에 자신을 내팽개친다면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도록 자신을 내어 맡기십시오. 오로지 예수님과 함께할 때 항상 사랑받는 존재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부수적인 많은 것으로 신앙을 복잡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지금의 교회처럼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오신 것인지, 그분이 먼저인지, 아니면 ‘우리의 조직’이 먼저인지 자문해 봐야 합니다. 

모든 회심은 자비의 ‘먼저’에서 생겨나고 마음을 사로잡는 하느님의 따뜻한 애정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이 예수님의 자비로운 시선에서 시작되지 않는다면 신앙을 세속화시키고 복잡하게 만들며, 문화적인 토론이나 능률주의적 관점, 정치적 선택, 정당 선택 등 신앙을 수많은 부수적인 것으로 채우는 위험을 떠안게 됩니다. 하지만 본질적인 것, 신앙의 단순함, 무엇보다 먼저인 것, 곧 하느님의 자비와 깊은 만남을 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중심에 두지 않거나 우리 모든 활동의 시작과 끝에 있지 않다면 하느님을 ‘집 바깥으로’ 내모는, 즉 당신의 집인 교회 안에서가 아닌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으로 만드는 위험을 떠안게 됩니다. 오늘 말씀의 초대는 하느님에게 자비를 받도록 자신을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자비를 가지고 오십니다. 교회는 타인에 대한 험담의 장소가 아니라 환대의 장소가 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캐오에게 그의 집에 머물겠다고 말씀하실 때,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하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캐오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8)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이는 1/5을 보태어 되갚기를 요구했던 율법규정(레위 5,24)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자캐오는 사랑을 찾았기 때문에, 집이라고 느끼기에, 그런 말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 이웃과 지인이 교회를 자기 집처럼 느낀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공동체는 많은 사람에게 이질적이고 매력 없는 곳으로 되어 가고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 또한 교회를 폐쇄적인 사교모임, 엘리트끼리 친밀한 장소를 만들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하느님 집에 대한 향수를 가졌지만 사랑받고 있는 것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설 용기조차 내지 못한 형제들도 많습니다. 어쩌면 그들을 나쁘게 대했거나 바깥으로 쫓아버렸거나, 그들에게 성사생활만 요구했던 사제를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아주 안 좋은 일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멀어져 간 겁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교회가 사람들이 사는 집 가운데 하나이기를, 인생의 나그네인 모든 사람이 우리 가운데에서 사시러 오신 그분을 만나는 환대의 장소가 되길 바라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교회는 결코 타인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봐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캐오에게 하셨듯이 아래에서 위를 바라보는 곳이어야 합니다. 사람을 위에서 아래로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은 그를 돌보려고 도와주기 위한 순간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을 위에서 아래로 바라봐선 안 됩니다. 그가 넘어질 수 있는 그 순간에만 그렇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결코 심판관이 아닌 형제의 눈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는 타인의 삶을 감시하는 감찰관이 아니라 모두의 선을 증진시키는 사람들입니다. 모두의 선을 증진시키는 사람이 되기 위해 중요한 한 가지는 혀를 놀리지 않는 것입니다. 타인의 험담을 하지 않는 겁니다. 험담하려는 사람을 치료하는 좋은 약은 혀를 절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이론을 고안해 내고 인터넷에서 답변을 찾으려 시간을 쓰는 복잡한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열심히 나무로 올라갔던 자캐오처럼 부모와 친구가 필요한 어린이처럼 돌아가라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 또한 하느님과 타인이 필요하고 그 누구도 원수로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잘못한 게 있으면 선으로 되갚아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 제자들은 지나간 악의 노예가 아니라, 자캐오처럼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은 사람들로 할 수 있는 선행만 생각해야 합니다.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찾아 구하기를 회피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곳 알바노 주교좌성당이 모든 교회처럼, 주님의 자비가 먼저 느껴지고 집으로 받아들여지며, 주님께서 기억해 주신다는 것을 각자 안에 느낄 수 있는 장소가 되고, 교회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 곧 구원이 삶 속에 들어왔기에 기뻐하는 일이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거짓 신비주의가 아닌 애틋한 사랑이 필요”

교종, 가르멜회 총회 참석 수도회 대표에 강조

프란치스코 교종은 9월21일 바티칸에서 ‘가르멜산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수도회’ 총회에 참석한 가르멜회 수도자 대표들을 접견하고 부성(父性)과 솔직함으로 복음의 기쁨을 세상에 나누라는 부르심을 받은 행보에 대해 연설했다. 이 자리에서 교종은 교묘하게 교회를 파괴할 수 있는 위험한 유혹, 곧 세속적인 것, ‘안주하려는 경향’과 미지근함, ‘주말 연대’, ‘거짓 신비주의’, ‘벗겨지고, 모욕당하고, 노예가 된’ 형제들 안에 보이는 그리스도의 상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모든 것에서 수도자들이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훈화 내용.

가르멜회 관상생활 양식은 여러분이 모든 직무와 사도직을 통해 하느님의 백성에게 봉사하도록 준비시킵니다. 여러분의 사명을 하느님과 개인적 관계 안에 뿌리내릴 정도로 풍부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쁨이나 사람들의 걱정에서 분리된 황홀경과 탈혼상태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관상은 성소이며 하느님과의 일치이기 때문입니다. 동행과 기도는 복음의 온전하고 확실한 전파를 위한 두 번째 중요한 목표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데 파치 성녀의 말씀처럼 하느님 없이 많은 것을 걱정하는 것은 언젠가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복음적 권고가 타성에 젖을 때 미지근함이 봉헌생활 안에 스며들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경계해야 할 유일한 위험은 아닙니다. 교회, 특별히 교회 사람들인 우리에게 가장 위험한 유혹인 세속적인 것이 끼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 유혹이 들어와 여러분 사이에서도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시기를 기도했고 지금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총회는 이러한 위험들에 맞서 함께 싸울 힘인 성령을 받기 위한 섭리의 기회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말한 것처럼 ‘외적’으로 사는 것보다 ‘내적’으로 사는 것이야말로 이같은 바이러스에 대처할 최고의 해독제입니다. 사람들에게 기도를 많이 하도록 가르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라 신앙을 지닌 사람들, 하느님의 벗으로 영적인 길을 걸어갈 줄 알도록 하는 것입니다. 침묵과 기도에서 새로운 공동체와 진정한 직무가 생겨날 것입니다. 형제애의 훌륭한 장인처럼 여러분은 안주하려는 경향에 대한 타성을 이겨 내고 수도 공동체를 ‘작업단체’로 전락시키려는 유혹을 피하면서 주님을 신뢰하십시오. 관상하는 이는 가엾은 마음을 지닙니다.

가르멜 회원의 소명은 저도 교종직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애틋한 사랑’과 ‘가엾은 마음’입니다. 관상하는 이는 애틋한 사랑를 갖고 있기에 삶에 찌들고 포기를 경험하고 사랑이 깨진 이들의 상처치유를 위한 향유입니다. 또한 관상하는 이는 작고 버림받은 이들을 위한 애정의 표시입니다. 머잖아 선종 300주년을 맞는 복자 안젤로 파올리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가난한 이들, ‘예수님의 형제들’ 안에서 그분을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항상 그들을 찾아 나서는 데 좋은 자질을 지녀야 합니다! 복자 안젤로 파올리는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절대적 신뢰를 보이며 기쁨에 차 ‘저는 부족함이 전혀 없는 식료품 창고를 갖고 있습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여러분의 식료품 창고는 모든 형태의 인간 고통 앞에서 가엾은 마음이 넘쳐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엾은 마음’을 갖지 않고 관상하는 이를 경계해야 합니다. ‘애틋한 사랑’만이 ‘거짓 신비주의’, ‘주말 연대’ 그리스도의 상처에서 멀어지는 유혹에서 우리를 보호해 줍니다. 예수님의 상처는 오늘날에도 ‘벗겨지고, 모욕당하고, 노예가 된’ 형제들의 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상처들을 어루만지고 쓰다듬으면서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오늘날에는 어두운 밤과 인간의 비극 앞에서 우리를 더욱 예민하게 만드는 ‘애틋한 사랑의 혁명’이 필요합니다.

 

“사제직은 기능이나 노동계약이 아닌 은총”

교종, 9월19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9월19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에서 “우리가 은총을 개인적으로 사용하거나 자신만을 위해 집중시킬 때 주교든 사제든 그 핵심을 잃고 은총을 기능으로 변질시킨다”고 경고했다. 또 은총에 대한 관상의 부족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탈선이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이날 미사에서 교종은 사제서품 은경축을 맞은 신부들과 80살에 접어든 안코나-오시모 은퇴 대교구장 에두아르도 메니첼리 추기경에게 축하인사를 전했다. 

강론 내용.

직무 사제직은 기능이나 노동 계약이 아닙니다. “나는 이것을 해야 해”라고 말하는 것은 부차적입니다. 우선적인 것은 은총을 받아야 하고 그 은총을 선물처럼 지켜야 합니다. 은총을 관상하는 것에서 모든 것이 나옵니다. 우리가 이를 망각하거나 은총을 개인적으로 사용하고, 기능으로 변질시키면 사제 직무의 핵심을 잃어버리고 우리 모두를 바라보시며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시선을 놓치고, 감사함을 잃어버립니다. 사제 직무를 자기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것은 위험합니다. 은총과 선물로서의 사제 직무에 대한 관상의 부족이 가장 추악하고 끔찍한 것에서부터 일상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탈선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은총에 대한 감사를 드리거나 우리에게 사제 직무의 은총을 주신 분을 사랑하기보다는 사제 직무를 우리 자신에게만 집중시키게 합니다. 따라서 실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관상하고 지키십시오. 사도 바오로 말씀처럼 은총은 사제들의 안수와 예언적 언어를 통해 부여됩니다. 이는 주교뿐 아니라 모든 사제들에게도 해당됩니다. 그래서 기능이 아닌 은총으로서의 사제 직무에 대한 관상의 중요성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은총을 지키기 위해 선의와 지혜와 기민함을 갖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루카 7,36-50)에 나오는 바리사이인은 좋은 바리사이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손함의 은사와 그 자체로 선물인 ‘함께하는’ 은사를 잊어버렸습니다. 어떤 이득이 연루돼 있거나, “나는 이것을 해야 해, 해야 해, 해야 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항상 은총을 망각합니다. 사제를 비롯해 우리 모두는 해야 할 일이 있으며, 그 첫 번째는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건 없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총 자체인 이 사명이 나오는 근원과 중심을 지켜야 합니다. 기업가 같은 사목자가 되지 않도록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받은 은총을 훼손하지 않고 기업가나 사업가와 같은 사목자들이 되지 않기 위해 우리의 은총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우리의 사제직무가 우선적으로 은총과 봉사라는 것을 깨닫도록 도와주시길 청합니다. 많은 것이 우리로 하여금 은총에 대한 관상과 사제 직무의 은총을 우리에게 주신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끝으로 특히 오늘 모두를 위해 사제서품 25주년 은경축을 기념하는 사제들을 위해 주님의 은총을 청합니다.

장기풍(스테파노)
전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
2006년 은퇴. 현재 뉴욕에 사는 재미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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