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우 신부] 9월 22일(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지혜 3,1-9; 로마 8,31ㄴ-39; 루카 9,23-26

오늘 교회는 이 땅의 순교성인들을 기억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대축일을 맞을 때마다 마음을 새로이 다지게 됩니다. 광헌아우구스티노. 6살에 동생과 함께 유아세례를 받으면서 당시 본당 수녀님이 지어 주신 세례명입니다.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성인이지요. 제 동생의 세례명은 광렬요한, 이광렬 요한 성인입니다. 103위 한국 순교 성인 중 형제 성인을 세례명으로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어릴 땐 참 이 세례명이 낯설었습니다. 길기도 하고 주위에선 같은 세례명을 쓰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딱 두 분 만났습니다) 

그러나 저 역시 여느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자신의 세례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고 그 관심은 자연스레 한국 천주교회사와 순교 성인들의 삶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관심의 수준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저버릴 수 없기에 자신의 목숨을 바친 사람”이라는 종교적 의미의 순교에서 그다지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종교적 차원의 순교의 의미에만 오랫동안 머물러 있던 저에게 잊고 있었던 다른 의미를 깨우치게 된 작은 계기가 있었습니다. 대학원 1학년 때 신학교 교수신부님이 쓰신 논문의 첫 부분에 있던 글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은 그리스도 신앙을 ‘종교적 복음’으로만이 아니라 ‘사회적 복음’으로 인식하여 신분제 타파 등과 같이 사회의 불평등과 불합리에 항거했으며 형장의 마지막 순간에서도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성, 신앙과 양심의 자유 그리고 정의를 위한 자신들의 입장을 명백히 밝혔기 때문이다.… 순교자들의 죽음은 이미 종교적 차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과 연관되고 그것에 영향을 끼치는 보편성을 보이고 있었다는 것이다.”(이진수, "기적으로서 순교", 신앙과 삶 30호 2014, 8-9)

새삼스레 특별한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신학교를 다니면서 모든 것을 신학적 종교적 의미로 해석하는 데 익숙해진 저를 새롭게 해 준 계기가 되었습니다. 신앙과 사회의 관계에 있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저에게 또 하나의 토대가 되어 준 기회였습니다. 많은 분이 아시겠지만 조선시대에 수많은 사람이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것은 당시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진산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등이 제사를 거부하고 신주를 불태우는 일 등 주님을 향한 신앙의 여정과 당시 사회의 분위기는 조화로울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조선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기억하는 수많은 순교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당시 사회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인 것입니다.

순교 성인 이광헌 아우구스티노(오른쪽)와 이광렬 요한. (이미지 출처 = 굿뉴스 성인목록)

순교는 과거의 단편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순교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지금 역시 수많은 곳에서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올바르게 지키기 위해 피땀 흘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종교의 자유가 없는 곳에서 하느님을 믿다가 박해받는 종교적 의미의 순교는 물론이거니와 잘못된 사회를 바로잡고자 그 속에서 하느님의 정의와 평화를 외치는 이 시대의 또 다른 의미의 순교가 발생하는 순간도 목격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순교가 현재 진행형인 사건임을 명확하게 알려줍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순교자의 원형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지신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바로 ‘날마다’입니다. 내가 머무는 바로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자 실천하는 것, 그리스도교 신앙을 종교적 복음으로만 아니라 사회적 복음으로 인식하는 것이 바로 이 시대가 말하는 백색순교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려는 우리 마음속에는 하느님에 대한 굳은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순교자들은 누구보다도 하느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계시다고 굳게 믿은 사람들입니다. 2독서에 등장하는 바오로 사도의 아름다운 고백-“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이 바로 순교자들의 마음과 다름이 없을 것 같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로서의 순교자들에 대한 기억에서 넘어서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또 다른 의미로서의 순교를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함께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오라는 주님의 뜻에 맞갖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유상우 신부(광헌아우구스티노)

천주교 부산교구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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