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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9월 5-6일)[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

(편집 : 장기풍)

“증오와 복수는 국가의 원동력이 될 수 없다”

교종, 모잠비크 미사, “부패 극복하고 평화 누릴 권리 강조”

프란치스코 교종은 9월6일 모잠비크를 떠나 마다가스카르로 출발하기에 앞서 마푸트 짐페토 경기장에서 6만 군중이 모인 가운데 미사를 집전했다. 교종은 강론에서 증오와 복수가 한 국가의 원동력이 될 수 없다면서 평화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부패나 정치적, 개인적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게 필요하고 강조했다. 또 미래는 소위 ‘폭력의 평등’이라는 것에 바탕을 두지 않으며, ‘눈에는 눈, 이에는 이’와 같은 복수와 증오와 부패 위에 기반을 두지 않는다면서 대신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 위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종의 이번 강론 배경은 1988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이 모잠비크에서 역설한 용서와 화해에 대한 권고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다. 당시 모잠비크는 전쟁으로 100만 명 사상자를 냈으며 1992년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또한 지난해 8월에는 평화를 향한 노력이 다시 한번 요구됐다. 교종은 미사 시작 전 드림센터에서 선물 받은 주교 목장을 들고 제대가 마련된 단상으로 향했다. 이날 경기장 미사는 비가 내리고 있음에도 따뜻함과 찬송, 자유분방하고 흥겹고 다채로운 모습으로 진행됐다. 

강론 내용.

어떤 가족도, 어떤 이웃 집단, 심지어 어떠한 국가도 그들을 하나로 묶고 하나로 모으며, 서로의 차이를 조화롭게 하는 원동력이 복수심과 증오심에 기반을 둔다면 미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폭력을 가한 이들에게 똑같이 보복하기 위한 합법적 형태로의 보복의 기회를 계획하는 일에 동의하고 가담해서는 안 됩니다. 무기와 폭력은 해결을 가져다 주기보다는 새롭고 더욱 심각한 분쟁을 조장합니다. ‘공정성’을 근거로 하는 폭력행위는 출구 없는 나선형 소용돌이와 같으며, 치러야 할 대가는 가혹합니다.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다른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 평화를 누릴 권리를 갖고 있다는 근본적 사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선택하시고, ‘참 행복’을 선포하신 다음 원수를 사랑하라고 권고하셨습니다. 이 말이 ‘명확함과 단순함과 확고함으로 오늘 우리에게도 주어진 말씀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많은 이들은 여전히 폭력과 증오와 갈등에 대한 역사를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지금은 함께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말할 것이며, 어떤 이들은 모잠비크의 북부지역 카보델가도처럼 과거의 상처가 다시 열리고 평화를 향해 이뤄졌던 진보가 뒤집어질 것이라고 두려워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자연자원이 풍부한 모잠비크 북부지방은 오랜 시간 동안 많은 공격과 폭력사태로 불안정한 상태를 지속해 왔습니다. 오랜 분열로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용서와 화해로 초대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용서와 화해는 그 동안의 고통을 무시하거나 기억과 이상의 포기를 요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랑하고 선을 행하라시며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는 고통을 줬던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그들과 마주치지 않고 피하려는 일 이상의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해친 이들을 향해 적극적이며 대가 없고 비범한 자비를 보이라는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평화를 향해 이끄는 새로운 관계를 축복하십니다. 이는 스승님께서 우리에게 세운 높은 기준입니다. 그러나 끈질기게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 그리스도인이면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따라 사는 흔한 관행을 예수님은 영원히 끝내길 원하십니다. 

세상에는 자비심과 연민의 미덕을 무시한 채 장애인과 노인을 죽이거나 버리며, 다친 사람과 약한 사람을 배제하고 동물들에게 고통을 주며 희열을 느끼는 일들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비와 연민의 덕’과 타인을 위한 선익을 자신의 선익처럼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평화란 단순히 ‘갈등의 부재’가 아닌 ‘자비와 선함’으로 요약됩니다. 특히 자신들의 상태로 인해 쉽게 거부되고 배제된 사람들을 향한 일상의 노력입니다. 이는 약자의 자세가 아닌 강자의 태도를 말합니다. 자신을 중요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타인을 폄하하거나 학대하고 짓밟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모든 인간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타인에게 사랑과 자비를 행할 때 우리 자신은 더 소중해집니다. 이러한 태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와 같이 행하는 이들과 동일시되고자 하는 마음과 함께 우리에게 섬김의 길을 가르침으로써 보여 주시는 예언적 힘이기도 합니다.

모잠비크는 풍요로운 자연 자원과 문화가 있는 땅이지만 역설적으로 엄청난 수의 인구가 빈곤에 빠져 있습니다. 때때로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을 주려는 열의를 갖고 다가오는 사람들이 모잠비크의 풍부한 자원을 보고 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슬프게도 이런 일은 같은 땅의 형제자매들 사이에서도 일어납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부패하도록 내버려 둡니다. 이러한 부패현상이 여러분이 외부 원조를 받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즐거움과 희망, 평화와 화해의 씨앗을 통해 다른 형태의 삶의 주인공이 될 것을 촉구하십니다. 성령께서 촉구하시는 것은 과도한 행동이 아닌 무엇보다 타인을 향한 관심, 타인을 우리의 형제자매로 인식하고 인정함으로써 타인의 삶과 고통을 마치 우리의 삶과 우리 고통인 것처럼 느끼게 하는 일입니다. 이는 개인적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가난한 이를 착취하려는 모든 종류의 이데올로기들을 측정하는 가장 좋은 척도입니다. 이렇게 해야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평화의 씨앗과 화해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성인처럼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의 내적 주인이 된다면 우리는 사랑과 자비의 길에 남을 것이고 더 가난을 선택할 것이고 자연을 보호하는 길에 남을 것이며, ‘평화를 향한 길’에 남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속의 모순된 여러 가지 감정과 이 나라의 복잡한 결정 가운데서 진정한 지배자가 되실 때 모잠비크는 희망의 미래를 보장받을 것입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이 미사와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여러 희생을 치러야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모두 비에 젖었지만 이 비가 축복된 성수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께 고맙고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최근에 닥친 허리케인 때문에 올 수 없었던 이들에게도 감사를 전합니다. 함께하지 못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여러분의 응원도 똑같이 느꼈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희망을 품어야 할 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이를 눈으로 보았고 손으로 만져 보았습니다. 부디 희망을 유지하시길 바랍니다. 다른 사람이 도둑질하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희망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일치하는 것만큼 더 나은 방법은 없습니다. 그로써 희망을 유지하는 모든 이유들이 모잠비크의 화해와 평화의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통합되고 강해질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축복하시고 성모님께서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를 위해 기도하는 것도 잊지 말아 주십시오.

 

”사제들의 노고는 ‘연민을 느끼는 역량’에서“

프란치스코 교종, 모잠비크 사제단과 수도자 등에 강조

프란치스코 교종은 9월5일 오후 모잠비크 전역에서 마푸투 주교좌성당에 모인 주교, 사제, 수도자, 신학생, 교리교사들에게 한 연설에서 ‘사제와 수도자의 정체성’, ‘신앙의 토착화’, ‘봉사정신’, ‘만남의 문화’ 등 다양한 주제를 설명했다. 교종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온전히 하느님을 신뢰한 모범으로 마리아의 ‘네’(Fiat)를 제시했다. 이날 교종을 환영하는 수녀들의 노래와 춤에 이어 모잠비크 성직자와 수도자 담당 겸 켈리마네교구장 마싱가 주교가 교종을 환영하는 짧은 인사말을 했다. 그는 교종에게 참석자 모두의 기쁨을 전하면서 ‘선교적 친교’ 안에 있는 모잠비크 교회를 소개했다. 그는 몇몇 축성된 이들이 세속적 삶과 무질서한 삶의 경향을 보이지만 모잠비크 사회생활의 다양한 맥락 안에서 복음의 기쁨을 증거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사제, 수녀, 교리교사가 한 명씩 발언했다. 첫 발언한 신부는 어려움뿐 아니라 불행까지 감수해야 하는 사제의 삶에 대해 말했다. 그는 신앙의 토착화 문제가 불충분하고 방법도 부족하다며 특히 사제들 안에서 삶의 일관성이 없을 때가 많다고 토로했다. 이어 교종에게 고백했다. “우리의 개인적 행복에 대한 지나친 걱정, 특히 우리의 생계유지를 위한 경제적 재원에 관한 걱정은 사제들 안에서 수없이 그만두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킵니다. 이는 우리의 직무를 수월하게 하는 대신 갈수록 더 힘들게 하는 고통의 길을 걸어가게 합니다.”라면서 이러한 ‘사제적 정체성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지혜를 교종에게 청했다.

한 수녀는 교종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수도자들은 특히 세상 안에서 교육, 건강, 여성의 권리 신장과 가난한 이, 노인, 취약한 이들의 보호 등 사회사목 활동에 참여하고 책임을 다함으로써 예언자적 표징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물질주의적 사회가 우리를 표면적 삶으로 이끕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관용, 이교도적 실천, 단순히 박애주의 성격을 띄는 단순한 시민단체처럼 우리 자신을 사회에 소개하려는 경향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어떻게 수도성소에 더 충실할 수 있는지, 주님께 봉헌한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 위해 젊은이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혜를 청합니다.” 

뒤이어 한 교리교사는 “우리는 평신도이고 영웅적 민족의 일원입니다. 그러나 국가의 정치적, 경제적 불안정에서 오는 해악과 저개발국의 결핍으로 인해 내적으로 오랫동안 고통받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뒤, 새로운 세대의 복음화를 위한 교리교사들 책임과 신앙의 토착화 문제에 관해 말했다. “새로운 기술과 사회홍보수단을 통해 우리 사회를 계속 침략하는 부유한 민족들의 대가에 우리는 이상하리만큼 쉽게 자리를 내어 주지만 우리 문화의 가치는 아직도 많습니다. 우리 문화의 가치가 배제돼 있지만요.” 교종에게 던진 그의 질문 요지는 “어떻게 완전한 그리스도인이면서 아프리카인이 될 수 있는가“라고 말했다.

 

“우리의 응답을 쇄신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습니다”

교종은 마지막 질문에 이어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방금 교리교사의 말을 듣고 저는 무척 기뻤습니다. ‘우리는 영웅적 민족의 일원입니다.’ 고통을 받는 데 익숙해졌지만 깊은 희망을 안고 있다는 것이죠. 믿음과 희망을 쇄신하도록 초대하는 여러분 민족에 대한 이러한 건전한 자부심을 통해 우리의 ‘네’라는 응답을 쇄신하고 싶습니다. 시대는 변하고 우리는 종종 새로운 무대에 어떻게 등장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약속의 땅이 우리의 뒤가 아니라 앞에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이집트 땅에서 공짜로 먹던 양파’를 꿈꿀 수도 있습니다. 지난 세월에 대한 향수 안에서 우리는 점차 돌처럼 굳어 갑니다. 기쁜 소식을 고백하기보다는 우리가 선포하는 내용이 아무도 매료시키지 못하고 그 누구의 마음도 불태우지 못하는 멍에가 되고 맙니다. 

마리아의 ‘네’라는 응답에서 뒤를 바라보지 않는 사람의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즉 루카 복음사가가 육화의 신비 사건을 들려주는 방식에서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세례자 요한과 관련된 사건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사건을 나란히 소개합니다. 첫 번째 경우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났고, 예수님의 탄생 예고는 작은 나자렛 마을에서 일어났습니다. 전자의 경우 출생 예고는 사제인 남자에게 주어졌고, 마리아 탄생 예고 대상자는 평신도인 여인에게 주어졌습니다. 이러한 변화 안에서 우리의 깊은 정체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제 정체성의 위기 앞에서 우리는 화려하고 중요한 장소를 벗어나야 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부르심을 받았던 장소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주도권과 권능이 분명했던 바로 그 장소 말입니다. 때로 우리는 원치 않게 도덕적 잘못 없이 사제들의 일상적 활동을 전례예식이나 회합, 대화 등에 동일시하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런 모임의 식탁, 회의실에서 우리가 앉는 위치는 위계적입니다. 우리는 마리아보다 즈카르야와 더 닮아 있습니다. 사제는 자기 힘만 믿을 수 없습니다. 주님에게 교육받고 지지받지 않을 때 사제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 ‘가장 어리석고 가장 쓸모없는 사람이 됩니다. 나자렛으로 돌아가는 것은 사목자-제자-선교사로서 우리 자신을 쇄신하고 정체성 위기를 직면하기 위한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자주 국가가 지불하는 시간과 임무를 우선시하고 일상적 사목생활을 방해하게 만드는 ‘고통스러운 길’을 통해 개인의 안위를 위한 재원을 마련하는 데 너무 큰 걱정하고 있다고 여러분 스스로 말했습니다. 

예루살렘과 성전의 구조와는 대조적인 자기 집에 있는 단순한 시골 처녀의 모습은 우리의 ‘네’라는 너그러운 응답을 흐리게 하고 부식시키는 우리의 복잡한 마음과 걱정거리를 보게 하는 거울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먹히도록 자신을 내어 맡겨야 합니다. 모든 것을 통제하고 모든 것에 책임을 느끼며 우리의 노력이 반드시 인정받아야 한다는 데서 생기는 걱정은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사제의 노고는 오히려 ‘연민을 느낄 수 있는 역량’과 연결돼야 합니다. 사제들에게 있어 사람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기삿거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잘 알고, 그들 마음속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고통을 공유하고 연민을 느끼면서 우리 마음은 지치고 수천 조각으로 찢깁니다. 심지어 우리가 사람들에 먹힌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은 움직입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자신에게 맡겨진 하느님의 충실한 백성들을 돌볼 때 예수님의 사제가 꾸준히 속삭이는 말입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렇듯 끊임없이 내어 줘야 하므로 힘듭니다. 힘듦의 원천이 무엇인지 살펴보기 바랍니다.

당신 아드님 예수님을 현존하게 하시고 구체화시키시는 하느님 보시기에 유익한 것을 행하는 노고를 선택하면서 부르심을 쇄신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젊은이들이 타인에 의해 강요된 것이 아니라 침묵과 기도 안에서 성숙하고 선택한 대로 매일 자신을 내어 주는 기쁨의 삶에 이끌려 자신도 ‘네’라고 응답하고자 하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에 관해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을 받아들이십시오. 루카 복음에서 엘리사벳은 하느님의 새로운 계획을 받아들이는 이스라엘의 입장을 대변합니다. 곧 한편에는 방문하는 사람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타인이 그들의 문화, 삶의 방식과 표현 방식을 나누며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 찾아오도록 허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남, 대화, 봉사를 통해 서로 변화되는 이 두 여인이 걸었던 ‘여정’처럼 항상 도전이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도전에 마비될 필요는 없으며, 의심과 두려움에 숨 막혀 할 필요도 없습니다. 창의적으로 되기보다 회의와 두려움으로 용기를 잃는다면 우리는 현실에 안주하게 되어 어떤 진보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 우리는 역사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아무런 결실 없이 정체되어 가는 교회를 방관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 특히 연로하신 분들은 전쟁으로 인한 분열과 원한의 증인이십니다. 여러분은 우리를 갈라놓는 거리를 좁히고 기꺼이 ‘그곳을 방문할’ 자세를 항상 갖춰야 합니다. 모잠비크 교회는 방문의 교회가 되라고 초대받았습니다. 서로에 대한 경쟁, 경멸과 분열의 문제에 속할 게 아니라, 존중, 상호교류와 대화가 가능한 공간, 해결책을 가져다 주어야 합니다. 모잠비크 교회는 다양한 민족과 인종, 남과 북, 사제와 평신도 관계에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 같은 도전은 오로지 조화로운 다양성 안에서의 만남의 문화를 통해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만남의 문화를 건설하는 것은 지속적인 과정 안에서 모든 세대가 어우러져야 합니다. 엘리사벳의 집으로 갔던 마리아처럼 우리도 교회 안에서 대립시키거나, 분열시키거나, 심판하는 논리에 마비되지 않도록 노력합시다. 마리아처럼 새로운 문제 가운데서 따라야 할 길을 배워야 합니다. 성령의 확실한 도움을 청하며 이러한 도전에 대한 대답을 찾고 길을 나서십시오.

장기풍(스테파노)
전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
2006년 은퇴. 현재 뉴욕에 사는 재미동포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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