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오디세이아 2 - 박정은]

요즘 세상은 너무 시끄러운 것 같다. 너무 시끄러워 잠 못 이루는 사람들도 많다. 볼리비아에서 선교하는 친구 혜경 수녀가 전화를 안 받아 걱정이 되었는데, 성모님 축일에 안부를 묻는 내 쪽지에 “한 아이가 하도 내 귀에 대고 울어 대서, 모든 소리를 좀 안 들으려고. 전화 소리도 듣기가 힘들어.”라는 답 쪽지를 받았다. 무언가를 귀에 대고 울면서 요구해 대는 아이, 물론 그 유아원에 온 아이는 엄마를 데려다 달라는 거겠지만, 친구 수녀님의 다음 쪽지는 더 심란하다. “그 애가 간 뒤에도 내 귀에 우는 소리가 들려서 힘들어 죽겠어.” 

하긴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무속 공부할 때, 하루 종일 굿 소리를 듣고 자리에 누우면, 쟁쟁쟁 그 쇳소리가 귀에 들려서 잠을 쉽게 들지 못했었다. 하긴 굿도 굿을 하는 사람의 어떤 집요한 요구를 전하는 거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그래, 그럼 잘 쉬어. ㅠㅠ”라는 쪽지를 남기고도 여전히 마음이 불편하다. 나도 내 친구의 귀에 대고 이런저런 소리를 끝도 없이 해댄 건가 해서.

요즘 나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너무 자신을 표현하고 요구해 댄다. 어떤 사람들은 전화하기가 무섭게 자기 이야기만 해 댄다. 자기 직장 이야기, 자기 자식 이야기, 그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어느 만큼은 지적이어야 하고, 어느 정도는 세련된 진보여야 하고, 또 어느 만큼은 영성적이기까지 한 자신을 이야기를 통해 확인 하려는 듯하다. 그런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임에도 듣다가 보면 피곤해진다.  

여름 한철 생명을 피우고 말라 가는 풀잎. 소음들이 사라지면 그 서걱이는 소리를 만나게 될까. ⓒ박정은

어쩌면 내가 쓰는 이 글도 불특정 다수를 향한 나의 어떤 요구는 아닌지, 갑자기 현기증이 나려고 한다. 최근에 수도생활에 관한 책을 출판했다. 21세기의 수도생활은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성찰하고 또 그동안 수도생활에 대한 고민과 비전을 적은 책인데, 이 책에서 혹시 타자에게 무언가를 요구한 것은 아닐지 조심스러워졌다. 그럼에도, 나의 이 책은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난 허술한 논리라는 점 -물론 내 수준이 똑똑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논리를 펼 만큼이 되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그러므로 독자에게 사고의 여백을 많이 제공한다는 점, 그래서 이 글을 비평하면서 당신들의 의견을 분명히 할 것이라는 점, 그리고 내 수업을 들은 학생들의 목소리들이 부록으로 달려 있으니 나만의 제 잘난 척은 최소한 아니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은 다른 많은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서 얻은 관점들을 나누려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서 약간 숨을 내쉬어 본다. 하지만 이것도 나의 찌질함에 대한 변명으로 들리니, 입을 다물 수밖에.…

하여, 내 친구의 메모를 묵상하면서 하루 종일 누구의 말도 듣지 않기로 했다. 저녁에 기도 모임에 갈 때까지 무언가를 열심히 준비하지도 않았다. 그냥 그날의 복음을 함께 기도하고, 마음 착한 교우 내외가 하는 식당에서 김밥을 사 가지고 갔다. 이분은 내가 저녁에 기도 모임이 있다고 하니, 달랑 한 줄 주문한 내 가방에 몰래 한 줄 더 넣었고, 군만두까지 챙겨 주셨다. 아무 말 없이.

때론 고요할 때, 시선은 더 많은 것을 껴안는다. 빛과 그림자, 낙서, 거리 표지판의 뒷모습과 낙서, 그리고 저 멀리 손톱 만한 달까지. ⓒ박정은

학교 채플 앞의 작은 공간에서 우리는 조용히 모여 앉았다. 오랫만에 모인 거라 반갑다고 난리를 했는데, 조용했다. 아니 고요했다. 왜 시끄럽지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 모임에서 우리는 베트 미들러의 '로즈'를 들으며 따라 불렀다. 그리고 어떻게 여름을 지내었는지를 이야기했다. 평화가 몰려왔다. 분명히 이야기를 하는데, 귀가 아프지 않았다. 가만 생각해 보니 기도 모임에서 나누는 이야기는 두 가지가 분명했다. 첫째, 여기서 나누어진 이야기에는 어떤 요구가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확인을 할 필요가 없었다. 수녀님들과 젊은 여성들, 그리고 어린이가 함께 한 이야기에서 우리는 똑똑할 이유도, 성공적일 이유도, 그리고 영성적일 이유도 없었다.

특히 열 살 네이지아가 우리와 함께 기도하고, 웃고 할 때, 그 아이의 나눔을 들을 때, 너무 연약해서, 그러나 너무 분명해서, 말은 이래야 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여름에 가장 좋았던 것은 디즈니랜드에 간 것, 태어나서 처음 가 봤음을 강조한 그녀는 자기 사촌들이 자기를 무시했지만, 자기는 무시로 맞대응하지 않고 친절로 대응했다며, 그게 가장 좋았던 기억이라고 했다. 배고프다며 내가 가져간 김밥을 열심히 먹던 그녀는, 서로 기도를 나누는 시간이 다가오자, 감옥에 간 우리 엄마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 

미국 사회에서 가난한 흑인 가정에 매우 흔한 일이라 놀랍지는 않지만, 아이의 입에서 나온 그 말에 마음이 무척 아팠다. 하지만 그녀의 기도는 놀랍게도 감사의 기도였다. 엄마가 감옥에 간 지 벌써 두 달이나 지났고, 우리가 모두 건강하게 엄마를 기다릴 수 있음에, 그리고 한 달이 되면 엄마가 돌아온다는 데 대한 감사였다. 난 저 아이에게서 말하기를 다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에도 올래?”라는 나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다음 기도모임 날짜를 자기 수첩에 꼼꼼히 적었다. 물론 네이지아의 선생인 마리아가 자신을 태우고 와야 하는 거겠지만.

아직 모두가 일어나기 전, 제 그림자를 비춰 보다, 달려온 길을 돌아보다. ⓒ박정은

평화를 담보로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어쩌면 폭력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빈말, 혹은 자기를 포장하는 말, 그리고 자기를 주장하거나, 요구하는 말을 줄여 가고 싶다. 그래야 유사 이래 처음 완전히 녹아 사라지는 알라스카 빙하의 마지막 소리를 들을 수 있고, 폭풍 속에서도 꽃을 피워 낸 난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고, 한철의 생명을 살아내고 말라 가는 풀잎의 흔들리는 노래도 들일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내가 사는 집 동네를 산책하며 토머스 머튼의 '침묵의 소중함' 을 조용히 읽어 본다.


침묵은 양선함입니다....

마음이 상했지만 답변하지 않을 때

내 권리를 주장하지 않을 때

내 명예에 대한 방어를 온전히 하느님께 맡길 때

바로 침묵은 양선입니다. 

침묵은 자비입니다....

형제들의 탓을 드러내지 않을 때

지난 과거를 들추지 않고 용서할 때

판단치 않고 마음속 깊이 변호해 줄 때 

바로 침묵은 자비입니다. 

침묵은 인내입니다....

불평 없이 고통을 당할 때 

인간의 위로를 찾지 않을 때

서두르지 않고 씨가 천천히 싹트는 것을 기다릴 때 

바로 침묵은 인내입니다. 

침묵은 겸손입니다....

형제들이 유명해지도록 입을 다물 때

하느님의 능력의 선물이 감춰졌을 때도 

내 행동이 나쁘게 평가되든 어떻든 내버려 둘 때 

바로 침묵은 겸손입니다. 

침묵은 신앙(믿음)입니다....

그분이 행하도록 침묵할 때

주님의 현존에 있기 위해 세상소리와 소음을 피할 때 

그분이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기에 인간의 이해를 찾지 않을 때 

바로 침묵은 신앙입니다. 

침묵은 흠숭입니다... 

"왜" 하고 묻지 않고

십자가를 포옹할 때

바로 침묵은 흠숭입니다.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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