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영화 - 정민아]

'벌새', 김보라, 2019. (포스터 제공 = (주)엣나인필름)

데뷔작으로 세계예술영화계를 깜짝 놀라게 하고 있는 여성감독이 등장했다. 그녀는 베를린영화제, 트라이베카영화제, 시애틀영화제, 그리고 부산영화제 등에서 25개의 상을 들어올렸다. 김보라 감독의 데뷔작 ‘벌새’는 해외 수상 소식으로 이미 떠들썩한 작품이다. 그러나 그러한 영예를 추켜세울 필요도 없이 이 영화는 한 시대를 풍미할 작품임이 감지된다.

1994년, 88서울올림픽을 지나며 우리는 선진국 대열에 들어설 것이라는 희망, 그리고 국제경기를 성공적으로 치룬 우리를 세계가 어떻게 볼 것인지 하는 인정욕구로 한창 들떠 있었다. 전 국민이 강남을 열망하며 대단지 아파트로 이사 가고 싶어 했다. 김일성이 사망했고, 전쟁이 날까 불안했다. 사상 최악의 더위를 시원한 레게음악으로 이겨 보려고도 했다. 그해를 살아간 중학교 2학년 은희는 지독한 성장통을 겪는다.

떡집을 운영하는 부모 밑에서 강남의 꽤나 괜찮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은희네 가족은 보편적 중산층 가정이다. 특출한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다.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꽤 많은 현금을 만지는 부모는 세 자녀의 교육에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고등학생 언니는 대치동학원을 빼먹고 연애를 하는 중이고, 중학교 3학년 오빠는 벌써 서울대를 목표로 공부하느라 신경이 날카롭다. 춤을 연마하고 있는 아빠는 아마도 누군가를 만나는 모양이고, 엄마는 가끔씩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곤 한다.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낯설게도 보이는 가족들로 인해 은희는 매일 골머리를 앓는다.

'벌새' 스틸이미지. (이미지 제공 = (주)엣나인필름)

가끔 노래방에 가고, 가끔 콜라텍에도 가는, 공부를 잘하지는 않는 은희는 학교에서 날라리로 찍혀 버렸다. 은희에게는 가슴 설레게 하는 남자친구가 있고, 마음이 딱딱 맞는 죽마고우 친구가 있으며, 자기를 좋아해 주는 학교 후배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대로일 리는 없다. 실연, 절교, 변심, 무관심, 그리고 폭력은 은희의 마음을 폭풍우처럼 요동치게 한다. 때론 수치스럽고, 때론 분노하고, 때론 절망적이다.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할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도통 모르겠다. 이런 끝없는 감정의 파고를 넘나들던 어느 날, 은희는 명문대를 휴학하고 강사로 일하는 학원선생님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한 소녀의 성장담이다. 그녀가, 그리고 우리 모두가 마주해야 했던 청소년 시절의 각종 감정들로 즐거웠거나 고통스러웠던 그 기억, 그때의 그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신났고, 웃겼고, 유치했고, 수치스러웠고, 분노했다. 영화는 평범한 한 소녀의 성장담 위로 1994년의 거대한 사건을 겹쳐 놓는다. 성수대교가 붕괴했다. 우리도 선진국이라는 들뜬 분위기를 단숨에 잠재웠던 이 안타깝고도 원통했던 기억은 은희의 개인사에 촘촘히 박혀 거대한 상흔으로 남는다. 순식간에 붕괴했던 사회적 사건 위로 가족들 간에 틈새마다 놓인 갈등들, 그리고 은희가 주변인들로 인해 고통을 받으며 자신의 세계가 붕괴되는 느낌이 하나씩 꺼내진다.

'벌새' 스틸이미지. (이미지 제공 = (주)엣나인필름)

영화 속에서 특수한 개인의 경험은 보편적인 모두의 기억으로 남는다. 영화를 보면서 나의 1994년이 하나씩 떠올랐다. 우리 모두가 이상하게 들뜨다가 추락하고 말았던 그때가 말이다. 영화가 촘촘하게 엮어 내는 사회상 속에서 은희라는 낯선 아이를 따라 나의 어린 모습으로 들어가 서성이고 있었다. 은희와 함께 애도하며 울었다.

대단한 영화이고, 놀라운 예술가적 재능이다. 일상성의 영화라는 익숙한 영화만들기 안에 녹여 낸 특정 시기의 집단 기억과 상흔이 서사적 완성도 안에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다. 학원선생과 중학생이 만들어 내는 여자 대 여자의 멘토링 관계는 영화사상 가장 이상적이고도 아름다운 여자들 간의 연대일 것이다. 김보라 감독의 차기작이 벌써 궁금해진다.

'벌새' 스틸이미지. (이미지 제공 = (주)엣나인필름)
 
 

정민아(영화평론가, 성결대 연극영화학부 교수)
영화를 통해 인간과 사회를 깊이 이해하며 
여러 지구인들과 소통하고 싶어하는 영화 애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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