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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녀와 나무꾼[큘라, 엄니와 화해하다 4]

나는 신체적, 심리적, 영적으로 몇 번의 하강곡선을 그리며 살아 왔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것 같은 절망의 시간에는 그동안 나를 살아 움직이게 했던 열정과 기쁨을 내 밖으로 끌어낼 수가 없었다. 2006년 감정의 화산이 폭발한 그 순간에, 어쩌면 훨씬 더 이전에 시작한 심적 침체는 일상에서 소소한 기쁨을 빼앗아가 버렸다. 자고, 먹고, 싸고, 일하는 반복적이고 무의식적이었던 모든 행동에 ‘왜’라는 의문표가 붙으면서 일상의 무게가 버거웠다. 생을 포기하는 사람의 심정을 겪어 보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나도 2009년 그해 겨울이 생을 포기하고 싶은 시간이었고 하루 삶의 무게가 천근만근임을 뼈저리게 느꼈다.

내일이 오늘보다 0.00001밀리미터라도 희망적이어야 잠에서 깨고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는 것을 심적 상태가 상승곡선을 탔을 때 생각하게 되었다. 낮에도 불을 켜야 하는 반지하 방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곤 했다. 아무리 일어나고 싶어도 몸은 나의 의지에 반응하지 않았고 살고 싶다는 의욕이 전혀 없었다. 잠에서 깨어나는 그 자체가 고통이었다. ‘왜 나는 이런 상태에 빠졌을까?’조차 생각하기 어려운 그때가 내 일생 중에 가장 어둡고 힘겨운 시간이었다. 내려갈 수 있는 심연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없었고 그 끝이 어떤 모양일지가 두려우면서도 한편 궁금했다. 이생과 저생을 가르는 문의 고리를 만지작거리며 망설이는 이유는 뭘까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때 떠오르는 인물은 자신의 완벽주의적 성격으로 인해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엄니였다. 명확한 지지와 격려로 내가 생애 초기에 자존감을 키우는 데 협력했어야 할 엄니. 내 생애의 의미 있는 순간들에 너무도 객관적이고 차가운 태도로 나를 평가하며 사기를 꺾었던 엄니. 내면에 각인된 상처받은 기억의 파편들은 내가 슬럼프에 빠졌을 때 정상 세포를 무참하게 공격하고 죽이는 암세포처럼 나를 먹어 버렸다. ‘그런데, 왜 나는 그 결정적인 순간에 엄니를 떠올리는 걸까?’ 내 목숨은 내가 결정할 수 있지만 엄니의 목숨에 치명적 상처를 줄 수 있는 권리는 내게 없다는 생각에 극단적 선택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식이 부모에 앞서 병으로 죽어도 가슴에 묻는다고 하는데, 극단적 선택으로 내가 죽는다면 체면을 중시하는 엄니는 남의 이목이 버거워 제명에 죽지 못할 것 같았다. 나에게 병 주고 약 주는 엄니가 미웠다.

힘겨운 그 시기에 극단적 선택을 하지 않도록 붙잡은 사람이 엄니였다면, 그 시련을 무던히 견디도록 옆에서 나를 바라본 사람은 바로 남편 베드로다. 혹독한 우울증을 겪고 있던 내 곁에서 자기도 약한 우울증을 겪었다며 나중에 고백한 베드로. 베드로가 없었다면 나는 무참히 쓰러져 일상의 평범함을 회복하지 못하고 남은 생을 회색빛으로 살았을 거다. 우리는 늦은 나이에 결혼했다. 지인들은 우리의 만남에 대해 궁금해 한다.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베드로가 내가 공부를 끝내고 올 때까지 기다렸다는 둥, 나 때문에 수도원에서 나왔다는 둥, 우리는 이탈리아에서 만났다는 둥.... 우리는 지인을 통해 소개받기 전에는 모르던 사이다. 내가 공부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다음 해인 1997년 겨울 지인의 소개로 만났다. 만나게 된 경위가 참으로 코믹하다. 

오랜 친구인 수녀와 모임을 했는데 하루는 명함을 가져왔다. 내가 서울대교구 청소년국에 취직하고 얼마 있다가 주위에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했더니 “언니, 기도나 열심히 해!”라고 해서 “알았어.”라고 했다. 이런저런 일로 분주하게 지내면서 그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느닷없이 내 앞에 명함을 내밀었다. 자기 보는 앞에서 전화하라고. 모임 시작 직전이라 내가 나중에 꼭 전화한다고 약속했다. 며칠 뒤 나는 약속대로 베드로에게 전화했다. 내가 베드로에 대해 아는 사실은 명함이 말해 주는 ㅇㅇ회사의 공장장 김용길이라는 직함과 이름 석 자뿐이었다. 베드로는 나에 대해 아는 사실이 전혀 없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전 최금자예요. 수녀님으로부터 명함을 받아 전화했어요.” “아, 그러세요.” 순간의 침묵이 흐르는 사이 전화선 저 멀리에서 들려올 것 같은 숨소리만 귓전에 맴돌았다. 내가 잠시 방심한 사이 “오늘 저녁에 약속 있으세요?”라는 기습적 질문이 왔고 나도 모르게 “아니요.”라고 말했다. “그럼, 제가 퇴근하고 갈 테니 기다려 주세요!” 수화기는 내 손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어느새 전화기에 얹혀 있었다.

동료가 다 퇴근하고 사무실 복도에도 불이 꺼졌다. 한참 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네. 들어오세요.”라며 나도 모르게 의자에서 일어났다. 때는 한겨울, 검은 가죽점퍼를 입고 들어선 베드로의 키는 작달막했다. 방 안의 불빛 아래서 자세히 보니 이마에 주름이 깊게 패어 있었다. 찰나였지만 ‘이 남자 혹시 조폭?’이라는 상상을 했다. ‘베드로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어 결혼을 결정했냐?’고 묻는다면, ‘수도 생활을 한 사람이라 적어도 자신을 되돌아보는 훈련은 되어 있을 테고, 심신이 건강하니 열심히 살 것이고, 긍정적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고 말할 것이다. 결혼 상대로 출발점부터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둘이 살아가면서 각자가 성숙한 모습으로 성장하도록 도울 자세를 갖춘 사람인지가 나에게는 더 중요했다. 사회적 지위의 높고 낮음이, 재산의 많고 적음이, 많이 배우고 덜 배웠음이 선택의 요건이 되지 않았다. 나는 다른 사람을 통해 대리만족을 추구하지 않는 삶의 철학을 가지고 있다. 되고 싶은 모습이 있다면 나 자신이 되려고 노력할 것이니까.

연애는 당사자끼리 결혼은 집안끼리라는 말처럼, 결혼을 결정했을 때 통과의례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것이 바로 양가 가족들의 ‘청문회’ 자리다. 베드로는 우리 가족에 둘러싸여 진땀을 흘리며 긴장의 순간을 감내해야 했다. 죄인을 심문하듯이 모두 쌍심지를 켜고 뚫어지게 베드로를 살펴보며 불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의 결혼을 가장 극렬하게 반대한 사람이 바로 엄니다. 어느 부모님인들 자기 자식이 더 잘났고 더 아깝지 않겠냐만 엄니의 반대는 상상을 초월한 정도였다. 아버지는 엄니보다 객관적, 이성적이어서, “나는 이번 결혼을 찬성할 수 없다. 하지만 막지는 못하겠다. 나중에 결혼 반대했다고 너에게서 무슨 말을 들을 줄 모르니....”라며 본인의 의사를 명확히 전달하는 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엄니는 나에 대한 높은 기대가 한번에 꺾기자 “네가 막판에 내 뒤통수를 칠 줄은 정말 몰랐다.”, “결혼식에 내가 갈 거라는 기대는 애당초 하지 마라.”며 내 속을 후벼팠다. 막판에는 본인 성질을 스스로 못 이겨서 대상포진까지 걸렸다. 나도 쉽게 내린 결정이 아닌데, 나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가족들 때문에 너무 서운하고 서러워서 울었다. 내 인생을 살아가려면 이번 어려움을 정면 돌파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베드로와 혼인성사를 했다. 그렇게 반대하던 엄니가 화양동 성당에서 진행된 우리의 결혼식에 나타났다. 그럼 그렇지 자식 이기는 부모 보았는가. 호된 반대를 한 엄니는 자신에게 너무도 자상한 베드로에게 미안하신지 요즘은 사위인 베드로를 ‘우리 막내아들’이라고 부르신다.

결혼식 바로 전 어린이대공원에서 한 야외촬영. 이 글의 제목을 두 개 준비했는데, 하나는 ‘C사감과 조폭’, 또 다른 하나는 ‘선녀와 나무꾼’이었다. 베드로가 결혼 콘셉트가 ‘선녀와 나무꾼’이라고 하여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퀴즈~” 질문: “선녀가 아직도 하늘에 올라가지 못한 이유는?” 답: “자식이 없어 안심하지 못한 나무꾼이 선녀에게 옷을 돌려주지 않아서.” ⓒ최금자
장모와 사위가 아니라 어머니와 아들같이 다정한 모습. 우리의 결혼을 결사반대한 엄니는 착하고 자상하고 과묵한 베드로에게 옛날에 당신이 취하신 태도를 무척 미안해 하신다. 베드로는 내가 부모였더라도 그랬을 것이라며 마음에 두지 않는다고 한다. ⓒ최금자
동네 아이들을 위한 무료 카페 ‘까사미아’를 운영한 우리 부부. 각자 이루고자 한 꿈을 위해 늦은 나이에 결혼했고 모아 놓은 돈이 없어서 반지하에서 10년을 살았다. 내 어두운 시기를 품고 있는 이곳에 6년 동안 아이들의 명랑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최금자

최금자(엘리사벳)

주일학교 중고등부 교리교사. 30년 넘게 청소년들과 희로애락을 나누며 즐겁게 살고 있다. 인생의 동반자 베드로와 함께 지난 6년 동안 열었던 붙박이 ‘어린이카페 까사미아’를 이어서 청소년들을 위한 ‘무빙 까사미아’를 준비하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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