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큘라, 엄니와 화해하다 2]

남편 베드로와 나는 2005년 9월부터 2007년 11월까지 이탈리아에서 안식년을 보냈다. 우리는 결혼 10주년 되는 해에 안식년을 갖기로 했는데, 계획보다 3년 앞당겨 각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로마로 거주지를 옮겼다. 우리는 그동안 모은 돈을 탈탈 털고 안식년 동안 짬짬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체류비용을 충당했다. 2005년은 우리 둘에게 참으로 어려운 해였다. 그해, 나는 직장생활의 스트레스로 인해 자궁에 이상이 생겨 병원에 입원했고, 베드로는 본당 체육대회에서 줄다리기 하던 중 우승에 눈먼 상대편 한 사람의 타격을 받아 한쪽 무릎의 인대를 잃었다. 한 번 끊어진 인대는 복원되지 않기에 지금도 그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우리는 두 가지 사건을 겪으면서 지금이야말로 떠나야 할 때라고 여겨 미련 없이 이삿짐을 쌌다.

나는 로마에 머무는 동안 예전에 다녔던 교황청립 살레시오대학 매스컴학과에 등록하여 다시 학생 신분이 되었다. 학위를 목표로 입학한 것이 아니었는데 체류비자 연장을 위해 학점을 따고 시험도 치러야 해서 안식년의 쾌적함이 아니라 고3처럼 고달픈 일상이 전개되었다. 당시 베드로는 이탈리아어학원에 다녔고, 나보다 늦게 나가서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내 점심용 샌드위치도 준비해 줬다. 나는 수업이 있는 날은 온종일 학교에 있다가 오후 늦게 집에 돌아왔다. 많은 수업과 시험을 소화하려면 두뇌 회전이 빨라야 하는데 잘되지 않아 내 나이를 실감했다. 시험공부 하느라 젊어서도 안 해 본 날밤을 새우기도 했다.

나는 9년간(1988-96)의 로마 유학을 마치고 탈진한 상태에서 1996년 말에 귀국했다. 당시 나의 심신은 피폐한 상태였지만 귀국 한 달 뒤에 선택의 여지 없이 서울대교구 교구청에서 8년 4개월 동안 근무했다. 제정신이라면 정말 하지 말았어야 할 강행군을 했고, 수시로 울려 오는 ’이게 아닌데’라는 내면의 소리를 계속 무시했다. 17년 동안 한 번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전진하다 보니 몸 여기저기에서 이상 증세가 나타났고 수술도 여러 차례 했다. 그래서 긴 쉼의 시간을 마련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쉬려고 떠난 안식년에도 강의를 듣고 시험을 치러야 했으니 한계의 임계점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살레시오 대학 청소년사목학과 학위 논문발표를 몇 개월 앞두고 갑자기 몸이 아파 수술을 받았고, 기숙사 동료의 극진한 간호 덕분에 몸을 회복하고 난 뒤 겨우 마무리를 했던 논문. 2006년 3월 논문을 발표했고 9년간의 유학생활을 마무리했다. ⓒ최금자

그러던 중 2006년 초여름 그 어느 날, 내가 선배로서 예전에는 자기에게 신경을 많이 써 주었는데 지금은 아니라며 “언니, 변했어”라는 후배의 한 마디로 그동안 내면 깊은 곳에서 터지지 못해 부글부글 끓고 있던 활화산의 뇌관이 확 뽑혀 날아갔다. 후배가 가자마자 갑자기 울음이 봇물 터지듯 터져 얼굴이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었고, 깨질 듯한 두통으로 눈조차 뜰 수가 없었다. 진통제를 먹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내 평생 그렇게 서럽게 ‘엉엉’ 울기는 처음이었다. 내가 이렇게 울 수 있다는 것에 나도 놀랐다. 이를 지켜보던 베드로가 놀라 ”엘리, 이러다간 뭔 일이 나겠다”라며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우린 자동차를 몰아 내가 흥분이 가라앉힐 때까지 하염없이 돌아다녔다. 그날을 기점으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내 시선은 바깥세상에서 내 안으로 서서히 고정되기 시작했다. 일상은 전과 다름없이 흘러가서 학교 가고 시험 치고 여행 가고 지인들과 어울렸지만, 원인 모를 불안에 휩싸였고 내면의 기쁨은 점차 사그라들고 만사에 자신감이 줄어들고 있었다.

안식년 첫해는 수강해야 할 강의와 시험 때문에 집과 학교를 중심으로 일상이 펼쳐져서 여행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지내다 보니 일 년이 후딱 지났다. 두 번째 해에는 다행히 한 지인으로부터 자동차를 선물 받아 우리 부부는 그때부터 본격적인 안식년을 보내게 되었다. 오랫동안 못 만났던 살레시오 대학 동기들을 만나 그간의 회포도 풀고, 성 프란치스코 성지-아시시를 비롯하여 베르나(프란치스코 성인이 오상을 받은 곳) 등-을 순례하며 참으로 오랜만에 맞는 안식년의 한가함을 즐겼다.

사진 개인 전시회-성 베드로 대성당 ‘빛이신 예수님’.(2007년 9월 10-14일) 한여름 찜통 같은 아파트에서 직접 초대장과 전시회 책자를 만들고, 사진 판넬 하는 곳을 찾느라 작열하는 태양을 머리에 이고 동네를 돌아다녔던 기억이 새롭다. 전시회는 안식년 막바지에 있었고, 전시회가 있은 2개월 뒤에 귀국했다. ⓒ최금자

이탈리아에서의 안식년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두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첫 번째가, 베드로에게 그곳에서 보낸 안식년은 로또복권에 당첨된 것과 같은 사건이다. 처음으로 비행기 타고 외국에 갔고, 늦깎이 학생이 되어 이탈리아어를 배우느라 고생했으며, 한국에서는 엄두를 내지 못했던 사진 개인 전시회를 주 이탈리아 대사관에서 가졌던 평생 잊지 못할 일을 체험했다. 안식년을 보내느라 돈주머니를 탈탈 털어 지불한 엄청난 체류비용이 생각나 내가 ‘그 돈 아쉽다’라고 할 때마다 자신은 그야말로 신세계 체험을 했다면서 한 푼도 안 아깝다고 말한다.

둘째는, 우리집 앞에 있는 살레시오 대학 부속 성당 새벽 미사에서 만난 로사와 바오로 부부와의 인연이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일 아침 우리는 미사에 참례했다. 성당 맨 앞줄에 앉은 로사와 바오로 가족. 딸인 로사리아는 미사 중에 기타를 연주했고, 우리는 몇 줄 뒤에 앉아 열심히 성가를 불렀다. 내 노랫소리가 컸었는지 미사 뒤에 그 부부는 우리에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미사를 계기로 로사와 바오로 부부와 절친이 되었다. 그들은 장애인 아들이 있어서 아픔이 있지만 늘 밝고 이웃을 배려하는 참 좋은 사람이었다.

2년 2개월의 꿈만 같은 안식년을 보내고 귀국과 더불어 우리는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안식년에 발생한 심리적 화산폭발은 기나긴 우울증으로 이어지는 서막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인생은 늘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져 맞춰지는 퍼즐이라고 생각한다.

새벽 미사 때 알게 된 로사와 바오로 부부는 안식년을 마치고 귀국한다고 하자 우리를 집에 초대하였고, 이탈리아 가정식을 정성껏 준비하여 이별의 아쉬움을 달랬다. ⓒ최금자

최금자(엘리사벳)

주일학교 중고등부 교리교사. 30년 넘게 청소년들과 희로애락을 나누며 즐겁게 살고 있다. 인생의 동반자 베드로와 함께 지난 6년 동안 열었던 붙박이 ‘어린이카페 까사미아’를 이어서 청소년들을 위한 ‘무빙 까사미아’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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