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우 신부] 7월 28일(연중 제17주일) 창세 18,20-32; 콜로 2,12-14; 루카 11,1-13

기억 하나

초등학교 시절 매주 복사단 회합을 하면 기도와 활동을 보고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취지는 하루에 묵주기도 5단을 바치자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조금 변질됐습니다. 이유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지만 당시 복사들 사이에서 묵주기도에 대한 경쟁심이 있었습니다. 관건은 누가 한 주에 묵주기도를 더 많이 바치느냐였습니다. 시작은 당시 단장이었던 형이 하루에 10단씩 총 70단을 하고 나니 누구는 백 단 누구는 이백 단씩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학생들이 학교와 학원을 다니면서 1주일에 묵주기도를 몇백 단씩 바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저 역시 삼백 단을 보고한 적이 있었습니다. 거의 랩에 가까운 속도로 묵주기도를 바친 것이지요. 그렇게 묵주기도 인플레이션(?)이 심각해지자 당시 본당 수녀님께서 “묵주기도는 무조건 많이 바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말씀이 어린 저의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무엇을 위해 기도했느냐?” 기도의 숫자와 지향, 오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면서 떠올리게 된 저의 첫 번째 기억입니다.

기도하는 우리. (이미지 출처 = Pixabay)

기억 둘

신학교 2학년 ‘공관복음’ 수업에서 주님의 기도에 대해 배우고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교수신부님께서 하루에 주님의 기도를 얼마나 바치는지 헤아려 보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니 적지 않은 숫자였습니다. 아침과 저녁 성무일도, 미사, 수업 전 시작기도, 각종 모임에서의 기도 그리고 묵주기도 매단을 시작하면서 바쳤던 주님의 기도. 적어도 하루에 10번 이상 제 입에서 주님의 기도가 나왔음은 분명했습니다. 주님의 기도에 대해 강의하시던 신부님께서는 저를 포함한 신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무슨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본질적으로는 주님의 기도에 등장하는 ‘우리’라는 말에 대해 얼마나 인식하고 있느냐?” 당시 저는 ‘우리’라는 말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입으로만 ‘우리’라는 말을 올렸지 항상 ‘우리’의 자리에는 ‘나’만 존재했습니다. 오늘 말씀들을 묵상하면서 떠올린 저의 두 번째 기억입니다.

이번 주일에 등장하는 1독서, 아브라함의 호소에 대한 주님의 응답 속에서 우리는 의인의 숫자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쉰 명으로 시작했던 하느님을 향한 아브라함의 거래(?)는 열 명으로 줄어도 그 대가가 변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는 진정으로 당신의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는 의인이 있느냐가 없느냐가 중요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 공정과 정의는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도시의 파멸을 막고자 애쓰는 공동체적 차원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의 모습 역시 그렇습니다. 그 의인만 살리는 것이 아니라 그 의인을 보아 모두를 살리시겠다고 약속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흔히 기도의 지향이라고 표현하는 그 방향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 줍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알려 주시는 복음도 같은 맥락입니다. 신학생 시절 교수 신부님께서 저에게 깨우쳐 주신 것 같이 주님의 기도는 개인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우리를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청하고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길 청하는 것, 바로 1독서에 아브라함이 주님께 이야기한 그 의인의 기본적인 모습이 주님의 기도 속에 녹아 있는 것입니다. 

기도를 알려 주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일화도 그러합니다.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내 벗이 길을 가다가 나에게 들렀는데 내놓을 것이 없네.’(루카 11,5-6) 빵 세 개를 꾸어 달라고 청하는 이의 이유는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찾아온 벗을 위한 것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 마음에 드는 기도, 상대방을 움직이는 기도는 나를 위한 기도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우리와 모두를 위한 기도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기도를 한번 떠올려 보시겠습니까? 무턱대고 자신이 바라는 바만 반복해서 말씀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매일 기도를 한다고 하면서 나 자신만을 위한 기도만을 바치지는 않습니까? 나를 위한 기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를 위한 기도 속에서 더욱더 주님의 뜻을 찾게 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첫자리에는 주님의 기도처럼 주님에 대한 찬미가 있기를 바랍니다.

덧붙여 세상 곳곳에서 이 사회를 위해 희생하고 있는 수많은 의인을 기억합니다. 올바른 가치와 상식이 무너지고 개인주의가 득세하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말하는 그 의인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무너지고 있는 세상을 떠받치고 하느님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모든 의인들이 주님 안에서 힘을 얻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마음을 모아 봅니다.

유상우 신부(광헌아우구스티노)

천주교 부산교구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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