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없다> 다이애너 기틴스

커피 광고 속에 흔히 등장하는 행복한 가족의 모습을 떠올려 볼까요. 사랑스런 눈빛을 교환하는 30대의 부부, 6살 정도의 아들과 10살 정도의 딸이 벽난로 주변에 모여 과일을 먹으며 정다운 대화를 나눕니다. 거실은 청결하고 따뜻한 느낌입니다. 광고의 카피는 이렇게 말합니다. Man makes house, Woman makes home. 남자는 집을 만들고, 여자는 가정을 만든다? 남자는 밖에서 부지런히 일해서 집을 꾸려갈 돈을 벌고, 여성은 특유의 감성으로서 집안을 화목하게 만든다는 이야기겠죠. 바로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전형적인 가족의 이데올로기입니다.

이 광고가 말하는 가족 이데올로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열거해 볼까요.

첫째, 가족은 한 공간에 같이 거주하는 거주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가족은 음식을 같이 먹는 경제적 공동체라는 것, 부부는 사랑으로 묶여진 애정의 관계라는 것, 부부는 사랑의 결실로서 자녀를 두어야 한다는 것, 남자는 가족 부양의 책임을 맡아야 하고, 여자는 가사노동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 가정은 휴식과 평화의 정서적 공간이라는 것 등이 가족 이데올로기에 추가될 항목들입니다.

그러나 어떤 집단이 ‘가족’으로 불려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위에서 열거한 사항들을 모두 갖추어야 하는 걸까요. 물론 이런 이상적인 조건들을 모두 갖춘 가족도 있을 수 있겠죠. 그러나 가족을 소재로 다룬 드라마나 영화를 상기해보세요. 현실의 가족은 상처투성이입니다. 가정법원의 판사는 가장 바쁜 법조인중의 한 사람입니다.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을 정도로 가족은 불화와 상처의 근원지이기도 합니다.

일본소설가 이사카 코타로의 소설, <중력 삐에로>에는 아주 이상한 가족이 등장합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자신의 아내가 강간당해서 낳은 차남, ‘하루’의 출생의 비밀을 하루의 형에게 알려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루는 내 자식이다. 나의 차남이고, 너의 동생이지. 우리는 최강의 가족이야.”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아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말하면 범죄의 결과인 차남을 자신의 가족의 구성원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소 어안이 벙벙해지는 노릇이죠.

그러나 다이애너 기틴스의 『가족은 없다』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에 접하게 되다 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가족의 개념을 너무 편협하게 이해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반성을 하게 됩니다. 책이 소개하는 한 구절을 볼까요. “타히티에서는 젊은 여성이 공인되고 안정된 혈연관계를 가질 준비가 되어 있다고 판단되거나 또는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기도 전에 한두 명의 아이를 가지는 일이 종종 있다. 이런 젊은 여성의 아이들을 그녀의 부모나 근친자에게 입양하는 것은 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어떤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아이의 ‘어머니임’이 강요되지는 않는다는 거죠.

이 책은 시종일관 “가족은 없다.”라고 말합니다. 두 사람의 사랑으로 묶여진 정서적 공동체, 혈연의 공동체, 경제적 공동체라는 가족의 이데올로기는 현실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수많은 유형의 대안가족에 억압적일뿐더러, 보편적이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현실에는 수많은 가족의 유형이 존재합니다. 이혼 가족, 재혼 가족, 별거 가족, 주말 가족, 기러기 가족, 입양 가족, 국제결혼 가족, 1인 가족, 공동체 가족, 남매 가족, 조손 가족, 동성애 가족 등이 그것입니다. 전문가들은 지금의 다양한 가족 형태를 인정하지 않고 국가나 사회가 개입해 ‘정상 가족’이 대다수가 되는 사회로 돌려놓기는 힘들다고 말합니다.

유전공학의 발달도 새로운 가족 형태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를 테면 난자를 제공한 어머니, 정자를 제공한 아버지, 자궁을 제공한 어머니, 그리고 길러준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것이죠. 만약 가족이데올로기에 근거한 ‘정상가족’만을 정상으로 인정한다면 현실에 존재하는 무수한 가족의 변이형태를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우를 범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실을 구체적으로 볼까요. 통계적으로 보면 3쌍이 결혼해 1쌍이 이혼하는 추세라고 합니다. 2006년의 통계를 보면 혼인 남자의 재혼비율이 16.7-18.9%에 이른다고 합니다. 여성의 재혼 비율은 이보다 조금 더 큰 18.0-21.1%. 해마다 10만 이상의 남녀가 재혼으로 새로운 가족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결혼을 하지 않는 미혼 1인 가구도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죠. 결혼을 아예 할 의도가 없는 비혼 가구까지 치면 그 비율은 해마다 증가추세에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이 등장하는 현실에서 가족의 문제를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통합적이고 다각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데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다이애너 기틴스의 『가족은 없다』를 좀 더 세세하게 살펴, 이 책이 가지는 문제의식을 구체적으로 음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책의 1장은 ‘가족은 어떻게 변해 왔는가?’입니다. 한 가지 유형의 가족만이 존재한다는 전제 아래 가족들을 항상 단수로만 인식하고 가족을 개념화해서는 안 된다는 저자의 문제의식이 담겨 있습니다. 일하는 아버지, 가정을 꾸리는 어머니라는 가족 이데올로기도 따지고 보면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개념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책의 2장은 ‘가부장제는 가족을 이해하는 데 적합한가?’입니다. 저자는 가부장제가 경제적, 사회적, 성적 통제를 강화하는 형태로 발전해 왔으며 이런 틀 밖에 놓인 여성들은 종종 마녀란 혐의로 박해받았으며, 일부 여성들은 가부장적인 억압의 틀 밖에 놓여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고 말합니다.

3장 '가족이란 무엇인가? 가족은 보편적인가?'에서는 친족이 반드시 혈연관계를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듯 가족 또한 반드시 혈연관계를 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문화인류학적 사례들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오랫동안 인류의 보편적 정서라고 여겨 왔던 '어머니'와 '모정'조차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며, 이를 모든 문화에 보편적으로 적용하려는 것은 일종의 편협한 자민족중심주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상식적인 가족 개념 말고도 가족에 대한 또 다른 대안개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의 흑인노예 가정이 그 예죠. 당시에 노예 부부들은 다른 농장에 살며 일주일에 한두 번, 몇 시간 정도 만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적인 가족 개념과는 너무도 다르죠. 어쨌든 흑인노예들을 가족이라고 묶어주는 것은 어떤 정해진 개념이나 사회적 약속이 아니라 스스로 일단의 무리를 하나의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주관성일 것입니다. 스스로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마음 말입니다. 이사카 코타로의 소설, <중력 삐에로>에서 아버지가 아내의 강간사고로 낳은 아들을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바로 이 주관성입니다. 비록 피가 다르고 염색체가 달라도 타인을 가족의 일원으로 생각하는 마음 말입니다. 바로 이 마음이 없었다면 입양가족도, 동성애 가족도 있을 수 없었겠죠. 미국사회사업가협회(NASW)가 ‘자신들 스스로가 가족으로 생각하면서 전형적인 가족 임무를 수행하는 2인 이상의 사람들’이라고 가족을 정의한 것은 이와 관련하여 꽤 의미심장합니다.

4장, '사람들은 왜 결혼하는가?'에서는 결혼의 이유가 부유층에게는 재산을 취득할 수 있는 수단일 수도 있으며, 정치적 동맹을 맺는 수단일 수도 있으며, 국가로 볼 때는 빈민 구제의 결정적인 수단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5장, '사람들은 왜 자녀를 갖는가?’에서 저자는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이 1-2명의 자녀를 갖게 됨으로써 자녀들에게 더 무거운 정서적∙부양적 요구를 하게 되고, 이런 부모들의 과도한 기대를 벗어나기 위해 자식들은 자신의 가족을 만듦으로써 독립을 추구하려고 한다는 지적을 합니다. 과거에는 많은 자식들을 낳기 때문에 한 명 한 명에게 거는 기대의 몫이 적었지만 자식들이 줄어듦으로써 한 명의 자식에게 부가되는 책임의 무게가 그만큼 커졌죠. 핵가족 시대의 자식들이 져야할 부담감이 이해되기도 하는 대목입니다.

6장, '여성의 일은 왜 끝이 없는가?'에서는 가전제품의 발명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노동량은 줄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진공청소기에 의해 해방된 일인 마루 청소는 일주일에 1번에서 점차 하루에 1-2번 하는 일로 되었다는 거죠. 가전제품의 발달과 함께 여성이ㅡ 고유임무라 할 수 있는 청결에 대한 압박도 커진 것입니다. 또 가전제품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유급노동과 가내작업이라는 이중부담을 여성들은 져야만 했습니다. 남자들의 가사 노동은 자발적일 수 있지만 자녀 양육과 가사일에 대한 책임은 여성으로서 당연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죠.

7장과 8장의 질문은 '국가: 가족 연대의 창조자인가 파괴자인가?', '가족은 위기상태에 처해 있는가?'입니다. 국가와 가족 간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논쟁의 주요 쟁점은 국가, 특히 복지국가의 성장이 실질적으로 가족의 위치와 가족의 '연대'를 강화시키는 것인지 아니면 과거의 보다 견고한 가족 연대와 가족 보호를 더욱 쇠퇴시키고 침식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견 차이에 있다. ”라고 저자는 말합니다.

사람들은 노후를 대비해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죠. 그러나 국민들의 복지가 향상되면 생계와 노후에 대한 불안이 없어질 것이고 그에 따라 경제적 이유와 노후보장 차원에서 선택했던 가족의 기능이 쇠퇴할 것이라는 주장이 그 하나의 견해고. 복지가 향상되면 결혼을 해서 안정된 삶을 꾸려가려는 욕망이 실현될 수 있으므로 가족의 연대가 더욱 강화될 것이라는 주장이 또 다른 견해입니다.

저자는 아동보건과 아동복지를 위한 입법, 세금공제의 예를 들어 국가의 복지정책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묻습니다. 아동보건과 아동복지의 입법은 국가의 미래의 노동력과 병력의 질을 증대하려는 특수 목적에서 시행된 것이고, 세금공제는 아동의 양육의 재정적 책임을 국가가 맡기보다는 가족들에게 떠넘기려는 의도라고 말합니다.

9장, ‘가족은 위기 상태에 처해 있는가?‘에서 저자는 가족 이데올로기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경제적 기반을 암묵적으로 전제한다고 말합니다. 남편은 자신의 수입만으로 음식, 안락함, 넉넉한 공간, 그리고 소비재 등을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2008년의 한국의 경제를 위기 상황이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노동시장의 유연화정책으로 고용의 질은 매우 낮아지고 있는 형편입니다. 부동산 경기의 하락에 따른 자산가치의 저하로 중산층이 몰락한다는 위기감도 고조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경제활동에 나서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여성들은 대한민국의 임금구조에서 말단을 차지합니다. 여성노동자들이 대부분 비정규직임을 상기해보십시오. 불안정한 고용상태에서의 임금노동과 자녀양육과 가사노동이라는 3중의 책임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 여성의 현실입니다. 슈퍼우먼이 아닌 이상 여성들에게 3중의 책임을 완벽하게 이행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가족 이데올로기는 이런 여성들에게 매우 억압적인 이데올로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완벽한 가정을 요구하기 이전에 과연 국가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상적인 가족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에 존재하는 유사 가족의 형태를 인정하고, 이상적인 가족에게 돌렸던 책무를 국가에게 돌릴 수 있는 시민의식이 필요한 것이 2008년의 대한민국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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