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성찰 - 김양래] 1980년 그날 이후의 기록

 이 글은 <가톨릭평론> 2019년 5-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5.18 당시 천주교회의 활동

1970년대 후반, 광주전남지역의 기층운동은 가톨릭노동청년회와 가톨릭농민회가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농협 민주화 투쟁과 함평고구마 피해보상 투쟁의 성공으로 농촌사회에서 가톨릭농민회의 신망이 커지고 있었다. 1980년 5월 19일에 북동 성당에서는 ‘함평고구마사건 2주년 기념미사’가 예정되어 가톨릭농민회에서 대규모 집회를 준비 중이었다. 그러나 하루 전날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계엄군들이 광주 시내로 진입해 시민들을 잔악하게 진압하는 모습을 목격한 가톨릭농민회 집행부는 긴급 연락망을 통해 집회를 진행하기 어렵게 되었음을 알렸다. 그럼에도 대회 참가를 위해 광주에 왔던 전남지역 회원들은 버스터미널 인근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상황을 목격하거나 무차별 폭력의 피해자가 되었다.

윤공희 대주교는 5월 19일 오후에 다음 날로 예정된 행사가 있어서 서울로 향했다. 출발하기 전 광주 가톨릭회관 6층 집무실에서 내려다본 금남로는 아수라장이었다. 명동성당으로 가서 광주의 상황을 전하니 김수환 추기경의 첫 질문은 “사람이 죽었냐?”였다. 윤공희 대주교는 “죽은 사람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얻어맞은 사람을 보았는데, 그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면 믿겠다”고 대답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혼란스러운 상황이 계속되면 유언비어가 나타나기 때문에 “교회의 발언은 신중하게 진실만을 수집하고 말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후 김 추기경은 서울에서 20일에 전두환과 교황대사를 면담하고, 21일에는 주한 미국대사와 이희성 계엄사령관을 면담해 광주에서 일어난 유혈사태를 수습할 방법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다. 윤공희 대주교는 광주에서 전라남북도 계엄분소장 윤흥정 중장과 후임인 소준열 중장과 소통하며 사태의 원만한 수습을 위해 노력했다. 한편으로 외부와 연락이 닿지 않는 상황에서, 광주 미국문화원장을 통해 김수환 추기경과 미국대사에게 광주의 상황을 전했다.

5월 21일 오전, 사목국장 이영수 신부의 주선으로 광주지역 사제들이 호남동 성당에서 모였다. 이 자리에서 사제들은 부주교인 장옥석 신부의 제안으로 ‘신부들이 평화적으로 대화하여 수습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장백의를 입고 현수막을 들고 시민과 공수부대가 대치하는 도청 앞으로 나가서 중재하기로 만장일치 결정했다. 현수막 내용은 “폭력과 무기를 사용하지 말자”, “대화를 통해 명예로운 수습을 하자”, “학생들과 민주인사를 석방하라! 군부는 본무에 복귀하라!”였다. 장옥석 신부는 이런 결정을 계엄사 측에 알리고 협조를 요청했는데, 계엄사 측은 “사제들이 나오더라도 다른 유탄을 맞을 수 있으니 만일의 사태에 대해서 책임질 수 없다”고 강경하게 나왔다. 계엄사의 의견을 두고 논의할 때, 총소리(집단발포)가 들려왔다. 조철현 비오 신부는 그 시간에 마침 성당 마당에서 헬리콥터가 불로다리 쪽을 향해 발포하는 광경을 보았다.

5월 22일 시민군이 전남도청을 접수하고, 각계 대표 11인으로 수습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윤공희 대주교는 조철현 신부를 천주교 대표로 수습위원회에 참석하게 했다. 수습위원들은 당일 계엄사와 협상을 위해 계엄분소인 상무대를 방문하여 7개 항의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조철현 신부가 “요구사항을 서면으로 작성해서 수습위원과 계엄군 대표들이 서명 날인하자”고 제안했으나 계엄군 측에서 묵살했다.

윤공희 대주교. ⓒ지금여기 자료사진

5월 24일은 토요일이었다. 윤공희 대주교는 성령 강림 대축일 원고를 작성하여 교구청 사무국에 전화로 읽어 주고, 교구 내 모든 성당에서 그것을 읽게 하도록 지시했다. 이 사목서한은 광주민중항쟁의 처참한 상황을 광주 전남지역에 공식적으로 알린 최초의 문서였다.

가톨릭노동청년회는 전남도청이 시민군에게 접수된 이후 수습위원회 회의가 제대로 가동할 무렵 정향자, 김성애(작고) 등의 실무자를 중심으로 여건이 가능한 회원들이 조직적으로 도청 취사반을 담당했다.

5월 25일에는 학생수습위원 대표가 수습위원회에 와서 “도청 민원실 지하에 있는 다이너마이트를 지키기 위해서 어르신들이 믿을 만한 사람들을 데려와서 지켜 달라”고 호소했다. 수습위원 중 목사와 신부들이 각자 교회로 돌아가서 사람들을 데려오기로 해서, 조철현 신부는 계림동 성당에서 박철수 신학생(현 사제)을 비롯한 11명, 김성용 신부는 남동 성당에서 신학생 한 명과 청년회 신혁 회원(현 사제) 2명을 데리고 도청으로 돌아왔다. 조철현 신부가 다이너마이트가 있는 민원실 지하를 지키는 시민군을 교대하려고 물으니까 “군대에 갔다 온 대학생들로 교체되었다”고 하여 대기하던 성당 청년들을 돌려보냈다.

5월 26일 새벽 계엄군 탱크가 상무대에서 농성광장 쪽으로 진입하자 김성용, 조철현 신부를 포함한 수습위원 17명은 이른 아침에 ‘죽음의 행진’이라 부르는 전남도청에서 농성광장까지 걸어서 도착했다. 계엄군의 요청으로 5명의 수습위원 대표가 계엄군 사령부로 가서 마지막 협상을 했으나 실패했다. 김성용 신부가 전남도청으로 돌아오자 홍남순 변호사, 이성학 장로는 “서울로 탈출하여 계엄군의 만행을 알려 달라”고 말했다. 김성용 신부는 당일 곧바로 광주를 탈출, 영광과 고창을 거쳐서 전주교구청에서 우연히 만난 가톨릭노동청년회 전국 지도신부인 전 미카엘 신부와 동행해 서울 명동성당으로 향했다.

5월 26일, 윤공희 대주교는 절박한 심정으로 최규하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다. 전날 광주를 방문한 최규하 대통령이 “사태의 진행을 잘 알지 못하고” 담화문을 작성한 것으로 판단하고,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감정을 그대로 전달하면 평화적인 수습의 길이 열릴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윤공희 대주교의 이 편지는 즉시 전달되지 못했다. 김수환 추기경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으나, 며칠 후 주교회의 상임위원회(위원 김수환 추기경, 윤공희 대주교, 김남수 주교, 나길모 주교, 정진석 주교)에서 논의하여 상임위원회 이름으로 6월 2일 최규하 대통령에게 우송되었다. 윤 대주교는 5월 26일에 썼던 편지를 동봉하면서, 사태가 진압된 이후이지만 그 진실을 전해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뒤늦게라도 전하는 이유를 추가로 최규하 대통령에게 편지로 썼다.

한편 광주항쟁으로 희생당한 사망자와 부상자들의 가정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지원하는 것은 평신도들의 몫이었다. 윤공희 대주교는 광주대교구 관할구역에 있는 모든 성당을 통해 희생자들을 파악했다.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이 당시로는 많은 금액인 1000만 원을 보내 사망자 가족에게 10만 원, 부상자에게는 5만 원씩 당시로는 적지 않은 위로금을 긴급 지원하는 활동을 벌였다.

1980년 5월 19일, 출근한 윤공희 대주교가 금남로의 참담한 상황을 목격한 창문. "이곳 6층 집무실에서 창밖으로 내려다 본 골목에서 계엄군에게 폭행당한 젊은이가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고 응급조치를 해야 할 텐데 생각하면서도 두려워서 실천하지 못했다"는 윤 대주교의 고백이 쓰여 있다. ⓒ정현진 기자

 

전주교구와 부산교구의 연대

5.18 직후 전주교구는 5월 20일에 교구 정의평화위원회(이하 정평위)를 긴급 소집해 대표를 광주에 파견하여 상황을 알아보기로 한다. 전주교구장 김재덕 주교는 5월 22일 전주 정평위 위원 신부들과 함께 광주교구청을 방문하려고 장성까지 갔으나, 계엄군이 도로를 폐쇄해 더는 갈 수 없었다. 그래서 5월 23일에 전주교구 임시 사제총회를 소집해 “광주의 상황이 너무 심각하니까 진상을 알리는 쪽으로 주력하자”라고 결의했다. 마침 21일, 광주를 탈출해 전주교구청을 찾아온 김현장에게 사목국장 겸 정평위 위원장 김봉희 신부는 “말로 하지 말고 글로 써 봐라”라고 했다. 그렇게 작성한 유인물 2만 장을 인쇄해 사제들이 직접 들고 성당으로 돌아갔고, 총회에 참석하지 못한 성당에는 인편으로 전달했다.

김봉희 신부는 신학교 동창 네트워크를 통해 이를 전국으로 전하는 등 진실을 알리는 데 앞장섰다. 5월 26일에는 전주 정평위가 김봉희 신부를 대표로 하여 부상당한 광주시민들을 위해서 헌혈한 피를 가지고 장성까지 왔지만, 전달할 방법을 찾을 수가 없어서 되돌아갔다. 5월 29일에는 김재덕 주교와 김봉희 신부가 윤공희 대주교를 방문해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연대의사를 밝혔다. 6월 25일 밤에는 광주항쟁의 진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활발하게 배부하던 여산 성당 박창신 신부가 사제관에 침입한 5명의 괴한에게 테러를 당해 온몸 다섯 군데에 칼에 찔리는 상처를 입었다. 전주교구는 7월 9일에 열린 성직자, 수도자 성서 세미나에 윤공희 대주교를 초청해 광주의 진실을 청취했다. 이 자리에서 윤 대주교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두고 5.18 당시 “강도 맞은 사람을 보고 지나친 사제가 바로 나였다”라고 고백했다.

부산교구에서도 일본의 NHK 방송을 통해서 광주에서 일어난 상황을 알게 되었다. 당시 부산 정평위 박승원 신부는 손덕만 신부, 송기인 신부와 협의해 6월 1일 주일미사에서 광주 희생자들을 위한 2차 헌금을 실시해 다음 날 오전에 광주교구청을 방문했다. 윤공희 대주교는 부산교구 신부들을 만나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설명하면서 눈물을 보였다.

 

그날의 진실을 알리려 한 노력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6월 2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모임을 가졌다. 오전에 윤공희 대주교를 만났던 부산교구 신부들은 오후에 전주 전동 성당 문정현 신부를 만나고, 저녁에는 서울에서 정의구현전국사제단 모임에 참석했다. 당시 서울에 머물고 있던 김성용 신부와 김갑제(요셉), 김성애(로사리아)가 증언했다. 사제단 모임에서는 광주의 참상을 알리는 여러 유인물이 제시되었는데, 일부 유인물의 내용이 과장되고 표현이 과격하여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공신력을 가진 단체가 진상을 정리한 증언”이 필요하다며, 그것을 광주대교구가 맡아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박승원 신부의 제안으로 진실을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알리는 방법으로 사진과 영상을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의견을 모으고, 그 작업을 베네딕도수도회가 맡기로 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베네딕도회에서는 사진과 영상을 모으는 작업을 추진하지 못했다. 영상을 담당했던 임 세바스찬 신부는 “자료 수집이 수월하지 않고 정보기관의 감시가 너무 심해서 진행이 어려웠다”고 필자에게 말한 바 있다.

광주대교구는 5.18이 참혹하게 진압되고 언론이 통제된 상황에서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의 일방적 발표를 접한 후 사제회의에서 더는 침묵해서는 안 된다고 결의했다. 사제를 비롯해 신자들이 직접 보고 들은 내용 등을 제보받고, 들은 내용은 현장을 취재하여 사실관계를 확인하여 '광주사태의 진상' 성명서를 작성했다. 신동 성당 정형달 신부가 작성한 이 성명서는 광주대교구 사제단 내부에서 회람해 수정하고, 최종 완성된 내용을 정형달 신부가 신학교 동창인 전주 김봉희 신부에게 전달해 신학교 동창 네트워크를 통해서 전국에 인편으로 전했다. 다른 경로로는 성염 교수(前 주 바티칸 대사)가 정형달 신부에게 받아 서울에 있는 정의구현사제단에 전달했다.

이 성명서에 대해 6월 30일에 대구를 제외한 전국의 모든 교구와 수도회의 정의구현사제단이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전주교구는 자체적으로 인쇄해 널리 알렸지만, 대부분 교구에서는 미온적으로 대응하여 진실을 널리 전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특히 지지 성명에 유일하게 빠졌던 대구대교구는 전두환이 쿠데타에 성공하고 신군부가 통치권을 확립하려고 설치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 이종흥 신부, 전달출 신부 2명을 위원으로 파견하기까지 했다.

한편 광주를 탈출한 김성용 신부는 서울교구청 사제관에서 광주의 진실을 글로 정리해 추기경에게 제출했다. 이 글이 '분노보다는 슬픔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김성용 신부에게 “정직하게 말해라. 사실대로 말해라. 만일 이게 사실이 아니라고 알게 되면 광주 전체에 대해서 일어난 실제의 일이 감추어질 수 있다”라고 강조하면서, 내용이 다르면 진실까지도 매도되는 상황을 경계했다. 이 책은 이후 일본 정평위에서 일본어로, 메리놀회 일본지부에서 영어로 번역해 전 세계에 5.18의 진실을 전하는 중요한 증언으로 활용되었다.

육군본부에서도 여론 수집 차원에서 1980년 6월 6일부터 12일까지 가톨릭신도회 회장 박춘식 준장을 단장으로 김기춘 신부 등 세 사람의 군종신부를 광주에 파견해 ‘광주 천주교 성직자 및 신뢰도 높은 신자를 대상으로 탐문조사’를 진행했다. 이들은 광주에서 ‘유언비어의 진위 확인’, ‘작전행위와 구분되는 잔악행위 확인’, ‘오해 해소를 통한 선무활동’ 등의 임무를 받았다. 이들은 “연행자 조사, 과도한 유언비어 단속 등 공포 분위기 조성으로 민심수습에 역작용”, “정부의 발표, 시책, 언론, 수습대책위원회의 활동에 대한 회의적인 신뢰도”, “무서워서 할 말 못 하니 답답하고 억울하다”, “광주시민을 폭도로 일괄 규정치 말고 마음의 응어리를 물질로 풀지 말라”는 등을 여론을 보고했다.

해외에서도 지지와 연대를 전했다. 6월 10일, 로마에서 유학 중이던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윤공희 대주교에게 의견서를, 6월 16일에는 미국 주교회의 의장이 김수환 추기경과 윤공희 대주교에게 “한국교회의 인권 옹호를 위한 과감한 노력을 지원하겠다”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내 왔다.

 

계엄 당국에 대한 항의

시민군의 마지막 항전지인 전남도청이 무참하게 진압된 이후 광주대교구에서는 6월 2일, 목포 북교동 성당에서 최초로 추모미사를 봉헌했다. 강론은 광주에서 수습에 참여했던 남재희 신부가 맡았다. 이 미사는 외부 스피커를 설치해서 진행했고, 가톨릭 신자들과 일반 시민까지 많이 참석했다. 광주가 진압된 이후 5월 27일까지도 목포에서는 항쟁이 계속되었다는 사실과 진압 이후 최초로 거행된 이 미사는 계엄 당국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김수환 추기경이 6월 4일 광주를 방문했다. 추기경은 “단 하나라도 정확한 사실을 확보하라”며 윤공희 대주교에게 요청했다. 추기경을 비롯해 여러 교구에서 방문한 사제들이 광주대교구청에서 회의하는데, 광주보안대는 사목국장 이영수 신부와 북교동 성당 서상채 신부를 연행하려고 해 소란이 생겼다. 그 상황을 본 몇몇 사제가 추기경에게 미온적인 전국 주교단의 태도에 대해서 강하게 항의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1980년 6월 25일 '한국동란 30주년을 맞이하며'라는 제목의 시국담화문을 발표한다. 주교회의에서 집단적 지혜가 모이지 않았던 어려운 시기라 개인 성명으로 광주의 아픔에 동참하고 시국에 대한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또한 김 추기경은 사회 원로인 윤보선, 천관우, 함석헌 등과 공동으로 시국담화를 발표했으나 당시 <동아일보>에만 몇 줄로 보도되었을 뿐이다.

조철현 몬시뇰. (사진 제공 = 광주대교구)

한편 계엄 당국은 조철현, 김성용 신부의 체포령을 내렸다. 윤공희 대주교는 “시민들이 다 잡혀가서 두들겨 맞고 조사를 당하고 있는데 신부들만 나타나지 않고 숨어 있으면 그것도 지도적 위치에 있는 성직자의 모습이 좋지 않다. 조금 힘들더라도 진실을 밝히는 고난에 함께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두 신부를 자진출두하게 했다.

이에 조철현 신부가 사목하던 계림동 성당에서 6월 23일 시국미사가 열렸다. 계엄 당국은 성당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미사가 불법이라는 팻말을 세웠지만, 성당 마당까지 가득 채울 정도로 많은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이 참석했다.

6월 30일에는 김성용 신부가 사목하던 남동 성당에서 미사가 열릴 예정이었는데, 계엄 당국과 경찰이 나서서 미사를 중단하라고 협박했다. 이들은 미사 시작 2시간 전에 성당 입구를 봉쇄했다. 비가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일부 신자들은 남동 성당의 담을 넘어 참석했고, 사제들도 몸수색을 당하는 등 살벌한 상황이었다. 쏟아지는 빗속에 포위망을 두고 성당에 들어가지 못한 신자들이 묵주기도와 성가를 부르면서 항의했다. 윤공희 대주교는 잘못하다간 또다시 5.18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 수 있을까 우려하여 미사를 취소했다. 이 결정에 일부 신부들이 반발했다. 윤 대주교는 이날 사건의 경험이 “5.18과 관련한 모든 내용을 교구 사제들과 협의해서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라고 회고했다. 윤 대주교는 미사를 취소한 대신 계엄 당국(전라남북도 계엄분소장, 전라남도 경찰국장)에 '경찰에 의한 종교행사 방해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강력한 항의 공문을 보냈다.

7월 7일, 광주대교구 사제단은 보안대에 연행된 정규완 신부가 사목하던 북동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며, “마지막 한 사람의 사제가 남을 때까지 뜻을 굽히지 않겠다”라고 윤공희 대주교에게 문서로 결의했다. 이어서 7월 15일에 진행된 남동 성당 미사에서는 윤공희 대주교가 직접 강론에 나섰다. 윤 대주교의 입장은 ‘진실규명’으로 확고하게 정리되었다.

 

사제들의 구속과 체포

광주에서는 수습위원으로 참여했던 조철현, 김성용 신부 외에도 '광주사태의 진상' 성명서와 관련되어 6명의 사제가 보안대에 끌려가기도 했다. 서울대교구에서는 7월 7일과 8일에 김택암, 안충석, 양홍, 오태순, 장덕필 신부와 국제가톨릭형제회(A.F.I.) 회원인 정양숙 마리안나 등이 “날조된 내용이 담긴 불순 유인물”을 제작해 유포했다는 혐의로 서빙고 보안대로 연행되어 10일 동안 조사받고 석방되었다.

7월 17일, 광주 사제단은 한국천주교 주교단에 건의문을 발송했다. 7월 16일 현재 광주 사제 8명, 서울 사제 5명이 연행 구금된 상황에서 주교단의 입장표명을 강하게 요청했으나 응답이 없었다. 당시 윤공희 대주교는 주교회의 의장직을 수행했는데, 주교회의 전에 열린 전국 교구 사목국장 회의에서 사전에 논의하여 광주 문제를 주교회의 안건으로 올리는 것으로 알았다. 하지만 안건은 올라오지 않았고, 주교들도 이 문제가 나오면 아예 침묵으로 일관해 회의를 진행하기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7월 21일, 보안대에 끌려가 조사를 받던 장지권, 이영수, 정규완, 남재희 신부를 훈방하겠다며 연락이 왔다. 그런데 보안대는 “내란음모 사건으로 조사받다가.... 석방한다”라는 내용에 각서를 요구했다. 윤 대주교는 “나는 신부들에게 어떤 죄목을 전제한 이런 서류에는 서명할 수 없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때 자리에 동석했던 사람들이 말리고 보안대장이 “그러면 각서에서 죄명을 빼고 ‘광주사태로 조사를 받던 중 신병을 인도한다’로 하면 어떻겠냐”고 수정 제안하여 그대로 서명하고 신부들과 함께 돌아왔다.

 

군사재판과 구명 활동

1980년 9월 초부터 구속자들에 대한 군사재판이 시작되었다. 상무대에서 군법회의가 열릴 때마다 매주 2-3회씩 200여 명의 신자들이 상무대 정문 거리에서 성가를 부르고 기도하면서 구속자들을 지지했다. 이것은 고등군사재판이 끝나던 12월 29일까지 계속되었다.

10월 24일부터 열린 1심 재판(404명 기소)에서 5명이 사형, 7명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12월 29일에 열린 2심 재판(255명 기소)에서도 정동년, 배용주, 박노정 3명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1981년 1월 21일, 광주 정평위는 '광주사태 사형자 구명 및 구속자 감형을 위한 서명운동 협조'라는 공문을 전국에 발송했다. 서명운동 결과로 주교, 신부, 수도자가 포함된 4000명의 서명을 받아 대법원에 제출했다. 3월 18일에는 서부 독일 에센의 이웃 도시인 보트로프시에서 청원서에 서명된 372명의 서명지를 광주 정평위에 보내왔다. 4월 10일에도 1150명이 서명한 소포를 보내왔다. 첫 번째 도착한 서명지는 대법원에 제출되었다.

1981년 3월 31일, ‘5.18사건’ 83명에 대한 대법원판결이 내려지며, 3명에 대한 사형과 7명에 대한 무기징역이 확정되었다. 재판에 참석한 구속자 가족들은 1974년 인혁당 사건 당시 대법원 선고와 동시에 사형이 집행되었던 상황을 떠올리며 절박한 심정이었다. 구속자 가족들을 이날 명동성당 저녁미사에 참석하는 신자들에게 미리 준비한 성명서를 나누어 주고, 미사 뒤에는 신자들에게 직접 호소했다. 성당 내부까지 경찰들이 추적하자 구속자 가족들은 제대 쪽으로 몸을 피했다가 명동 주임신부의 배려로 지하 성당에서 밤을 지냈다. 다음 날 오전, 구속자 가족들은 김수환 추기경 면담을 요청해서 명동성당 구내에 있는 추기경 집무실로 이동하여 농성에 돌입했다.

윤공희 대주교는 김수환 추기경과 상의해 전두환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1981년 4월 1일 윤공희 대주교는 전두환과 면담하면서 “광주사태로 많은 희생자가 생겼는데 또다시 사람의 생명을 다치게 하면 안 된다. 모두 사면해 달라”고 요구했다. 전두환의 답변은 “경찰을 죽인 사람까지 사면할 수 없다”고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윤 대주교는 작별인사를 할 때, 다시 간절하게 “극형은 없도록 해 달라”고 거듭 말했다. 윤 대주교는 광주에서 또다시 희생자가 발생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런 절박한 마음이 전두환 앞에서 단호하게 사면을 촉구하게 했다.

한편 2심 재판을 앞둔 12월 9일 저녁,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이 일어났다. 가톨릭농민회 광주분회와 함평분회 회원들이 브라운 미국 국방장관의 한국방문 시점에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해 결행한 것이다. 이 사건은 언론의 조명을 크게 받지 못했고, 광주대교구에서도 조직적 지원을 할 수 없었다. 2심 판결을 앞두고 있어서 계엄 당국을 자극하는 언동을 조심해야 했다.

국립 5.18민주묘지. 이곳은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묘역 조성을 발표한 뒤 1997년 완공됐고, 2002년 국립묘지로 승격해, 2006년 이름이 바뀌었다. 이곳에는 5.18 희생자와 그 배우자가 안장되어 있다. ⓒ정현진 기자

시국미사와 진실의 전파

1981년 2월, 광주 정평위는 정형달 신부를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남동 성당에서 매주 월요미사를 드리기로 했다. 이 미사는 1981년 8월 15일까지 계속되었고, 이후 월례미사로 바뀌어 1982년 12월 24일, 구속자 전원이 석방되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미사에서는 주로 구속자의 석방과 진상규명에 대한 주제가 많이 등장했고, 관련 정보가 교환되었다.

한국에서 생산된 5.18 관련 자료는 여러 경로로 외국에 전달되었다. 특히 가톨릭교회 자료는 재야인사 김정남을 통해 일본가톨릭정의평화협의회 박영순에게 전달하면, 동경대학교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교수 등의 번역을 거쳐서 수신처가 100여 군데에 달하는 유럽 전역으로 전파했다. 메리놀회 일본지부는 이를 영문으로 번역하여 미국과 영어권 국가들로 정보를 확산시켰다. 1983년 메리놀회 일본지부는 "한국 가톨릭교회와 인권"이라는 영문자료집을 펴냈는데, 여기에는 대량의 5.18 자료가 영문으로 실렸다.

한편 1981년 4월 20일부터 5월 8일까지 3주 동안 수원에서 사제연수를 마친 광주대교구 사제들은 자신이 사목하는 본당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울 명동성당으로 집결했다. 사제들이 주일미사를 비우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1981년 5월 10일은 성소주일이었다. 공교롭게도 서울교구장인 김수환 추기경이 출장 중으로 경갑룡 보좌주교와 윤공희 대주교가 협의하여, 명동성당 교중미사를 광주 사제단이 지내기로 양해했다. 광주항쟁 1주기를 앞둔 이 미사에서 윤공희 대주교는 강론에서 강한 어조로 정부의 태도를 비판했다.

"광주사태는 처음에는 평화적인 학생시위가 있었는데, 이것을 진압하는 단계에서 공수특전단이 너무나도 잔악한 만행을 저지르는 바람에, 이에 격노한 시민들이 궐기하고 무기까지 탈취해서 항거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군경이 광주 시내에서 밀려 나갔던 극단의 소요사태로 번진 것이었습니다. 불순분자가 개입한 내란이 아니었습니다.... 사태가 지난 후에 사태의 진상을 공정하게 조사하고 솔직하게 밝히면서,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도모하지 않고, 사태의 책임을 오로지 시민들에게만, 그것도 야만적인 방법으로 왜곡된 조사를 진행시켜서 거짓 죄목을 씌워 중형을 가한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민족적 죄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힘으로써 국민의 입을 막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국민의 양심적인 판단을 억압으로써 마음대로 바꿔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1981년 5월 19일은 광주 남동 성당에서 1주기 추모미사가 열렸다. 광주 사제단은 미사가 끝난 후 남동 성당에서 단식기도를 시작하고, 밤에 교구청이 있는 광주가톨릭센터 5층으로 이동하여 25일까지 단식기도를 이어 갔다. 사제단은 금남로로 향하는 창문에 “광주사태를 통곡한다”, “진상을 밝혀라”, “구속자들을 석방하라”라는 내용의 현수막을 부착하고, 유인물을 5층에서 뿌리는 방식으로 홍보했다.

 

진실을 알리는 사진 전시회와 영상 제작

1987년은 전두환의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해이기 때문에, 임기가 끝나기 전에 ‘5.18 당시 피 묻은 손으로 무슨 일이 광주에서 벌였는지’ 확인시켜야 하는 시간이 촉박했다. 광주 정평위는 5.18 영상을 확보하는 것이 진실규명에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자료 수집에 착수했다. 베네딕도수도회 영상담당인 임 세바스찬 신부와 엠네스티 한국지부장을 역임하던 허창수(구미 신동 성당) 신부를 만나서 영상자료를 확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한편으로 5.18 당시 광주지역 사진기자들을 만나서 자료의 제공을 요청했으나, 대부분 갖고 있지 않거나 계엄사에 빼앗겼다고 외면하며 숨겼다. 현장에서 활동했던 기자로는 유일하게 나경택 기자에게 흑백필름을 제공받았다. 그리고 마침 독일에서 사목하다가 귀국한 장용주 신부가 1980년 당시 독일 잡지에 실린 컬러사진을 가져와서, 그것을 복사해서 광주가톨릭센터 2층 전시실에서 최초의 5.18 사진 전시회를 열었다. 사진가 임무택이 흑백필름 인화작업을, 화가 홍성담은 사진의 순서와 사진 말을 정리했다. 정평위 간사였던 필자와 홍세현을 비롯하여 미술그룹 시각매체연구회 회원들이 이들과 함께 작업을 뒷받침했다.

전시회가 시작되자 엄청난 파장이 일어났다. 1987년 5월 12일부터 광주가톨릭센터 전시실에서 시작된 ‘5.18 사진 전시회’는 광주뿐만 아니라 부산가톨릭회관에서도 열려, 수많은 시민이 신군부의 잔인성을 확인했다. 이러한 파장은 광주, 부산지역에서 시민들의 참여를 촉진해 6.10항쟁으로 이어지는 디딤돌이 되었다. 당시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는 대통령직선제를 바라는 국민들의 여망을 짓밟는 것이어서, 광주 사제단은 4월 21일 단식기도를 시작했고, 9일간 계속된 단식기도는 14개 교구의 단식기도로 이어졌다. 릴레이 단식기도가 진행되던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5.18 추모미사에서는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폭로가 있었고, 이는 6.10항쟁으로 이어졌다.

광주 정평위는 6.29선언 직후 정보기관의 감시가 허술한 틈을 타 1987년 9월에 사진집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을 제작했다. 초판으로 2만 5000부를 인쇄했는데, 큰 제본소는 정보기관의 순찰이 계속되고 있어서 제본기를 구입하고 조선대 오자남회 회원과 남동 성당 청년회원, 광주 정평위 활동가들이 2주 동안 야간으로 작업하여 사진집을 만들었다. 사진집 제작비가 부족할 때, 부산 박승원 신부와 서울 함세웅 신부, 수원 과천지역 성당의 한 사제가 제작비를 지원했다. 특히 부산의 박승원 신부는 부산 정평위 1년 예산 전액에 더해서 1000만 원의 제작비용을 보내왔다. 사진집이 완성되자, 제작을 후원한 세 사제에게 사진집을 배송하여 한날한시에 전국의 성당을 통해 배포하도록 했다.

또한 광주 정평위는 1987년 10월에 독일 공영방송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 기자가 찍은 영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비디오테이프를 편집하여 다시 제작했다. 장용주 신부가 독일에서 귀국할 때 원본 비디오테이프를 이삿짐 속에 가지고 왔다. 이미 번역한 자막본까지 만들어 왔다. 사진전을 준비했던 임무택과 홍성담이 함께 편집 작업을 진행했다. 비밀리에 하는 작업이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편집용 기계가 없어서, 모든 작업은 수작업으로 진행되었다. 한 개의 원본 테이프가 나오자 1대1 복사부터 시작했는데, 당시 귀했던 비디오 데크가 없어 윤공희 대주교와 장용주 신부 등 광주 사제들이 갖고 있는 비디오 데크를 동원해 복사할 수 있었다.

대규모로 제작된 사진책과 비디오테이프는 전국 각지에서 판매되거나 상영되어 5.18의 진상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마침 대통령 선거와 시기가 겹쳤는데 여러 사회단체와 대학생들의 무작위 재복사로 인하여 테이프는 셀 수 없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자료는 진실의 왜곡으로 억울함과 분노로 가득 찬 광주, 전남 사람들의 아픔을 씻어주는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기록물도 전시되어 있다. 책은 광주대교구 정평위가 펴낸 첫 사진기록집이다. ⓒ정현진 기자

고립된 섬, 광주

광주는 고립된 섬이었다. 언론이 통제되어 내란을 일으킨 신군부가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정보에 의지하여 왜곡되어 버린 민심을 회복하기에 광주의 힘은 너무나 미약했다. 조철현 신부와 남재희 신부가 수습과정에서 총기 회수에 노력한 일이나, 윤공희 대주교가 인터뷰에서 “총기를 들지 않고 비폭력으로 끝까지 저항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말하고 있지만, 계엄군이 물러난 일주일 동안 광주 시내는 강력사건이 없는 비폭력 평화의 공동체를 보여 주었다. 가톨릭 사회교리에서 요청하는 ‘맨몸의 예언자’를 통한 비폭력 평화 저항운동의 신념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광주시민의 입장을 끝까지 고수한 수습위원회 대변인 김성용 신부의 활동, 공수부대의 야만적 진압을 밝히고 책임자 처벌을 요구한 광주사제단의 진실규명 활동과 사형 구명 및 구속자 석방 운동을 펼친 월요미사, 처음부터 일관되게 진실규명을 요구한 윤공희 대주교의 입장은 광주대교구가 신군부의 거대한 음모로 시작된 광주항쟁의 진실을 밝히는 데 한 걸음이라도 나아가게 한 추진 동력이었다.

하지만 광주항쟁에 대해서 한국천주교 주교단이 침묵하거나 방관했던 상황은 마음이 아픈 부분이다. 왜곡된 정보에 의해서 식별이 어려웠다고 하더라도, 동료 주교의 편지나 강론 등에도, 광주 사제단의 건의에도 이들은 응답하지 않았다. 특히 <가톨릭신문> 등 교회언론이 침묵하고 방관한 것은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임에 틀림없다.

광주대교구의 이웃인 전주교구는 초기부터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형태로 연대를 모색했지만, 군대에 가로막혀 닿을 수 없었다. 김수환 추기경이 희생을 막고 수습을 원만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서울대교구 일부 사제들과 평신도들이 진실을 알리기 위해 분투한 것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교구가 침묵을 지켰다. 그나마 유일하게 1981년 1월부터 시작된 ‘사형수 구명 및 구속자 석방’ 서명운동에 모든 교구의 교구장이 동참해 주었다는 것이 작은 위로가 되었다. 당시 구속자 가족들이 전국 교구를 모두 순회하면서 교구장 주교들을 만나 진실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는데, 놀랍게도 많은 주교가 사실관계조차 잘 몰랐다. 100만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참가하여 1981년 10월 여의도 공원에서 열렸던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미사’에서도 한 학생의 기도를 제외한다면 5.18은 철저히 외면당했다.

 

밝혀져야 할 그날의 진실

한국 현대사에서 시민들이 독재정권에 맞선 저항권사건으로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10항쟁을 대표적으로 꼽는다. 그렇지만 오늘날 5.18민주화운동에 대해서만 유독 의도적인 왜곡과 폄훼가 진행되고 있다. 그 이유를 곱씹어 보면, 4.19혁명은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렸고 6월항쟁은 직선제 개헌을 통해 정치형태를 바꾸는 변화가 따랐다. 그러나 5.18민주화운동은 내란을 일으킨 전두환 일당에 의해 참혹하게 진압되었고, 이후에도 진실규명이 불가능할 정도로 일방적인 탄압을 받았다. 내란을 일으킨 일당은 정부 고위직을 나누어 먹고 조직적으로 희생자들을 탄압했다.

최초로 5.18 진실을 담은 책자는 1985년 전남사회운동협의회가 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다. 같은 해에 천주교 광주대교구도 "천주교 자료집"을 냈고, 1987년에 사진자료집과 비디오테이프를 연속해서 제작했다. TV에서는 <MBC>에서 5.18과 관련해 '어머니의 노래'를 1988년에 처음으로 방영했다.

1988년 여소야대 국회에서 ‘5.18청문회’가 구성되었으나 청문회 도중에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3당 합당이 성사되면서 보고서를 의결하지 못한 채 미완의 청문회로 끝났다. 1994년에야 전두환, 노태우 구속을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를 구성해 176일 동안의 명동성당 농성을 이어 갔고, 결국 전두환, 노태우를 구속해 사법정의에 따른 심판을 받게 했다.

전두환, 노태우는 광주시민들을 학살하고 내란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한 지 16년 만에 처벌을 받았다. 그동안 권력의 중심에 있던 가해자 그룹이 일방적으로 전달한 5.18에 대한 왜곡된 정보로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아 왔기 때문에 여전히 5.18은 왜곡에 시달리고 있다.

2017년 1월, 미국 CIA는 1200만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비밀문서를 해제했다. 여기에는 5.18 관련 문건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 정부의 문서에서 광주항쟁은 초기에 광주시민들이 일으킨 ‘폭동’으로 정리되었다. 그러나 1982년에는 단어의 미묘한 변화가 나타나는데 ‘폭동행위’ 같은 민감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시민소요’, ‘봉기’, ‘반정부시위’ 같은 단어로 대치되었다. 그리고 1986년 후반에 들어서 과거의 모호한 문구를 탈피하여, “(새로운 시대를 끌어가는) 반정부세력의 중심에는 ‘광주 세대’로 불리는 광주항쟁 진실규명 투쟁을 이끌어 온 그룹이 있다”라고 5.18에 대한 평가를 달리했다.

그날의 진실은 이제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이 진실을 밝히는 과정에서, 오늘의 교회는 또다시 광주를 고립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김양래
5.18기념재단 이사. 5.18 당시 전남대학교 학생으로 기획팀에서 활동했고, 광주항쟁과 관련한 1심 군법회의에서 1년 선고를 받았다. 형 면제로 1980년 10월에 석방된 후 곧바로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에서 자원활동을 하다가, 1982년부터 1991년까지 정평위 간사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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