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

(편집 : 장기풍)

“예수님 사랑은 희망의 지평을 엽니다”
교종, 5월 19일 부활 제5주일 삼종기도 가르침

 

프란치스코 교종은 5월 19일 부활 제5주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부활 삼종기도 가르침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사랑이 아닌 새 인간이 되게 하는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 서로 사랑하라고 청하신다고 말했다. 또한 교종은 그분의 사랑은 원수들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게 하고, 다리를 만들며 새로운 길을 가르치고, 장벽을 넘어서게 해준다고 강조했다. 가르침 내용.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수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하신 ‘고별연설’ 말씀을 듣도록 우리를 이층 다락방으로 인도합니다. 그분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왜 이 계명을 ‘새 계명’이라고 부르셨을까요? 구약성경에서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레위 19,18) 예수님께서는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묻는 사람에게 첫째가는 계명이란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 계명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십니다.(마태 22,38-39)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맡기신 이 계명의 새로움은 어떤 것입니까? 왜 이 계명을 ‘새 계명’이라고 부르십니까?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설명으로 옛 사랑의 계명은 새 계명이 되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새로움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고 그 사랑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목숨을 통한 사랑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발견되는 조건 없고 한계 없는 보편적인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겁니다. 당신 자신을 극도로 낮추신 그 순간 성부께 당신 자신을 맡기신 그 순간, 하느님 아드님께서는 세상에 완전한 사랑을 드러내셨고 완전한 사랑을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고통을 다시 생각하면서 제자들은 그분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이해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의 나약함과 한계, 인간적인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한계를 모르고 결코 끝나지 않는 당신 사랑에 우리가 합당한 자들이 되게 하신 것도 그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시면서 그분께서는 우리의 사랑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당신 사랑을 통해 서로 사랑하라고 요청하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청한다면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부어주십니다. 오직 이렇게 함으로써만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사랑뿐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과 같은 사랑으로 다시 말해 무한히 더 많은 사랑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인간관계를 새롭게 해주고 희망의 지평을 열어주는 사랑의 씨앗을 어디든지 뿌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희망의 지평을 열어주시고, 그분의 사랑은 희망의 지평을 엽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새로운 인간이 되게 하고, 주님 안에서 형제자매가 되게 해주며, 우리를 하느님 백성, 곧 교회가 되게 해줍니다. 이 교회 안에서 모두 그리스도를 사랑하도록 부르심 받았고, 그분 안에서 서로 사랑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서 드러난 사랑, 우리로 하여금 살아내라고 그분께서 부르신 그 사랑은 돌로 된 우리 심장을 살로 된 심장으로 변화시켜주는 유일한 힘입니다. 만일 우리 또한 이 사랑으로 사랑한다면 이 유일한 힘은 우리 마음을 예수님에 대한 사랑으로 변화시켜줍니다. 또한 이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원수를 사랑하고 상처를 준 이들을 용서할 수 있게 해줍니다. 여러분 한 가지 질문하겠습니다. 각자 마음속으로 대답하십시오. 나는 내 원수들을 사랑할 수 있는가? 우리 모두가 원수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와 마음이 맞지 않고, ‘반대편에 속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악행을 저지른 사람과 만납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가? 나를 아프게 했고, 상처를 준 그 남자, 그 여자를 사랑할 수 있는가? 나는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가? 각자 마음속으로 대답해보십시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타인을 예수님 벗들인 공동체 구성원, 혹은 미래 구성원으로 보게 해줍니다. 대화하라고 우리를 부추기고, 서로 경청하고 알라고 우리를 도와줍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향해 우리를 열어주고 인간관계 기초가 되게 합니다. 사랑은 우리 약함과 선입견의 장벽을 넘어설 수 있게 해줍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 다리를 만들며, 새로운 길을 가르치고, 형제애의 역동성이라는 도화선에 불을 붙입니다. 당신의 아드님 예수님으로부터 그분 계명의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성령으로부터 매일 삶 안에서 그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힘을 얻을 수 있도록, 동정녀 마리아께서 당신 모성애의 전구를 통해 우리를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깊은 바다의 고요함” 
교종, 5월 21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5월 21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과 작별하시기 전에 약속하신 선물에 대해 묵상했다. 교종은 그 선물은 평화이며,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부터 오는 이 평화는 깊은 시련 가운데서도 남아있고 오히려 우리 마음을 웃게 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준다고 강조했다. 강론 내용.

오늘 독서 사도행전이 들려주는 성 바오로가 겪었던 환난과 박해는 요한복음이 들려주는 최후 만찬에서의 고별연설, 곧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겨주신 평화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생각해 봅니다. 박해와 환난의 삶은 평화가 없는 삶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마태 5,11)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박해의 삶, 환난의 삶과 함께 갑니다. 그 평화는 매우 아래, 아주 바닥에 깔려 있는 것으로 모든 것에 비해 매우 깊은 평화입니다. 아무도 앗아갈 수 없는 평화요, 하나의 선물인 평화입니다. 표면은 파도가 일렁대지만 깊은 속은 조용한 바다와 같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평화 안에서 사는 것은 이 깊은 내면의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시련과 어려움, 모든 ‘환난’ 중에도 남아있는 평화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잃지 않고 삶을 어깨 위에 짊어집니다. “마치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처럼 순교의 길로 나아갔다”고 목격자들이 증언할 정도로 평화를 잃지 않았던 수많은 성인들이 어떻게 마지막 순간을 보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야말로 ‘예수님의 평화’의 선물입니다. 그 평화란 예컨대 의사에게 가거나 혹은 진정제를 먹는 등 인간적인 수단으로는 취할 수 없는 평화입니다. 무엇인가 다른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으로부터 오는 평화이며, 그 자체로 용기를 가져다줍니다. 많은 일을 하는 데 익숙해 있던 어떤 사람이 며칠 전 방문했습니다. 그는 병이 겹쳤기 때문에 갑자기 자신의 모든 계획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평화는 우리를 가르칩니다. 예수님의 평화는 인생에서 앞으로 나아가라고 가르쳐줍니다. 견디라고 가르칩니다. 견디는 것, 이는 우리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입니다. 아주 그리스도교적인 말입니다. ‘견디는 것’(sopportare) 그것은 ‘어깨 위에 짊어진다’(portare)는 말입니다. 견딘다는 것은 평화를 잃지 않고, 삶을, 어려움을, 노동을, 모든 것을 어깨에 짊어지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어깨 위에 짊어지고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평화를 주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있을 때에만 우리는 이 말을 깨닫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강하게 신경질을 내고 평화를 잃어버린다면, 무엇인가 작동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평화란 세상에서 오는 것이라거나 ‘은행예금’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약속하신 선물을 마음속에 간직하면 우리는 가장 혹독한 어려움과 맞닥뜨릴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가며 더 큰 능력,‘마음을 웃게’ 만드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이 평화를 살아내는 사람은 결코 유머감각을 잃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웃을 줄 알 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 대해서도 웃을 줄 압니다. 또한 자신의 그늘에 대해서도 웃을 줄 알고, 모든 것에 대해 웃습니다. 이 유머감각은 하느님의 은총에 매우 가까운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의 예수님의 평화, 환난 속에서의 예수님의 평화, 그리고 약간의 유머감각은 우리를 숨 쉬게 만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으로부터 오는 이 평화를 우리에게 주시길 바랍니다. 이 평화는 바로 그분의 평화이며, 인생에서 수많은 어려움을 견디도록, 어깨 위에 짊어지도록, 도와줍니다.


 

 

 

“복음화는 개종주의가 아니라 증거”
교종, 바티칸 외방전교회 지도부에 당부

 

프란치스코 교종은 5월 20일 지난 4월 28일부터 5월 23일까지 로마에서 개최된 제15차 총회에 참석했던 바티칸 외방전교회(PIME) 지도부 등 50여 명 선교사를 접견했다. 교종은 이 자리에서 모든 조직이 ‘현실세계의 복음화를 위한 적합한 수로’가 되도록 계속 선교를 중심에 두라고 권고했다. 또한 교종은 복음화는 “나의 인격 안에서, 행동 안에서,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예수님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를 개종주의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연설 내용.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소명입니다. 만일 그 소명을 받지 않았으면, 집에 남으십시오. 1850년 밀라노에서 시파비아 교구장 안젤로 라마조티 주교에 의해 설립된 해외선교 신학교가 170여 년 긴 역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안젤로 주교님은 비오 9세 교종님의 열망을 이어받아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모든 교구의 공동책임을 원칙으로, 롬바르디아 주교들을 이 단체 설립에 참가시키는 행복한 생각을 품었습니다. 파리에서도 비슷한 단체가 발족됐습니다. 그때까지 선교사도직은 완전히 수도회들 손에 맡겨져 있었습니다. 파리와 밀라노에서 단체가 설립되면서 그 사명은 국경을 넘어 사제들을 파견하기 위해 전 세계를 향해 자신을 개방하는 책임을 맡았던 개별교회에 의해 수용되기 시작했습니다. PIME는 다른 수도회와 마찬가지로 부분적으로만 발전했습니다. 사실, 여러분은 수도자들처럼 서원을 하지 않지만, 확고한 약속을 통해 전교활동에 전 생애를 헌신하고자 스스로를 봉헌합니다. 오세아니아, 인도, 방글라데시, 미얀마, 홍콩과 중국에서 시작했던 초기 선교지역에서 PIME 선교사들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브라질, 아마존, 미국, 일본, 기니비사우, 필리핀, 카메룬, 코스타리카, 태국, 캄보디아, 파푸아뉴기니, 멕시코, 알제리, 그리고 차드 등지로 뻗어 나갔습니다. 이는 ‘사도들의 가족’을 이루는 성 알베리코 크레쉬텔리, 복자 조반니 바티스타 마추코니, 복자 마리오 베르가라 같은 19명의 순교자들을 비롯해 복자 바오로 만나, 복자 클레멘테 비스마라와 같은 고해사제들처럼, 수많은 회원들의 ‘성덕의 빛나는 자취’입니다. 여러분의 선교사들 중 19명의 순교자들은 인간적인 계산을 하지 않고 아낌없이 자신들에게 맡겨진 신자들 때문에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여러분은 ‘사도들의 가족’이요, 삶과 활동을 친교로 살아가는 사제들과 평신도로 이뤄진 국제 공동체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에게서 우리의 사명이 의미를 갖습니다.

성 바오로 6세 교종의 권고 ‘현대의 복음선교’는 공의회 이후 가장 위대한 사목문헌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헌은 “하느님의 아들 나자렛 예수님의 이름과 가르침, 그분의 생애와 약속, 그분의 나라와 신비를 선포하지 않고서는 참된 복음화란 있을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에게서 우리의 삶과 우리의 사명이 의미를 갖습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복음화 사명과 은총은 하느님의 은총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되기 위한 학교는 없습니다. 도움의 손길은 있지만 전혀 다른 일이 있습니다. 곧, 여러분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입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든 아니든 이러한 은총과 소명을 받지 않았다면, 집에 남으십시오. 그 소명은 여러분을 앞으로 나가게 하는 위대한 것입니다. 올해 10월 한 달은 베네딕토 15세 교종의 교서 ‘가장 위대한 임무’ 반포 100주년을 맞아 ‘세례 받고 파견된 이들: 세상선교를 위한 그리스도의 교회’라는 주제로 ‘특별 전교의 달’로 선포한 바 있습니다. 그 목표는 ‘만민선교’에 대한 인식을 일깨우고 새로운 도전을 통해 삶과 사목의 선교적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최근 다시 위험이 나타납니다. 극복한 것처럼 보이지만 또 나타납니다. 곧, 복음화를 개종주의와 혼동하는 겁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복음화는 그곳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입니다. 바로 그분이 매료시키십니다. 베네딕토 16세 전 교종님은 이 때문에 교회는 개종강요가 아니라 매력으로 성장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현존입니다. 그곳에서 현존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그곳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단체를 위해 새로운 회원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겁니다. 바로 그분께서 나의 인격 안에서, 행동 안에서 당신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열어야 합니다. 내 삶을 통해 예수님께 공간을 열어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화입니다. 

올해 PIME 총회 주제는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1코린 9,16) 오늘과 내일의 PIME를 위한 선교의 인원, 장소, 방법”입니다. 여러분이 단체를 세우고 계속 이뤄나가는 선교의 시급성 때문에, 여러분은 가능하면 선교사명을 중심에 두려고 노력합니다. 또한 “평신도나 성직자를 위해서나 유일한 선교소명의 우선성을 재확립할 것, 선교의 환경을 조성할 것, 선교활동으로서 성소사목에 착수할 것, 여러분의 공동체를 검증하고 오늘과 내일의 PIME의 조직을 재고할 것” 등입니다.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관습, 스타일, 시간표, 언어와 모든 교회구조가 현실세계의 복음화를 위한 적합한 수로가 되도록 용기와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선교적 선택을 시작하길 두려워하지 맙시다. 이 점에 관해 성 바오로 6세 전 교종님 권고 ‘현대의 복음선교’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라고 추천합니다. 여러분은 ‘현대의 복음선교’가 공의회 이후 가장 위대한 사목문헌임을 알고 있습니다. 여전히 참신하고, 아직도 효력과 힘을 잃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내용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곧, 복음화의 기쁨입니다. 성 바오로 6세 교종님은 복음을 전하는 이들의 죄에 대한 말씀으로 마지막 대부분을 할애하셨습니다. 성 바오로 6세 교종님이 우리에게 당부하시는 기쁨을 생각하면서 그 부분을 잘 읽으십시오. 여러분 선교사들의 봉사가 고통 중에서도 항상 기쁨으로 이루어지도록 주님께 기도합니다. 
 

 

 

 

“사랑 없이 선을 행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교종, “배고픈 이들에게 음식제공은 해방을 향한 동반”

 

프란치스코 교종은 지난 5월18일 30주년을 맞이한 유럽연합의 이탈리아 푸드뱅크 회원들과 자원봉사자들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 배고픈 이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것은 복지주의가 아니라 해방의 단계를 향한 동반이라고 강조했다. 연설 내용.

지난 30년 동안 가장 가난한 이들의 원조에 ‘해방의 단계를 향한 동반의 첫 번째 구체적 행동’을 기원하며 지속해온 여러분들의 노력은 지성으로 이룬 노력이며, 여기에는 유럽의 연대라는 뿌리가 요구됩니다. 선(善)은 잘 수행되는 게 중요합니다. 순수한 즉흥성, 지성의 필요, 계획성과 지속성의 결과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함께하는 비전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것 없이 선을 행하는 건 어렵습니다. 최근에도 이런 의미에서 여러분의 현실은 구체적인 선 안에서 일치를 찾기 때문에 우리를 유럽의 연대라는 뿌리로 인도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나누기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존엄을 보살펴 주기 위해, 다양한 언어, 믿음, 전통과 경향이 함께하는 것을 보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들은 말없이 많은 메시지를 던집니다. 그것은 자신의 이익을 찾지 않고 미래를 세웁니다. 모든 이의 진보는 뒤처진 이와 동행하면서 성장합니다. 여러분은 낭비의 악순환을 취한 다음, 그것들을 잘 활용해서 선순환시킵니다. 여러분은 어쩌면 나무와 같습니다. 공해를 들이마신 뒤 산소로 돌려주는 나무 말입니다. 낭비는 타인을 버리는 거부 같은 것입니다. 굶주림과 낭비는 보조를 같이합니다. 따라서 하나를 멈추지 않고는 다른 하나를 퇴치할 수 없습니다. 낭비는 사물에 대한 무관심 그것이 부족한 사람에 대한 무관심을 나타냅니다. 낭비는 버리는 것보다 더 신랄한 표현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빵을 나누어 주신 후,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으라고 하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요한 6,12 참조) 다시 나눠주기 위해 모으십시오. 낭비하기 위해 생산하지 마십시오. 음식을 버리는 것은 사람을 버리는 것입니다. ‘가정보호’를 위해 생겨난 경제는 비인간적으로 변했습니다. 인간에게 봉사하기보다는 금융 메커니즘에 인간을 구속하면서 현실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하고, 점점 통제할 수 없게 되어 인간을 노예화합니다. 인간이 숫자로 축소되고, 통계가 얼굴보다 더 많이 나타나며, 인생이 주가지수에 달렸다면 어떻게 우리가 잘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현실에서 공동선을 향한 구체적이고 연대적인 길은 곧, 불의와 다수의 침묵에 반하는 책임의 길입니다. 불안정하게 만듦으로써, 혹은 과거로 돌아가길 꿈꾸며 어떤 것들을 체계화하는 게 아닙니다. 선으로 양육하면서, 건전하고 연대하는 길을 시작하면서입니다. 악이 세상 가운데 있다면 하느님의 도우심과 여러분과 같은 많은 사람들의 선의를 통해 현실을 더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선에 관심을 갖도록 우리가 함께해야 합니다. 더 좋게 바꾸기 원하는 사람을 도와주고, 사회적 평등, 인간존엄, 가정, 젊은이들의 장래, 환경의 존중 등을 토대로 성장 모델들을 장려해야 합니다. 순환경제는 더 이상 보류할 수 없습니다. 대부분의 인류가 침묵하는 가운데, 몇몇 부유한 사람들이 유산으로 남긴 마지막 말이 낭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젊은이들과 함께 하십시오. 젊은이들은 새로운 세대를 향한 희망과 신뢰의 스승이며 좋은 스승입니다,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 싶었던 이 염려와 희망의 감정들을 통해, 여러분에게 새롭게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 선을 장려하는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여러분이 만나는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을 독려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시길 응원합니다. 타인에게 말하는 것은 항상 쉽지만, 타인에게 주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는 것이 핵심입니다.
 

 

 

 

“가장 힘없는 이들의 생명을 보호해야 합니다”
교종, 가톨릭 의료종사자 협회 회원들에 강조

 

프란치스코 교종은 5월17일 클레멘티나 홀에서 창립 40주년을 맞이한 가톨릭 의료종사자협회 회원 300여 명의 예방을 받고 병자는 하나의 숫자도, 기계도 아니며 양심적 거부는 존중과 대화로 수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교종은 또한 가장 힘없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부터 시작해 병자, 노인, 소외된 이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환대받고 돌봄을 요청하는 이들에 이르기까지 생명을 보호하고 증진시키길 바란다고 말했다. 교종은 이것은 대체할 수 없는 봉사라고 강조하면서, 가톨릭의료종사자협회가 의료시스템, 모든 의료종사자들의 근무조건, 의료종사자들이 가장 먼저 돌봐야 하는 병자들과 그의 가족들의 환경개선을 위해 수행한 최근 성과에 대해 감사한다고 말했다. 연설 내용.

최근 수십 년 동안 의료사업과 치료기술의 급격한 전환이 의학과 병자와의 관계를 고려하는 방식을 변화시켰습니다. 의료기술이 놀랍고 예기치 않은 목표에 도달했는데, 이는 점점 더 심각한 윤리적 문제를 야기하기도 합니다. 많은 이들은 의료기술이 제공하는 어떠한 가능성도 윤리적으로 실현가능하다고 판단합니다. 실제로 인간에 대한 모든 의료행위나 개입이 생명과 인간존엄을 구체적으로 존중하는지 먼저 정확히 평가해야 합니다. 오늘날 쟁점이 되는 인간 생명의 온전함을 위험에 빠뜨리는 극단적인 경우에 있어서 양심적 거부는 개인의 윤리적 신념과 다르게 행동하지 않는 개인적 필요에 근거합니다. 이는 환자 자신과 그들 가족뿐만 아니라 우리가 접하는 의료 환경에 대한 신호를 나타냅니다. 양심적 거부행위는 존경심과 함께 수행돼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재촉하는 진실한 동기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는 여러분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멸시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멸시나 자만심의 이유가 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다른 입장에 선 사람들과의 대화가 중요합니다. 아는 체하지 않고 인간의 진정한 선을 추구하는 사람의 관점을 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곁에 있는 이들의 여정에 동반한다는 것 특히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 잊혀진 사람들, 배척 받은 이들을 동반하는 것은 다양한 상황과 그와 관련된 윤리적 선을 깊고 진실되게 이해할 수 있는 최고의 길입니다. 이는 또한 복음을 가장 잘 증거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주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지속적으로 비춰주는 강력한 빛을 사람들에게 투영하는 겁니다.

여러분, 병자들은 숫자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과 접촉하여 하느님을 느끼고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개인, 특별히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병자)이 숫자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 유일무이하고 비길 수 없는 존재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의료 시스템이 점차 자리 잡는 형태를 의식하면서, 병자들을 숫자가 아닌 사람으로 대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비용절감을 위한 합리적인 서비스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민영화는 질병과 병자들에 대한 접근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버렸습니다. 효율성을 우선시함으로써 병자들에 대한 관심은 두 번째 자리로 밀려납니다. 병자들은 정확한 처방과 효율적인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병자들을 경청하고 이해하고 동반해야 합니다. 치유란 단순히 육체뿐 아니라 정신과 신뢰를 회복하고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입니다. 병자는 기계나 공공 혹은 민간 의료시스템에서 조립라인의 부품으로 간주되어선 안 됩니다. 결코 동일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이해하고 돌봐야 합니다. 이러한 형태의 가설과 함께 또 하나의 위험은 의료종사자들이 지나치게 과한 업무와 응급처치에 대한 스트레스, 감정적 충격으로 ‘힘이 소진’되어 숫자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의료종사자들이 합당한 보호를 받고 양성에 대한 권한을 부여받아 단순 대응, 성과와 혁신만이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인 차원을 재발견하고 존중하는 방식인 영성을 특별히 돌보는 것이 특히 중요합니다.

 

 

 

 

“주교는 사제들과 가까이 있으십시오”
교종, 이탈리아 주교회의 총회에서 당면과제 제시 

 

프란치스코 교종은 지난 5월 21일부터 23일까지 개최된 제73차 이탈리아 주교회의 정기총회에서 공동합의성, 주교직 공동체, 혼인무효 선언소송 절차 개정, 주교와 사제의 관계 등을 주제로 연설했다. 교종 연설 요지.

사제와 주교의 관계는 모든 교구 내 관계를 지탱하는 ‘중추’입니다. 주교는 특정 사제에 대한 차별이나 편애, 호불호와 관계없이 자신에게 맡겨진 사제들과 가까이 있어야 할 의무를 지닙니다. 참된 목자는 자신의 양떼 가운데서 살며, 편견 없이 모두를 환대하고 경청하는 법을 압니다. 아울러 우리는 아첨하거나 좋은 말만 하는 사제들만 받아들이려는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수줍어하고 온순하거나 문제가 있는 사제들은 제쳐둔 채 열심하거나 야심가인 사제들에게만 과업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사제들은 일부 동료의 실수나 잘못으로 인해 무례를 경험하거나 웃음거리가 되고 심지어 비난을 받기도 하므로 자신들의 주교에게 지지와 격려와 위로를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부 주교들의 경우 자신에게 맡겨진 사제들과의 관계를 이루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여기서 교회의 사명이 약화되고 그들의 사명도 망치게 될 위험이 생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동합의성’(synodality)’과 ‘주교직 공동체’(collegiality) 사안과 관련해 교회 내에서 모두가 함께 걷고 복음을 나누기 위해 함께 일해야 합니다. 그 복음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삶의 방식입니다. 저는 이탈리아 주교들의 시노드 계획에 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를 위한 첫 단계는 평신도, 성직자, 주교들 모두 교회의 삶을 위한 책임을 공유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 것입니다. 수많은 이탈리아 교구들이 혼인무효 소송절차를 본격적으로 간소화하지 않고 있으며, 보다 사목적이고 소송비용의 과도함을 없애도록 한 개정을 아직도 이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실망스러운 일입니다. 4년이 흐른 지금도 그 개정은 대부분의 이탈리아 교구들에서 적용되는 것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어 보인다는 점을 지적하게 되어 슬픕니다. 저는 지난 2015년 9월 발표한 두 개의 자의교서, 라틴전례를 따르는 교회법(CIC)과 관련한 ‘인자하신 재판관이신 주 예수님’, 그리고 동방전례를 따르는 동방교회법(CCEO)과 관련한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신 예수님’을 통해 혼인무효 선언의 교회법적 절차를 개정한 바 있습니다. 개정의 목표는 혼인무효 소송절차를 간소화하는 한편, 치유를 필요로 하는 당사자 양측을 돕기 위한 것이며 ’가까움’과 ‘서비스 비용’에 기반한 절차상의 개정이었습니다. 상처 입은 가정을 ‘가까이’하는 것은 가급적 판결이 교구 내 본당에서 지연이나 불필요한 연장 없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서비스 비용’이란 복음이 부여한 권한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곧, 여러분은 대가 없이 받았으며, 대가 없이 주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혼인무효 소송절차에 들어가는 비용이 무료여야 한다는 것과 혹은 가능한 무료와 가까운 최소한의 비용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개정된 절차가 이탈리아의 모든 교구에서 즉각적이고 완전하게 적용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개정은 교회는 깨진 사랑으로 상처 입은 자녀들의 선을 마음에 품고 있는 어머니라는 점을 보여줄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장기풍(스테파노)
전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
2006년 은퇴. 현재 뉴욕에 사는 재미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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