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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그날, 모든 교회가 연대했더라면"광주대교구 5.18 순례, 당시 교회 상황 되새겨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13일 5.18민주화운동 순례를 진행했다.

이날 광주대교구 기념미사에 앞서 진행된 순례에는 전국 각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 20여 명이 참석했으며, 망월동 묘역,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시민군 최후 항쟁지인 옛 전남도청 등을 방문해 1980년 당시의 상황과 현재의 모습을 살폈다.

광주대교구 정평위는 “1980년 5월 광주는 인간과 민주주의를 짓밟는 잔인한 폭력 속에서 가장 평화스런 공동체를 만들었다”며, “하느님의 공동체를 이뤘던 그 사건의 현장에서, 인간의 폭력성을 성찰하고 의로움과 참 민주주의를 기억하고 나누기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자 한다”고 순례의 의미를 설명했다.

순례에 앞서 진행된 강연에서 5.18기념재단 김양래 이사가 5.18 당시 교회의 역할에 대해 강의했다.

순례에 앞서 김양래 이사가 5.18 당시 교회의 활동과 역할, 그리고 연대성에 대해 강의했다. ⓒ정현진 기자

“1980년 5월 가톨릭교회가 진실을 위해 연대하고 진실을 밝히는 활동에 동참했다면 상당히 빠른 속도로 세상이 바뀌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는 5.18 당시 광주대교구와 다른 교구가 어떻게 대응했고, 연대했으며, 또 연대의 요청에 응답하지 못했는지 들여다봤다.

당시 광주대교구는 계엄군의 유혈진압만은 막기 위해서, 김수환 추기경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주한 미대사, 계엄군 책임자, 전두환까지 만나 설득했다. 교구 내부에서는 사제와 수도자, 가톨릭농민회와 가노청을 비롯한 평신도 역시 목숨을 무릅쓰고 시민과 함께했다.

이들의 연대와 노력에도 유혈사태를 막지 못하고 5월 27일 전남도청의 비극을 맞았지만, 이후 5.18 연루자로 구속, 수감된 이들의 석방과 희생자 추모, 진실규명과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연대의 시작, 윤공희 대주교와 김수환 추기경의 만남

광주대교구의 대응은 1980년 5월 19일 아침, 윤공희 대주교가 금남로 가톨릭센터 6층 집무실 창문 너머로 시민들이 폭행당하는 상황을 목격하면서 시작됐다. 윤 대주교는 바로 그날 오후 명동성당으로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가 광주의 상황을 알렸다. 이때부터 두 사제는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다급히 움직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21일 전두환과 주한 미국대사, 이희성 계엄사령관 면담을 시도했다. 윤공희 대주교도 광주로 내려가 전남북 계엄사령관 윤흥정 중장, 소준열 소장을 만나 유혈 사태는 안 된다고 요청했지만 결국 공수부대는 이날 집단 발포를 시작했다.

계엄군의 발포로 사태가 절박해지자 광주대교구 사제단도 이를 막기 위해 “폭력과 무기를 사용하지 말자, 대화를 통해 명예로운 수습을 하자, 학생들과 민주인사를 석방하라, 군부는 본무에 복귀하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탱크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계엄사 측은 “사제들이 시내에 장백의를 입고 나오더라도 다른 유탄을 맞을 수 있으니 만일의 사태에 책임질 수 없다”고 답했다.

김양래 이사는 이날 계엄사의 답변은 이미 협상의 여지 없이 발포가 결정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며, 진상 규명의 대상이라고 설명했다.

광주대교구는 22일에도 협상이 이뤄지지 않자 광주의 상황을 알리는 활동에 나섰다. 시민수습위원회에 참여한 김성용 신부는 서울로 탈출해 평신도들과 고립된 광주의 상황을 증언한다. 윤공희 대주교는 5월 24일 성령 강림 대축일 사목서한으로 광주와 전남 전 지역 본당에 5.18을 공식적으로 알렸다.

“광주시민들은 군인들의 천인공노할 만행을 눈으로 보았다. 시위 군중을 다스리는 데 있어 군인들이 사람들을 방망이로 사정없이 난타하고 구둣발로 막 짓밟아서 유혈이 낭자하게 만들어 놓고, 또 그렇게 해서 쓰러진 사람들을 차에 실어가는 것을 보았고, 또 이보다 더 한 것을 수많은 사람들이 목격하였다”(7월 15일, 남동성당에서 봉헌된 미사에서 한 윤공희 대주교 강론)

5월 27일 계엄군의 총성이 수많은 이들의 피를 부른 뒤, 광주대교구에서는 희생자 추모와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시국미사는 6월 2일 목포 북교동 성당에서 시작됐고, 7월 7일 북동 성당 시국미사에 모인 광주교구 사제단은 “마지막 한 사람의 사제가 남을 때까지 뜻을 굽히지 않겠다”고 결의했다. 광주대교구 정평위는 1981년 2월부터 8월까지 남동성당에서 매주 월요미사를, 1982년 12월 24일 구속자 전원 석방까지 시국미사를 매월 진행하고, 구속자 사형을 막기 위해 전두환에게 직접 요청하기도 했다.

또 진실을 알리고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사진과 영상 기록을 입수해 1987년 최초의 광주 사진전을 열고, 김성용 신부의 증언집 “분노보다는 슬픔이”, 광주 참상을 담은 사진집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등을 펴내, 배포한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기록물도 전시되어 있다. 5.18은 2011년 5월 25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국가폭력에 죽음으로 저항한 광주 시민들의 용기와 이에 대한 기록이 세계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책은 광주대교구 정평위가 펴낸 첫 사진기록집이다. ⓒ정현진 기자

이러한 광주대교구의 처절한 대응에 호응한 교구는 전주교구와 부산교구뿐이었다. 당시 전주교구장 김재덕 주교와 사제단은 헌혈할 혈액을 전달하려는 등의 노력을 했지만 막히자 광주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박창신 신부가 괴한의 테러를 당했다.

부산교구는 일본 방송을 통해 소식을 접하고 특별헌금을 실시해 광주에 전달하는 한편, 1987년 광주 사진집을 제작할 때, 제작비 1000만 원을 지원하고 책자를 보급했다.

또 해외에서는 로마에 유학 중이던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우리는 광주 시민들의 외침이 바로 전 국민의 여론과 열망을 대변한 것으로 판단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미국 주교회의 의장은 6월 16일 한국 교회에 “한국 교회의 인권 옹호를 위한 과감한 노력을 지원하겠다”는 서한을 보냈다.

윤공희 대주교, “광주 문제가 나오면 주교들이 침묵해 회의 진행이 어려웠다”

그러나 정작 전주와 부산을 제외한 한국의 다른 교구들은 광주의 소식을 알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알려는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1980년 7월 17일, 광주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유인물을 배포하던 서울과 광주의 사제들이 연행, 구속되자 광주대교구 사제단은 주교회의에 “교회박해로 판단되는 이 난국에 대처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주교회의는 침묵했다.

또 당시 주교회의 의장이었던 윤공희 대주교는 훗날, “적극적 관심을 가진 주교들이 소수이고, 광주 문제가 나오면 주교들이 아예 침묵으로 발언하지 않아 회의를 진행하기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전국 교구의 유일한 연대 활동은 1981년 1월부터 시작된 “사형수 구명 및 석방” 서명운동에 모든 교구장이 참여한 것이다.

김양래 이사는 시민군의 편에 섰던 사제들, 광주대교구 사제단과 신자들의 진실규명 활동, 구속자 석방 운동, 진실규명 의지는 광주대교구가 신군부의 거대한 음모로 시작된 광주항쟁의 진실을 밝히는 데 한 걸음이라도 나아가게 하는 추진력이었다면서도, “그러나 광주항쟁에 대한 당시 주교회의의 침묵, 교회 언론의 침묵은 마음 아픈 오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비폭력 저항에 대한 아쉬움이 있지만, 계엄군이 물러난 뒤 일주일간 광주는 비폭력 평화 공동체를 보여 줬다. 이는 ‘맨몸의 예언자’라는 비폭력 평화 저항 운동의 신념이 그 바탕”이라며, “교회의 역할은 처음부터 항쟁의 조직화에 적극 참여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 이뤄진 활동과 진실을 향한 열정은 제대로 기록되고 기억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망월동 묘역, 5.18민주화운동기록관, 옛 전남도청 등을 순례하고 5.18기념미사로 일정을 마쳤다.

순례 첫 일정은 국립 5.18민주묘지(신묘역) 참배였다. 이곳은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묘역 조성을 발표한 뒤 1997년 완공됐고, 2002년 국립묘지로 승격해, 2006년 이름이 바뀌었다. 이곳에는 5.18 희생자와 그 배우자가 안장되어 있다. ⓒ정현진 기자
민주묘지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있는 망월동 구묘역. 참가자들은 이곳에 묻힌 이들의 삶과 죽음에 대해 듣고 함께 기도했다. ⓒ정현진 기자
1980년 5월, 모든 것을 지켜봤던 가톨릭센터는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 됐다. ⓒ정현진 기자
시민도, 버스도, 택시도 민주화를 염원하는 목소리에 함께했다. 그러나 이들은 민주주의와 평화를 요구했다는 이유로 군부의 총에 쓰러졌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전시된 그날의 사진 기록) ⓒ정현진 기자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전시된 주먹밥을 담아 나르던 그릇. 주먹밥은 광주항쟁의 비폭력 평화 공동체 상징과 같다. ⓒ정현진 기자
5.18민주화운동기록관(옛 가톨릭회관) 6층 윤공희 대주교 집무실 입구의 글귀. 윤 대주교는 5.18 당시 전주교구 사제들을 만나, "강도당한 이를 지나친 사제가 바로 나입니다"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정현진 기자
1980년 5월 19일, 출근한 윤공희 대주교가 금남로의 참담한 상황을 목격한 창문. "이곳 6층 집무실에서 창밖으로 내려다 본 골목에서 계엄군에게 폭행당한 젊은이가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고 응급조치를 해야 할 텐데 생각하면서도 두려워서 실천하지 못했다"는 윤 대주교의 고백이 쓰여 있다. ⓒ정현진 기자
5월 27일 최후의 격전지였던 옛 전남도청. ⓒ정현진 기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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