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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죽거나 혹은 매우 나쁘거나[수도자가 바라본 세상과 교회]

성삼일 전례를 준비하면서 거듭 다짐하고 기도했더랬습니다. 예식이 아니라 의미로서 이 성삼일을, 성주간을 보내게 해 주십사고. 그러나 성목요일, 성금요일, 파스카 성야 미사까지 하루하루 지날 때마다, ‘아, 큰 실수 없이 전례가 끝났다, 내일은 언제부터 준비를 시작해야 하지? 빼먹은 것 없나?’ 하며 긴장을 놓지 못했습니다. 주님께 감사하게도, 함께 준비한 수녀님들께 고맙게도, 전례에 참례한 분들은 성삼일의 은총 속에 잘 머무실 수 있었다 합니다. 그러나 막상 저는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그 기쁨과 축하의 자리가 아닌 길 어딘가를 여전히 뛰어다니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주님 부활 대축일 아침 기도방에 앉아 이 당혹감을 고백하며 기도하고 있는데 문득 그날의 복음이 큰 위로로 다가왔습니다.(요한 20,1-9) 주님을 묻어 봉한 무덤의 돌은 치워져 비어 있고, 이를 목격한 마리아 막달레나는 뛰어가 제자들에게 알리고 베드로와 요한이 뛰어 옵니다. 먼저 도착한 요한은 막상 멈칫, 들어가지 못하고 뒤이어 도착한 베드로가 뛰어 들어간 뒤 따라 들어갑니다. 이 당혹스러움이 가득한 번잡스러움. 뛰어다닌 제자들 아무도 깨닫지 못합니다. 돌아가신 우리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 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요한 20,9) 이 마지막 말씀이 왜 이렇게 위로로 다가오던지요.

(그림1)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달려가 주님이 더 이상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고 말했다’, 제임스 티소, 1896. (이미지 출처 = 뉴욕 브루클린미술관 홈페이지)

이 그림의 긴 제목은 그 자체가 요한 복음 20장 1-2절의 말씀입니다. 단, 원제를 보면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을 ‘예수님과 제자들이 최후의 만찬을 가진 방(Cenacle)’이라 명명한 점이 특이합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예수님이 돌아가신 뒤 공포와 두려움에 싸였던 제자들이 어디에 모여 있었을까, 어디에 있었기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이들을 한 번에 찾아 냈을까’를 고심했던 작가의 표현이라 해석했습니다. 예수님 수난과 죽음의 길을 따라가지 못했던 대다수의 제자들은 그분과 마지막으로 만찬을 나눈 이곳에 멈춰 숨어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살아는 있는지 알 수도 없게 바닥에 널부러져 엉켜 있는 제자들이 모인 방에 문을 박차고 마리아 막달레나가 뛰어 들어오고 이 소란에 그들이 조금씩 깨어나 고개를 드는 동안, 마침 문간 양편에 서 있는 베드로와 요한이 바로 따라 뛰어나갈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 순간입니다.

주님이 곁에 계실 때는 눈으로 보고, 듣고, 함께하며 확신할 수밖에 없었던 그 현존이 처참하게 사라진 이때, 부활에 대해 하신 말씀을 들었어도 상상할 수 없는 철저한 주님 부재의 상태. 이 실망과 무기력, 두려움과 공포, 의심과 불신은 부활 8부 축제 내내 복음 속 제자들의 모습에서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자리들에 나타나 각 제자들에게 필요한 방법으로 부활한 자신을 드러내고 그 의미를 일깨우시는 예수님을 보면서야 저의 이 번잡스러움과 막막함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단지 전례 준비로 인한 긴장과 부산스러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의 죽음과 저의 죽음의 자리에 더 철저히, 깊이 가지 못한 것이 문제의 본질이었습니다. 적당한 고난, 적당한 죽음이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 그러나 나의 사순 시기는 적당했고, 기실 나의 신앙이란 언제나 적당하고 안전한 자리를 찾아 머무른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철저한 죽음이 없는 자리에 부활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최근 읽기 시작한 책의 서문이 떠올랐습니다. “하느님의 부재만큼 하느님을 바라보게 하고 하느님을 절실히 요구하게 하는 것도 없다. 이 체험은 ‘하느님을 원망하고‘ 결국에는 신앙을 저버리게 할 수도 있다.… ‘하느님 없는 세상’을 뼈저리게 체험하지 않고는 종교적 추구의 의미, ‘하느님을 참고 기다리는 일’과 그 세 얼굴인 믿음, 희망, 사랑에 관해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의 의미를 깨닫기 어렵다.”("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 토마시 할리크, 분도출판사) 제가 적당히 머무르는 자리는 하느님이 계시지도 안 계시지도 않는 그 이상하고 야릇한, 거짓된 어딘가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 살면서 그리스도의 죽음도 부활도 없으니 거짓을 사는 것이지요. 신앙은 보이고 들려서 믿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곳에서 ‘기다리고 사랑하며 믿는’ 것이라는 사실을 왜 아직도 새로 깨닫는 것일까요.

주님 안 계신 세상이 힘들어서, 찾아도 찾아지지 않아서, 기다려도 언제 오실지 몰라서, 사랑해도 소용없는 것 같아서, 등등 온갖 핑계 속에 있는 적당한 제 자리를 보니, 부활 팔일 축제 동안의 독서인 사도행전을 통한 제자들의 목소리가 새로 들렸습니다. (그림1)의 자리에 뻗거나 숨어 있던 제자들이 성령을 받아 새로 난 뒤(요한 3,7) 예수님이 하느님이심을 선포하는 자리는 예수님을 죽인 이들이 모인 자리, 예수님이 부재하신 자리입니다. 오히려 거기에서 수많은 이들이 가슴을 치며 뉘우치고,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진정한 믿음이 시작됩니다.

(그림2) ‘빈 무덤’, 미하일 네스테로프, 1889. (이미지 출처 = 피츠버그 카네기미술관 홈페이지)

주님의 죽음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던 여인들의 발걸음을 다시 따라가 봅니다. 아직 동이 트지않은 어둠 속 작은 등불 하나를 밝혀 들고 슬픔과 절망 속에 주님 무덤에 다다른 이들의 앞에 나타난 것은 불 칼을 들고 무덤 돌 위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천사입니다. 천사의 불 칼, 새벽 하늘의 별빛, 그리고 두 여인의 등불은 주님 계시지 않은 세상에서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나누는 작가의 희망이 아닐까 합니다. 러시아의 마지막 종교 화가라 일컬어지는 작가가 담은 이 순간은 이제 이 여인들 앞에 나타나실 부활하신 주님을 예견합니다.(마태 28,9-10)

주님 없는 세상을 대충 견디고 살아가는 ‘적당히 죽고 매우 나쁜’ 연명의 상태가 아니라,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 안에 ‘제대로 죽고 진정으로 희망하는’ 생을 살 수 있길 청합니다. “너희보다 먼저앞서 갈릴래아 가시리라. / 그리스도 부활하심 저희굳게 믿사오니 / 승리하신 임금님 자비를 베푸소서.”(부활 팔일 축제 중 부속가)

하영유(소화데레사)
성심수녀회 수녀
가톨릭대학교 출강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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