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숙 수녀] 4월 28일(부활 제2주일) 사도 5,12-16; 요한 1,9-11ㄴ.12-13.17-19; 요한 20,19-31

교종 요한바오로 2세는 대희년이던 2000년 ‘하느님 자비의 사도’로 알려진 파우스티나 수녀(1905-38)를 시성하고, 이어서 2001년부터 부활 제2주일을 자비 주일로 지내도록 하였다. 이후 ‘자비의 예수상’과 신심기도가 전 세계 가톨릭인에게로 퍼져 나갔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가톨릭 신심에서 비켜나 동양 전통의 ‘자비’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동양에서 자비의 ‘자'(慈)는 상대편의 기쁨(樂)을 헤아리고, ‘비'(悲)는 상대의 고통, 슬픔, 처지에 함께 동참하겠다는 ‘연민’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자비라는 말은 내가 네게 뭔가를 베푼다는 자기중심적 시혜가 아니라 상대가 진정으로 기뻐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살핀다는 것이고, 상대가 고통을 받으면 함께 동참하겠다는 실질적 뜻을 동시적으로 지닌다. 산스크리트어를 보면 자(慈)는 벗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진실한 우정을, 비(悲)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중생의 괴로움에 공감하는 동정, 연민을 뜻한다고 한다. 불교는 자비의 근본을 더욱 발전시켜서 모든 생명체는 물론 무생명체에 이르기까지 차별 없이 세계를 대하는 태도로 확장시켰다.

그러니까 ‘자비’라는 말은 시혜를 품기는 하지만 과시적 목적으로 베푸는 자선이나 선행 따위와는 뚜렷이 구별된다. ‘자비’는 가톨릭 전례에서 주로 하느님을 드러내는 표현이며,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자비’를 사용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왜 그럴까? 나는 그 이유로 신만이 오직 그 한 사람을 온전히 알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신만이 그의 처지를 공감하고, 그의 아픔과 고통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이며, 그래서 신만이 그의 괴로움을 없애려 전력 질주하는 것이다. 신만이 그가 기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찾는 것이고, 신만이 그가 기쁠 때 비로소 기쁠 수 있는 것이다. 신만이 그가 평화롭기까지 불안하며, 그가 안심할 때까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강구 한다. 이 모두는 신만이 그를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신은 저 높은 하늘에서 사람을 내려다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며, 그래서 마침내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고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이고, 사람들과 같은 조건으로, 같은 처지로 살아가신 것이다.(필립 2,7-8) 

그는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혹독한 형벌과 배신, 모욕과 조롱을 견디어 냈으며, 급기야 인간세계로부터 제거되는 일까지 당했다. 이런 신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대체 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지에 대한 놀라움, 가없는 질문밖에 없다. 그래서 그의 짧은 공생활은 전체가 자비를 태우는 치열한 현장이 된 것이고, 그의 삶 자체가 자비를 빼놓고서는 해명불가한 신비가 된 것이다. 예수부활은 이 ‘자비’의 궁극적 승리며, 알파요 오메가이고,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그를 기억하고 살아나게 한 사건이 되었다.

십자가와 부활. (이미지 출처 = Pixabay)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이런 일을 체험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누군가가 나에게 자비를 베풀겠다고 하면 대놓고 불쾌할 것이 뻔하다. ‘자비’는 인간 사회에서 아주 낯설고 이상한 언어가 된 것이다. 더욱이 오늘날의 사람들 사이에서 지켜야 할 금도는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닌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말은 공공연한 에티켓이고 문명화된 사람들의 불문율이다. 누구든 주고받는 일을 정확히 해야만 하는 것이고, 모든 만남의 셈법은 ‘더치 페이’로 이루어지며, 이익이 나지 않는 시간과 노동의 투자는 악덕으로 취급된다. 자본이 통치하는 세계에서 자본을 함부로 낭비하는 일은 범죄(?)이며, 관계의 우선적 원칙은 나에게 손해 나는 일은 없는지 살피는 것 그것뿐이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다. 양분된 관계, 주체와 객체가 명확히 갈라져서 서로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었으니, ‘자비’는 영원히 이상한 나라의 언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는 철저히 “되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을 하느님나라의 원칙으로 세웠다. 서로 주고받는 일은 세리나 이교도들이 하는 짓으로 치부했다.(마태 5,46-47) 자비하신 하느님의 자녀들은 누구든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완전성’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비’에서 찾아야 한다고 가르친다.(5,48) 그래서 예수가 취한 자비에는 경계가 없다. 그 자신이 스스로 버림받은 자가 되어, 자비를 구하는 자로 남았기 때문이다.(25,35-36) 그가 우리에게 남긴 가르침은 차별된 견해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깨닫고, 자신이 베풀고자 하는 사람을 직시하며, 무엇을 마주하더라도 헛된 환상이나 셈법에 동요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야 기꺼이 타자의 고통을 껴안을 수 있으며, 그가 기쁜 일이 내 기쁨이 되며, 급기야는 그와 나의 경계마저 허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부활 이후 드디어 사도들의 시대가 열렸다. 다락방에 갇혀서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이 예수부활을 목격한 이후 모두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에서 ‘예수부활’을 경험하고, 믿었다. 그들이 하는 모든 행동은 실로 감동적이었다. 그들은 마치 예수가 다시 살아 돌아온 것처럼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예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실의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그들의 모습을 보고 되살아나기 시작하였다. 사도행전은 이 사실을 이렇게 기록한다.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백성 가운데에서 많은 표징과 이적이 일어났다. 그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솔로몬 주랑에 모이곤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그들 가운데에 끼어들지 못하였다. 백성은 그들을 존경하여,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병자들을 한길까지 데려다가 침상이나 들것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의 그림자만이라도 누구에겐가 드리워지기를 바랐다. 예루살렘 주변의 여러 고을에서도 많은 사람이 병자들과 또 더러운 영에게 시달리는 이들을 데리고 몰려들었는데, 그들도 모두 병이 나았다.”(사도 5,12-16) 아멘.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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