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우 신부] 4월 19일(주님 수난 성금요일) 이사 52,13-53,12; 히브 4,14-16; 5,7-9, 요한 18,1-19,42

파스카 성삼일, 그중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는 성금요일에 등장하는 요한 복음의 수난기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등장하는 다른 공관복음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 복음의 첫 장소에서부터 수난 예식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키드론’ 이라는 말은 ‘혼탁한’, ‘어두운’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어둡고 혼탁한 계곡을 지나, 당신 수난의 여정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이 키드론 골짜기는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을 상징합니다. 이 혼탁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한 수난이 시작되는 곳이 바로 그 골짜기입니다. 그러한 키드론은 우리의 마음을 상징합니다.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도중, 수많은 유혹과 도전을 뿌리치지 못한 채 순간순간 넘어지고, 그리하여 때 묻고 어두워진 우리들의 삶, 우리들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런 우리 마음을 관통하여 주님은 당신 수난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크고 작은 키드론 골짜기를 지나 예수님은 우리를 향한 사랑의 수난 길을 걸어가십니다.

그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은 저항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표현대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이사 52,7) 그 길 위에 서 계십니다. 그리고 그 수난의 여정 끝에는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그 십자가는 아름답고 깨끗한 나무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십자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어 합니다. 그래서 그 거친 나무를 미화시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미화해서는 안 됩니다. 있는 그대로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가장 비참한 죽음을 의미하는 십자가를 그 뜻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피가 흐르고 참혹한 십자가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부활의 기쁨을 오롯이 느낄 수 있습니다. 그 피 흐르고 처참한 모습의 십자가를 피해서는 안 됩니다. 피 흐르고 거친 나무의 모습을, 그 참혹한 주위 환경과 조롱들을 곧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십자고상. ⓒ노바

예수님의 자기 비움은 결국 이 비참한 십자가 죽음으로 귀결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분의 죽음을 포장하거나 억지로 꾸며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를 다른 그림으로 바꾸려 해서도 안 되고, 십자가를 외면하고 싶은 마음에 다른 것들로 꾸며서도 안 됩니다.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애써 외면하려는 우리의 시선도 십자가를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부활의 기쁨, 그 은총을 누리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쳐다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내 자신을 솔직히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 또한 절실히 필요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께서는 입고 있는 옷마저 빼앗긴 채 모든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죽음의 순간을 가리거나 덮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가리어지지 않고 드러날 때 부활은 투명하고 밝게 있는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기에 우리 역시 우리 자신을 가리려 하지 말고, 덮으려 하지 말고 솔직한 우리 모습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나 자신을 제대로 알고, 그분의 부활의 기쁨을 제대로 느낄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그 놀라운 신비가, 인간의 방식인 죽음의 신비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가장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원천을 발견합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과 성찬 전례의 원천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파스카 신비를 통하여 당신을 내어 주신 바로 그 사건”(베네딕토 16세 교황권고, ‘사랑의 성사’, 34항)입니다. 신비롭게도 다른 기적이나 영광스러운 순간이 아니라, 가장 비참하고 낮은 자리, 심지어 당신 목숨을 내어 놓으시는 그 극적 자리에서 우리는 우리 믿음의 첫자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 외치셨던 마지막 말씀인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라는 말씀은, 다름 아닌 당신을 내어 주시는 그 사랑의 결정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우리는 키드론 같은 우리 마음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더럽고 피 묻은 십자가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한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는 용기와 더불어 찢기고 상처 난 내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용기 역시 얻을 수 있습니다. 그 용기를 하느님께 청합시다. 수난의 고통이 있어야 부활의 기쁨이 오기 마련입니다. 그분의 고통과 죽음을 애써 피하려 하지 말고 키드론과 같은 내 마음속에 받아들이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부활의 빛이 내 마음속에도 찾아올 수 있도록 나를 위해, 그리고 우리 서로를 위해 함께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유상우 신부(광헌아우구스티노)

천주교 부산교구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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