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교회의, "깊은 유감", "출산 선택 여성 지원 강화"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라고 결정했다.

1953년에 형법이 제정되며 낙태죄가 규정된 지 66년, 2012년 헌법소원에서 합헌 판결이 내려진 지 7년 만이다.

형법 제269조 1항과 제270조 1항에 대한 헌법소원 심판 선고기일인 11일, 헌재는 재판관 4명 헌법불합치, 3명 단순 위헌, 2명 합헌 의견에 따라 현행 낙태죄는 '헌법불합치'라고 선고했다.

'헌법불합치'와 "단순 위헌"은 둘 다 위헌 결정이지만, '헌법불합치'는 해당 법조항이 즉각 중지될 경우 법 공백에 따른 사회적 혼란을 고려해 법개정 시한을 두는 것이고, '단순 위헌'은 판결 즉시 해당 법률이 정지된다. 따라서 이번 결정은 7대2로 낙태죄가 위헌이라 본 것이다.

헌재는 현재의 낙태죄 처벌 조항이 사실상 낙태(임신중지)를 전면 금지함으로써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지나치게 침해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낙태 허용 사유에 사회적, 경제적 이유를 추가하도록 했다. 현재 모자보건법(제14조)은 우생학적,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 전염성 질환이 있을 때, 강간과 준강간, 근친상간으로 인한 임신일 때와 임신을 지속하면 산모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칠 때에만 임신 24주 이내에서 낙태를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다.

헌재는 또한 임신중지가 가능한 시기는 임신 22주 내외까지로 봤다. 대체로 이 시기가 지나면 태아가 산모의 몸 밖에서 홀로 생존할 수 있다고 본다. 한편 '단순 위헌' 의견을 낸 재판관 3인은 이에 동의하면서도, 임신 14주까지는 특별한 사유가 없어도 자유롭게 낙태를 할 수 있다고 봤다.

헌재는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라 2020년 12월 31일까지 관련 법률을 개정하라고 국회에 주문했다. 이에 따라 관련법 개정 시한인 2020년 말까지 현행 낙태죄 처벌은 유지되며, 국회에서 개정하지 못하면 2021년 1월 1일부터 낙태죄 처벌법은 폐기된다.

헌재 판결 뒤,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변호인단 김수정 변호사는 “헌재는 오늘 현행 자기낙태죄 조항은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는 위헌적인 조항이라는 위헌 결정을 했다”고 밝혔다.

이번 판결에 대해 그는 “태아의 생명 보호 의무도 국가의 중요한 명제이지만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보장되지 않는 한 태아의 생명 보호마저도 실질적으로 보장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위헌 쪽으로 손을 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더 이상 여성을 의심하고 규제하고 처벌함으로써 출산을 강제하지 말라는 내용이 판결에 명백히 나와 있다”면서 “임신과 출산, 양육에서 1차적 주체는 여성이다. 여성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존중하라는 것이 이번 헌재 판결의 선언이며 이에 걸맞게 앞으로 입법이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11일 낙태죄 헌법불합치 선고 뒤, 이번 헌법소원의 변호인단인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의 김수정 변호사가 판결 취지를 설명했다. ⓒ김수나 기자

헌재는 지난 2012년에는 태아의 생명권에 무게를 실은 것과 달리, 이번에는 여성의 건강권, 행복권의 손을 들었다.

헌재는 판결문에서 “(낙태 처벌은) 태아의 생명보호라는 공익에 대해서만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우위를 부여해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것이며, 여성에게만 죄를 물어 평등권도 침해한다”고 했다. 또 낙태한 여성을 처벌하는 것이 상대 남성이 여성을 압박할 수단이 될 수 있다고도 봤다.

이번 헌법재판소 결정은 지난 2017년 2월 한 산부인과 의사가 낙태에 대한 형벌을 규정한 형법 269조와 270조가 헌법상 보장된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며 낸 헌법소원에 대한 결과다.

형법 제269조 1항과 2항에서는 “부녀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부녀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아 낙태하게 한 자도 1항의 형과 같다“고 규정한다.

2012년에  헌재는 낙태로 처벌받은 한 조산사가 형법 270조가 위헌이라며 낸 헌법소원에 대해 합헌이라고 결정했었다.

당시 헌재는 생명에 대한 권리는 "기본권 중의 기본권“이라며, ”낙태를 처벌하지 않거나 형벌보다 가벼운 제재를 가하면 현재보다도 훨씬 더 낙태가 만연하게 되어 자기낙태죄 조항의 입법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했다. 또 ”태아에게도 생명권이 인정되어야 하며, 사익인 임부의 자기결정권이 태아의 생명권 보호라는 공익에 비하여 결코 중하다고 볼 수 없으므로 자기낙태죄 조항은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봤다.

주교회의, 낙태가 정당화될 수 없는 행위라는 입장 변함 없다

이날 판결 직후 주교회의는 즉각 입장문을 내고 헌재 결정에 유감을 표하며, “낙태가 죄이며,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행위라는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주교회의는 “이번 선고는 수정되는 시점부터 존엄한 인간이며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는 존재인 태아의 기본 생명권을 부정할 뿐 아니라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 고착시키고 남성에게서 부당하게 면제하는 결정”이라고 했다.

또, “법률상 낙태죄가 개정되거나 폐지되더라도, 교회는 생명을 낳아 기르기로 결심한 여성과 남성에 대한 지지와 도움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며, “또한 낙태로 정서적, 정신적, 신체적으로 큰 상처를 입고 화해와 치유를 필요로 하는 여성에게도 교회의 문은 열려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를 위해 주교회의는 입법부와 행정부에 생명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 법과 제도의 도입을 강력히 촉구했다.

11일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낙태죄 폐지 반대 전국연합' 회원들. 이날 낙태죄 페지를 반대하는 77개 단체가 모였다. ⓒ김수나 기자

가톨릭여성연구원 박은미 대표는 판결 직후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사회법이 바뀌었다고 해서 교회가 낙태가 죄라는 판단에 변화를 줄 수는 없을 것”이라면서도, “다만 앞으로는 낙태를 죄라고 강조하는 것을 넘어 성이 얼마나 좋은 하느님의 선물인지, 지평을 넓히고 긍정적 태도로 교육하고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교회의 생명수호 운동은 지금까지 낙태 반대 중심이었고 이는 너무 좁은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것”이라면서, “교회의 생명운동 지평도 넓어져야 한다. 현재의 생명수호운동의 핵심은 폭력과 혐오”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위헌 결정은 낙태를 자유롭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낙태가 불법인 상황에서 건강을 비롯해 여성을 보호하는 차원”이라며, “교회가 그런 측면에서 여성에 대한 실질적 배려, 염려, 보살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가톨릭대 생명대학원장 정재우 신부는 이번 선고로 법적인 상황은 달라졌지만 교회의 입장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보다 적극적으로 잉태된 생명과 임신한 여성을 지지하고 동반하기 위해서 관심을 갖고 책임을 함께 짊어지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 신부는 이번 헌재 판결이 여성의 권리 측면을 강조한 것에 대해서는 “여성의 건강권이나 결정권, 태아의 생명권은 분리할 수 없는 문제”라며, “여성이 앞으로의 삶을 위해 낙태를 결정하는 것은 희망이 아닌 절망의 선택이다. 결국 행복과 희망은 낙태를 선택하지 않는 것에 있다”고 말했다.

다만 정 신부는 이를 위해 남성의 책임을 강하게 인식시키고 미혼모 등 출산을 선택한 여성에 대한 지원에 관심을 갖도록 정부와 사회에 요청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교회의 낙태반대 운동과정에서 공론화 기회가 없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번 판결을 공론화의 계기로 삼겠다”며, “낙태죄를 둘러싼 논쟁 안에서 첨예하고 선명한 구도가 생기면서 다른 의견을 듣고 담을 수 없었다. 기본 방향을 잃지 않으면서도 구체적이고 세세한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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