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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부활의 반복[강신숙 수녀] 4월 14일(주님 수난 성지 주일) 이사 50,4-7; 필립 2,6-11; 루카 22,14-23,56 또는 23,1-49

사순시기는 붕괴의 시기다. 사순시기는 인류가 ‘실재’라 믿고 있는 이 세계의 토대가 ‘환상’에 기반해 있음을 알게 하는 시기다. 사순시기는 실로 잔혹한 시기다. 그동안 믿고 싶었던 안락한 둥지와 작은 성공들, ‘혹시’ 내일은 다르지 않을까 기대하게 만드는 무수한 선전들이 실제로는 착시로 가려진 거짓임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수난시기가 혹독한 이유는 약간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은 채 완전히 허물어 버리는 데 있다. 

토대가 환상인데 남겨 둘 여지가 있을 리 없다. ‘남겨 둔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내가 깔고 앉은 방석이 내 노력의 결실이고, 능력이라고 믿고 싶겠지만, 피땀 흘려 지었다는 신전은 알고 보니 결국 ‘이교도’의 신전이었을 따름이다. 이런 사실에 눈뜬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우리’들은 잠들어 있거나, 다시 깨어나고 싶어 하지 않거나, 자신의 신념이 실패한 사실이 되었다는 것에 분개한다. 우리는 그렇게 일러준 자를 두고 볼 수 없다. 그래서 니체가 따로 ‘신의 죽음’을 선언하기도 전에 항상 그런 신은 죽어야 했던 것이다.

예수가 사명 수행 내내 타협하지 않고 고수했던 “하느님과 제물(이교신)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는 태도는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능한 제물에 온갖 ‘종교’스러운 포장을 해 왔다. 지위든, 명예든, 학식이든, 모든 합법적 권력, 전례, 신학, 전통, 관습….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그런 것은 모두 ‘역겹고, 견딜 수 없는 것들’이다.(이사1,13) 그래서 예루살렘 입성 후 예수가 취한 첫 번째 행동이 성전에서 이 모두를 쓸어버리는 일이었다.(마태 21,12)

오늘 루카의 수난 복음이 전하는 예수의 긴 죄목은 그가 “메시아”, 곧 이스라엘의 왕으로 행세한 죄, 백성을 선동한 죄, 로마에 복종하지 않은 죄다.(루카 23,2) 예수의 죄목은 오늘날의 언어로 바꿔 말하면, “반체제자, 내란 선동자, 불순분자”에 해당하는 1급 중범죄인 것이다. 특히 이스라엘의 최고 권력자인 종교가들을 위협하고 하느님을 모독하였으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정면 타격한 것이니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예수는 유대인들의 정통교리를 훼손한 ‘이단자’였다. 예수는 그러잖아도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내는 데 입지가 좁아졌던 지도자들에게 이스라엘을 결집시키고 재정비하는 데 딱 좋은 사냥감이었다.

예수는 사람들의 환상을 충족시키기 위한 어떤 여지도 남겨 두지 않았다. ‘예루살렘의 여인들’을 상징하는 모든 애도적 시도는 예수가 보여 준 냉정한 태도로 인해 무산되었다. 사순시기가 되면 내거는 자색포도 우울한 표정도 그의 말을 빌리자면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는 단식을 표방하는 유대인들의 위선에 신물을 냈다. 오죽하면 “단식할 때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오히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마태 6,16-18)라고 했겠는가. 그는 사람들이 믿고 싶은 대로 자신의 존재(정체)를 위반하는 일은 어떤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이콘.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그렇게 누구도 그의 수난과 죽음을 되돌리거나 막을 수는 없었다. 인류에 충격을 안긴 이 사건은 오늘날까지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으로 남아 있다. 신이 죽다니! 일찍이 사도 베드로 역시 예수가 죽는 사태만큼은 막아 보려고 애를 썼다. “베드로는 예수를 꼭 붙들고 ‘주님!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며 반박하였다.”(마태 16,22) 다른 제자들 역시 끝까지 직면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어 회피했다. 성경은 제자들의 부정과 회피, 침통한 현실을 가감 없이 전한다.

교회 역시 ‘부활과 승리’로 이 엄혹한 사실을 비호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 직후에는 유대인에 의해서, 이후엔 예수가 사람일 리 없다는 가현설(영지주의)에 의해서, 또 그 반대로 ‘신’일 리 없다는 온갖 주장들로 인해서 수 세기 동안 교회는 예수를 두고 거대한 토론장으로 전락해 왔다. 신은 죽을 수가 없는 존재이므로 ‘죽은 체’한 것이 되었고, 신은 죽을 리 없으니 ‘사람’인 것이 분명하다고 했다. 교회는 이 모든 이단에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지켜내야 했고, 그가 사람이자 신임을 입증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렇게 해서 그 유명한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 완성되었다. 이 위대한 신경은 애지중지 보존되고 방어되어서 오늘에 이른다. 수년 전부터 교회는 어쩐 일인지 간단하게 낭송하던 짧은 사도신경과 복잡하고 긴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혼용해서 낭송하게 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라도 교회는 ‘신성과 인성’을 보존한 ‘하나이며,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보편적 교회’임을 장엄하게 선포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사실 이 역시 그리 애쓸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결국 사람들을 깨어나지 못하게 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 자들은 자신이 믿는 세계의 환상에서 깨어나야 하고, 예수처럼 실패할 운명을 짊어져야 한다. 이것이, 예수의 수난과 죽음이 인류사에 유래 없는, 어느 종교의 신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 된 연유다. ‘찢어진 휘장’(마태 27,51)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 그런 그가 죽고 난 뒤, 부활을 통해 되살아나는 그의 메시지는 2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사형 언도와 처형을 반복해서 당하고 있다. 수십 억의 빈곤자들과 온갖 이유로 차별과 모욕을 당하는 이들과 파헤쳐진 지구의 얼굴로 신음하고 있다. 그는 이 얼굴들을 억압하고 지우고 가리는 수많은 시도로 인해 죽어 가고 있으며, 여전히 그들의 얼굴로 부활하고 있다. 죽어서 내쫓긴 이들이 제자리로 살아 돌아올 때마다 우린 그의 부활을 경험한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신경’에 가둘 수만은 없는 이유다.

강신숙 수녀

성가소비녀회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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