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4월 14일(주님 수난 성지 주일) 이사 50,4-7; 필리 2,6-11; 루카 22,14-23,56

군중은 나뭇가지를 손에 들고 주님을 환영한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곧 주님은 죽음의 판결을 받게 될 것이다.

뒤를 돌아보지 않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이야기들은 복음서에서 가장 오래된 이야기들이고 부활의 빛으로 조명하며 읽어야 한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통에 대하여 분명한 말로 이야기해 주는 루카의 증언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분의 땀은 핏방울이 되어 땅에 떨어졌다.”(루카 22,44) 우리는 이 부분을 우리가 예수님의 고통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았으며 또한 아버지의 뜻에 그분이 따르고 있다는(23,46) 느낌 없이 읽을 수가 없다. 루카의 설명에는 우리로 하여금 그 범위를 분명히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두 개의 성서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겟세마니에서의 기도', 비틴가우어 제단의 화가. (1380-90) (이미지 출처 = en.wikipedia.org)

이사야서에서 뽑은 말씀은 야훼의 종의 세 번째 노래로 간주되며, 구약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모습들 가운데 하나(혹은 첫 번째 모습)로 여겨진다. 예레미야와 비슷한 모습으로, 예언자는 우리에게 그의 성소에 관해 말해 준다. 그의 성소는 하느님이 먼저 주도하시며, 그의 사명은 지친 이들을 격려하는 것이다.(이사 50,4) 우리는 제2이사야의 특징인 위로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예언자에게, 위로하는 것은 해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귀를 기울이는 능력을 요구한다.(50,4) 주님께서는 그분이 보낸 이의 귀를 열어 주시어 용기를 잃어버린 이들의 고뇌와 항의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신다.(50,5) 사명을 수행하면서 그가 받는 어려움은 그를 거역하게 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게 하지도 않는다.(50,5) 그는 주님께서 그를 도와주신다는 것을 알고 신뢰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렇기에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이사 50,7)

오늘의 전례는 예수님에게서 이러한 느낌들을 받게 한다. 그분은 위로하기 위하여 또한 해방하기 위하여 오신다. 그분의 고통과 죽음은 그분을 위협하거나 사명에 종지부를 찍을 수 없다. 아버지께서 그분과 함께 하신다.

자아를 비우기

바오로의 구절은 우리에게 아름답고 잘 알려진 그리스도 찬미가를 들려준다. 찬미가의 기본 주제는 그리스도의 겸손함과 섬김의 의지다. 하느님의 아들은 그분의 특권에 매달리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 중의 하나가 되기 위하여 그분 자신을 비운다. 그래서 밑으로부터, 사명을 성취하기 위하여 십자가의 대가를 치루면서 그분은 우리에게 충만한 생명을 준다. 그러므로 모든 혀가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고”(필리 2,11) 선포할 것이다.

찬미가를 시작하기 전에, 바오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필리 2,5) 지니라고 초대한다. 다시 말하자면,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의 증인들로서 우리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하여 특권의 조건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비인간적 조건 속에 살고 있다. 심각한 고립 속에서, 말할 수 없는 황폐 속에서 살고 있다. 그들과 연대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고 모든 교회에 피할 수 없는 의무다. 이 연대는 위로부터 주는 것이 아니라 평형적인 나눔이다. 점점 더 악화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임시변통하는 역할이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영속적 투신을 하는 연대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길이다.(필리 2,10)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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