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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권 환수의 '관건'을 생각한다[시사비평 - 변진흥] 핵심은 '한반도 문제의 한반도화', 4.11 문재인-트럼프는 묘책 찾을 수 있을까

지금부터 50년 전인 1969년 7월 25일에 발표된 닉슨 독트린. 그것은 미소 냉전이란 도식과 개념을 동서 데탕트로 바꿔 놓은 현대사의 큰 변곡점이었다. 그 훈풍에 힘입어 동서 해빙기류가 형성됐고, 한반도에서도 '한반도문제의 한반도화' 정책이 공식화됐다. 비록 남북한 당사자 수준에서는 준비가 부족했지만, '7.4남북공동성명' 발표를 통해 남북대화의 문을 열어 놓게 만들었다. 한반도문제의 한반도화, 그 첫걸음이었다.

20년 뒤인 1989년 9월 11일, 노태우 대통령은 국회에서 특별연설을 통해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을 발표했다. 민족공동체헌장 채택-남북연합-통일헌법 제정의 3단계를 거쳐 통일민주공화국을 건설한다는 단계적 접근 방식의 통일방안을 공식화한 것이다.

이는 우리 스스로를 냉전의 도식인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만든 한반도문제의 한반도화, 그 두 번째 도약이기도 했다. 훈풍의 여파는 남북고위급회담을 거쳐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을 이끌어 냈고, 남북 유엔 동시가입도 성사시켰다.

만약 이때 여세를 몰아 한반도 주변 4강의 남북한 교차승인과 북미 관계개선을 가져왔다면, 한반도문제의 한반도화 환경 조성은 결실을 맺었을 것이다. 비록 그 결실을 맺지는 못했지만, 이 흐름 속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1991년 11월 22일에 담대하게도 "오는 1995년까지는 평시작전통제권을 대한민국 국군이 넘겨받고, 2000년까지는 전시작전통제권도 대한민국 국군이 이양받는다는 것이 큰 방향"(<서울신문> 창간 특별회견) 임을 밝혔다.

실제로 대한민국 국군은 1994년 12월 1일 0시를 기해 평시작전통제권을 주한미군으로부터 이양받았다. 이처럼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환수문제는 한반도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자율적 결정권의 이정표나 다름없다.

잘못 끼운 첫 단추 

전작권 환수를 둘러싼 논란의 중심은 한미동맹이다. 한미동맹의 균형추가 미국의 손안에 있기 때문이다.

1950년 7월 14일 대한민국 국군의 평작권과 전작권이 유엔군에 이양됐다. 그러나 44년 만인 1994년에 한국군이 작전통제권 가운데 평작권을 돌려받게 됐을 때에는 이를 유엔군으로부터 돌려받은 것이 아니라 주한미군으로부터 이양받았다. 1975년 제30차 유엔총회에서 공산진영이 제출한 유엔군사령부의 조건 없는 즉각 해체 결의안이 자유주의 진영의 남북대화의 계속 촉구 결의안과 함께 동시 통과되자 미국은 유엔군사령부를 대신해 1978년에 한미연합군사령부를 설치하고 주한미군사령관이 한미연합군사령관을 겸임하면서 작전권을 행사하는 지휘체계를 수립했기 때문이다.

사실은 평작권도 온전한 형태로 돌려받은 것이 아니었다. 당시 한국군의 전력 미비 등을 이유로 평시작전통제권 가운데 작전수립계획, 연합정보관리, 연합위기관리, 연합연습, 교리발전, C4I 운용성 등 연합권한 위임사항(CODA, Combined Delegated Authority)으로 불리는 6대 권한은 연합사령관에게 유보됐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것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이유인즉 평작권 환수로 평시작전과 전시작전이 분리되는 현상이 문제점으로 대두됐고, 한미연합사령관의 전시임무 수행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평시에도 이를 연결하는 데 필요한 권한을 행사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평작권을 돌려받으면서도 군사작전 수행 능력의 골격을 이루는 6대 사항은 미국에 의존하게 되는 불완전한 해결을 가져왔다. 어느 국가든 평시에 전시를 대비해야 하는데, 대한민국에는 이를 대비하는 자율적 군정권 행사가 계속 유보된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평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제2의 창군', '자주국방의 기틀을 확고히 하는 역사'로 치장했다.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은 작전권 환수를 제2의 창군이라고 했다. (사진 출처 = MBC뉴스 동영상 갈무리)

한반도 문제의 '국제화' 

평작권 환수로부터 전작권 환수로 이어지는 한미관계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은 한반도문제의 국제화를 유도해 왔다. 이를 촉진시킨 것이 북핵 위기 조성이다. 베를린장벽 붕괴(1989.11.9.)와 동서독 통일(1990.10.3.) 그리고 구 소련 붕괴(1991.12.26.)로 이어진 탈냉전의 가파른 호흡은 한반도에서도 주한미군 감축과 한미연합사 해체를 검토하는 등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 재검토 필요성을 부각시켰다.

더욱이 남북한이 고위급회담을 통해 남북기본합의서 채택(1991.12.13.)과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1991.12.31.)을 발표하는 등 주도적으로 한반도문제의 한반도화를 진행시켜 나감에 따라 미국은 동서냉전 종식에 따른 세계전략을 재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맥락에서 한반도문제의 국제화를 가시화하기에 이른다.

그 출발점이 필리핀이었다. 필리핀의 경우, 1991년에 미군주둔협정 기간이 만료되면서 반미시위가 격화돼 1992년에 완전 철수가 이뤄짐에 따라 태평양 방어선 유지를 위한 주한 미군의 전략적 중요성은 오히려 증대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이에 따라 한미 양국은 1991년부터 주한미군 주둔 비용에 관한 방위비분담을 위한 특별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한반도문제의 한국화의 환경 조성을 위한 주한미군 철수가 아닌 한반도문제의 국제화를 위한 방위비분담으로 패턴의 전환이 이뤄진 것이다. 그 견인력이 바로 한미동맹이다.

한미동맹의 절대적 명분은 북한으로부터의 군사적 위협, 그리고 이로 인한 한국의 안보불안이다. 그렇지만 미국의 군사전문가 제임스 F. 더니건은 "현대전의 실제"(How to Make War, 현실적 지성, 1999)란 책에서 세계 각국의 군사력을 양과 질적으로 판단해 국가 순위를 매겼다. 이 자료에서 한국은 미국과 중국, 러시아의 뒤를 이어 4위를 차지했다. 그는 1995년 기준으로 북한의 전투력을 한국의 약 40퍼센트 수준으로 평가한 바도 있다.

한국 국방부는 2004년에 노무현 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를 통해 한국군이 주한미군과 본토 미군의 증원 없이 단독으로도 북한과의 전면전에서 승리한다고 결론지었다. 물론 미국의 핵우산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핵우산은 이미 닉슨 독트린에서 보장한 것이다. 2009년 9월에 국방부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 역시 주한미군과 본토 미군의 증원군 없이 북한과의 전면전에서 승리한다고 장담했다. 이 보고서에는 한국의 예비군 동원도 제외시켰다. 그렇지만 전작권 환수 이슈가 등장할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등장하는 것이 '한국의 안보 불안'임을 어쩌겠는가.

북한의 핵무장력 완성 선언은 한국의 안보 불안을 극대화시키면서 한반도 문제의 국제화를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북한의 6차 핵실험(2017.9.3.)과 신형 ICBM인 화성 15호 시험발사(2017.11.29.)로 북핵 위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린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더 이상의 한반도 문제의 국제화를 차단하기 위해 조선노동당 중앙위 제7기 3차 전원회의(2018.4.20.)를 통해 핵무력, 경제건설 병진노선에서 경제건설 총력노선으로 전환 선언과 함께 '핵,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 동결'을 선언한다. 이후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에서의 종전선언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총력을 집중해 오고 있다.

그러나 이미 남북한의 역량으로는 한반도문제의 국제화 흐름을 되돌려 놓기에 역부족인 형세다. 4.27판문점선언과 9.19평양공동선언 그리고 남북군사합의마저 미국과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장벽을 넘지 못하고, 북미 하노이 2차 정상회담을 노딜로 귀착시킨 것이 바로 오늘 한반도 문제의 현주소이기 때문이다.

2018년 4월,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핵,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 동결을 선언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가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 갈무리)

기울어진 운동장 바로잡기(level playing field)

초등학교 시절 학교운동회의 대미를 장식했던 전교생 줄다리기 경기는 삼판양승제로 진행되곤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첫 번째 판에서 이긴 편이 항상 마지막 판에서도 승리했다. 처음에는 원인을 몰랐는데 점차 운동장 구조에 함정이 있음을 알게 됐다. 그래서 무엇보다 먼저 양 팀의 위치를 정하는 동전 던지기에 목숨을 걸었던 경험이 생각난다. 아예 체육 선생님이 위치를 미리 정해 버리면 게임은 보나 마나였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아무리 용을 써 봐야 한계가 있다는 것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것이다.

한반도 문제의 한반도화 환경 조성의 관건은 무엇보다 먼저 비대칭 관계를 바로잡는 것이다. 한미동맹도 마찬가지고 북미관계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평화는 강자 쪽에서 비대칭관계를 균형 있게 잡아 주는 진정성에서 비롯된다.

정의가 '약자를 보호하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라는 이치가 이를 말해 준다. 약자인 남북한이 한반도문제의 한반도화를 통해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 실현을 통해 궁극적인 북핵 해결의 길을 가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표명했다면, 강자인 미국은 그 과정을 보호하면서 세계전략을 조절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1990년대의 북핵 위기는 공산권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나 홀로 버티는 북한'에 대한 미국의 압박 전략의 산물이다. 북미기본합의서의 채택도 1994년의 군사적 조치가 무산됨에 따라 압박의 강도를 늦추는 지연전술이었을 뿐이었다. 이때 한국정부는 미국의 북한 영변 핵시설 폭격 준비에 대해 통보조차 받지 못한 상황에 대해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는 이처럼 한심한 처지 탈출을 위해 작전통제권 환수를 서둘렀고 겨우 평작권 환수를 실현시켰던 것이다.

이후 북핵 위기는 국제화의 길을 밟는다.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 그리고 이에 따른 남북교류 진전에도, 북핵 문제는 미국의 세계전략 구상대로 한반도로부터의 해결을 넘어 국제무대인 6자회담 테이블로 옮겨졌다. 6자회담에서 9.19공동성명(2005)과 2.13합의(2007)가 도출됐음에도 북핵 문제 해결은 미궁에 빠진다.

결국 이후 10년에 걸친 미국의 전략적 인내와 북한의 6차에 걸친 핵실험, 그리고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강화로 한반도 문제는 이제 거의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의 '국제화'로 빠져들고 말았다.

4월 11일, 한반도 상황 개선시킬 묘책 찾을 수 있을까

그 결과가 바로 2019년 4월 오늘의 한반도 모습이다. 그렇다면 4월 11일로 예정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의 정상회담은 한반도의 이 상황을 개선시킬 묘책을 찾아낼 수 있을까?

아니 4.11 한미정상회담이 이를 목적으로 준비된 것인지조차 알 수 없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4월 11일은 상해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각도 대의원 30명이 모여서 임시헌장 10개 조와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채택한 날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국호 탄생 100주년이 되는 날인 셈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3월 1일 정오에 광화문광장에서 개최된 3.1운동 100주년 기념식에서 "이제 새로운 100년은 과거와 질적으로 다른 100년이 될 것"임을 강조하고 향후 "우리가 주도하는 100년의 질서"를 우리 국민의 손으로, 남북이 함께 만들어 낼 것을 선언했다.

'신한반도체제'로 명명된 이 새로운 길도,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는 결기와 외교적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전폭적인 국민의 힘 없이는 아예 시도조차 어렵다.

가끔 미국이 전작권 환수에 긍정적인 태도를 취했을 때는 우리 국민들의 반미정서가 고조됐을 때뿐이었다. 기울어진 운동장의 불공정함에 대해 학생들이 담임 선생님에게 호소하고, 담임 선생님이 체육선생님에게 항의해야 겨우 시정될 수 있었음을 상기하게 만든다. 우리가 주도하는 100년의 질서는 깨어 있는 국민들의 지지와 함성 없이 세워질 수가 없다.

* 이 글은 코리아연구원에서 발행하는 '현안진단' 및 <오마이뉴스>에도 함께 실었습니다.

변진흥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연구원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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