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만해축전 심포지엄 발제2] 공존의 경험과 자기 정체성의 문제

▲ 박준영 아시아가톨릭뉴스 한국지국장
종교 갈등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크게는 두 가지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다른 종교와 더불어 공존하는 경험의 부족이다. 둘째는 하나의 이익 집단으로서 제도 종교가 가진 사회경제적 기득권의 문제다.

현 이명박 정부 하의 종교 갈등 또한 이러한 두 요소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런데 사회경제적 기득권의 문제는 표면상 세속적 이권을 멀리하는 듯한 종교의 특성이 있어서 공개적으로는 잘 거론되지 않는다.

반면에 공존 경험의 부족 문제는 각 종교의 역사적 존재와 경험은 물론 내적 정체성과도 긴밀히 연관돼 있다. 따라서 각 종교는 종교 갈등에 나서는 이유를 자기의 종교적 정체성 또는 교리에서 찾는 수가 많으나, 사실 이 또한 크게 보면 역사적 경험에 따라 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2008년 2월에 출범한 이명박 정부 이후의 기간은 이제까지 겨우 1년 반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 갈등의 실제 모습을 살펴보려면 종교 갈등의 주체로 등장한 한국 주요 종교들이 타 종교와 연관해 자기의 종교적 정체성을 어떻게 인식해왔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필자는 이 문제를 토론 주제와 관련해 “종교 자유” 인식 문제로 본다. 타 종교와의 관계는 결국 여러 종교로 이뤄진 사회 안의 한 구성원으로서 다른 종교 또는 경합적 권위와 맺는 사회적 관계이며, 이것이 바로 종교 자유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1. 한국 역사 속에서 종교 자유

한국은 단군 신화에서 보이듯 제정 일치의 사회에서 삼국 시대에 고대 국가가 정립되면서 정교는 분리됐다. 그러나 이 시기 이후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는 국가의 우위 속에 종교가 국가 권력의 일부로 협력할 때만 존재를 인정받는 관계가 지속됐다. 삼국 시대 호국 불교는 대표적인 예이며, 고려 또한 마찬가지다. 신라 시대 이차돈의 순교는 신라의 국가 종교가 이전의 무교(巫敎), 또는 한국적 도교(神道)에서 불교로 교체되는 시발점을 상징한다. 이후 통일 신라부터 고려 시기까지는 사실상 불교의 독주 시대였다.

그러나 서양 로마 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국교가 된 뒤부터는 그리스도교 내부의 이단 논란이 종교 분쟁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면, 불교로 통일된 통일 신라 같은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불교 내부의 여러 종파의 분립이 종교간 갈등을 대신했다. 고려 시대에도 불교내 종파간 갈등 해결은 중요한 문제였다. 고려는 왕족 출신인 의천 대사를 통해 교종과 선종의 종파간 갈등을 해결했다.

조선 시대에는 유교가 불교를 억압한 시기였다. 그러나 이 때 유교는 엄밀히 말해 스스로를 종교로 인식하지 않았다. 불교를 억압한 것도, 타 종교이기에 적대한 것이 아니라 불교가 종교였기 때문에, 곧 사교(邪敎)로 봤기 때문에 억압한 것이다. 이것은 조선 말기에 천주교 박해에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이 시기는 유교와 불교라는 두 종교 사이의 갈등이나 박해가 아니라 일종의 이신론(理神論)적 국가의 입장에서 (미신인) 종교 자체를 억제, 박해하려 한 것으로, 성격이 많이 다르다. 오히려 현대의 무신론 공산주의 사회에서의 종교 박해와 비교해야 할 것이다. 개항과 천주교 신앙 허용 직전에 있었던 동학의 최제우 탄압과 순교도 마찬가지로 봐야 할 것이다.

조선은 1886년의 한불조약으로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다. 당시 프랑스는 유럽 최대의 가톨릭 국가로서 “교회의 딸”로 불리며, 교황청으로부터 유럽 밖 선교지에서 가톨릭 신앙의 전파와 교회 보호에 대한 의무와 권한을 위임받고 있었다. 미국, 영국 등과의 조약과 달리 한불 조약에 유달리 천주교 신앙 허용에 대한 조항이 들어간 것은 이 때문이다. 개신교 또한 이 조약과 더불어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됐다. 이 사건은 삼국 시대 이래 처음으로 국가로부터 분리된 종교의 존재가 허용된 것으로 한국 종교 자유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일이었다. 또한 본격적인 다종교 시대가 시작된다. 불교는 여전히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 조치가 유지됐으나, 1895년에 일본의 압력으로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가 해제된다.

이처럼 한국에서 종교가 국가 권력과 분리된 사적 영역으로 인정되고 종교 자유가 이뤄진 것은 한국인 내부의 종교적 각성이나 성장, 투쟁 때문이 아니라 외세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유럽의 경우 종교 자유는 한 국가종교에 대한 다른 소수 종교의 투쟁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따라서 종교 자유는 자연스레 종교 공존과 연관된 것으로 이해됐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비록 한국에서는 국가 권력과 분리된 존재로서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기는 했으나 또한 불완전한 모습을 띠게 됐다.

우선 국가는 자신의 각성이 아니라 외세의 강요에 의해 종교 자유를 인정했으므로, 종교를 국가의 일부로 생각하거나 국가 통제 아래 두려 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이 확고하지 않았다. 특히 외세의 힘이 누그러질 때는 더욱 그러했다. 박정희 정권의 후반부인 1970년대에 민족주의가 강조되면서, 국가 권력이 종교에 대해 국가 이익에 복무할 것을 강요한 것은 이러한 미성숙 때문이었다. 해방 이전에 일제하에서 신사 참배가 강요될 때 개신교와 가톨릭에서는 종교 자유의 문제가 제기됐으나, 이 또한 본격적인 국가와의 대립도, 타종교로서 일본 신도와의 대립도 아닌, 뭉뚱그려진 “외세”와의 대립의 측면이 강했다.

한국에서 종교의 자유가 다른 종교 간의 큰 갈등과 희생 끝에 서로 양보함으로써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는 점은 또한, 각 종교가 종교의 자유라는 것을 자기의 권익 문제로만 보고 다른 종교의 권익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결과를 낳았다. 한국 사회에서 각 종교가, 특히 개신교가 때로는 자기만 생각하는 부잣집 막내아들처럼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개신교 일부에서는 종교 자유를 국가 권력과 종교 사이의 균형, 종교 간의 균형 문제로 보지 않을 뿐더러, 심지어 반대로 국가가 개신교에 특혜를 주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 같은 모습까지 보인다. 여기에는 남한에서 종교의 자유가 한국 전쟁 기간에 공산주의와 종교 간의 갈등에 따라 단순히 “반공”과 동일시되던 경험이 작용하는 듯하다. 공산주의 지배로부터 자유 이외에는 종교 자유의 필요와 경험을 충분히 느끼지 못한 탓이다. 오히려 반공 국가로부터 과도한 지원의 대상이 된 때문이다.

그런데,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종교 자유 문제가 1960년대말-1970년대 박정희 정권 하에서 국가와 일부 진보적 그리스도교회가 대립하면서 본격 부각된다. 주로 개신교인이 중심이 된 종교계의 삼선개헌 반대운동과 유신헌법 반대에 대해 박정희 정부는 정교분리 위반이며 정치 참여라고 비난한 데 반해, 종교인들은 종교적 양심의 사회적 실천일 뿐인데 이것을 막는 것은 종교 자유 침해라고 주장한 것이다.

당시 박정희 정부가 독재 강화를 위해 중앙정보부에 의한 공작 정치를 일상화하며 각 종단 내부에까지 직접 간여하려 한 사실은 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그 이전의 통상적 정부-종교 관계를 상정하고 있었다. 반면에, 그리스도교측에서는 현대의 신앙관이 변화/발전하면서 이전에는 종교적 실천의 범위에 있지 않던 것을 종교 행위로 재해석하는 변화가 있었다.

이전에는 정치권력만이 차지하던 영역에서 종교와 정치 권력의 경합 관계가 나타난 것이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라는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이 대표적인 것이며, 여기에서 개인의 개종을 넘어선 사회 복음화, 사회 선교 등의 개념도 나왔다. 이 시기에 종교 자유의 개념은 종교적 신념에 따른 개개인의 사회적 실천의 자유로까지 확장된다. 그 실천이 바로 선교이고, 복음화이므로.

한편, 1980년대 이후에는 각 종교가 종단 차원에서 단지 다같은 “종교”라는 이유로 공동의 이해관계를 찾는 모습이 나타난다. 7대 종단협의회, 그리고 종교지도자협의회가 두 대표적인 단체다. 이 움직임의 주체들인 각 종단 차원에서는 “종교”가 경제, 문화, 농민 등 사회의 다른 영역과 구분되는 또 하나의 영역으로, 곧 좁은 의미의 종교, 또는 이익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뜻한다.

7대 종단협의회는 원래 NCC와 천주교의 김수환 추기경 등 종교간 화합에 큰 관심을 가진 이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다. 이후 여러 시국 현안이 있을 때 한국 종교계 전체를 아우른 대표성을 가지고 정부와 공식 대화하는 과정이 거듭되면서 자연스레 각 종교의 경제적, 행정적 이해관계도 전달하는 통로가 됐다.

7대 종단협의회의 최대 수혜자는 불교와 토착 종교라고 본다. 신자수는 불교가 가장 많음에도 대 정부 관계 등 공적 영역에서는 개신교, 가톨릭이 더 우세했는데, 이제는 동등한 위치로 나선 것이다. 1990년대 말에 김수환 추기경, 강원용 목사, 송월주 총무원장의 트로이카가 활발하게 시민사회 운동에 나선 것은 그 정점이었다. 토착 종교는 이전에는 흔히 신흥종교라고 불리며 미신으로 공격받는 경우도 많았으나, “한국 민족종교협의회”라는 틀을 구성해 종단협의회의 당당한 구성원이 됨으로써, 적어도 공적 영역에서는 모두가 다 같이 동등한 자격임을 입증했다. 이것은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으로 많이 비판받는 한기총이 주도해 만든 한국 종교지도자협의회(종지협)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종지협에서 한기총의 사례는, 한기총 소속 많은 개신교회들이 내부적으로는 아무리 극단적으로 타 종교를 배격하더라도 종지협처럼 공개적이고 전국적 이목이 쏠린 영역에서는 타 종교를 동등한 상대로 존중하고 협력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지탄을 받는 일부 개신교회의 문제는 그들 신앙 행위가 폐쇄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또 그럴 때에만 가능하고, 반대로 종지협의 마당처럼 널리 공개되어 대중의 눈앞에 서게 되면 뜻밖으로 쉽게 극복될 수 있다는 가능성도 시사한다.

2. 이명박 정부와 종교의 관계

1) 대통령 취임 이전

이명박 정부와 종교의 관계는 먼저 대통령 취임 이전 서울시장 시절에 있었던 “서울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사” 사건부터 살펴봐야 한다. 그 사건으로 이명박이라는 개인의 행정행위에 대한 종교 편향 이미지가 결정적으로 굳어졌을 뿐 아니라, 그 사건에서 나타나는 양상이 그 뒤로도 이명박 정부의 여러 고위 인사의 언행에서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서울시장 시절인 지난 2004년 5월 30일 오후 9시부터 이튿날 새벽 5시까지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청년학생연합기도회에 참석해서 “서울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사”를 낭독했다. 이 일은 한 달이 넘은 7월 2일에 KBS, MBC 등에 보도되며 전국적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많은 이들이 정교분리 원칙에 어긋난다며 반발했다.

여기에 대해 이명박 시장측은 그가 퇴근 이후 개인 자격으로 참석했다고 해명했으나, 봉헌서 봉투에 서울시 로고가 찍혀 있는 점, 봉헌서에 “서울특별시장 이명박 장로 외 서울의 부흥을 꿈꾸며 기도하는 서울기독청년 일동”이라고 돼 있는 점 등이 지적됐다. 이에 불교 조계종은 성명을 내고 그가 공사를 구분 못했다고 비판했으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도 “내 신앙이 소중하듯 다른 이의 신앙과 종교 역시 소중하다”고 지적했다. 한겨레, 경향, 문화일보도 사설에서 문제점을 지적했다.

결국 이 시장은 7월 12일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긴급 공동회장단 회의에 참석해서, “일반 시민과 이웃 종교인에게 공직자로서 심려를 끼치게 된 점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앞으로 이러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약속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이틀 뒤인 14일에는 자신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지난 5월 31일 참석한 행사는 서울지역 기독청년들이 모여 서울의 발전과 시민의 안녕을 기원하는 자리였으며 이 자리에서 주최 측이 작성한 봉헌서를 함께 낭독하게 됐다”며 “평소에도 편견 없이 여러 종교행사에 참석해 왔고 이번 행사도 그 중 하나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그 뒤로 그는 서울시 봉헌 발언과 판박이인 청계천 발언을 했다.

2) 성시화 운동의 등장

한편으로는 포항, 서산 등에서 개신교 신자인 지방자치단체장이 성시화 운동에 나서 물의를 빚기 시작했다. <불교신문>이 지적했듯, 이명박 시장의 서울 봉헌 발언 등이 돌발적 해프닝이었다면 홀리 클럽이 주도하는 성시화 운동은 유력 개신교 인사들에 의한 조직적 활동이라는 점에서 질적으로 다르다. <불교신문>에 따르면, 홀리 클럽은 그 구성원들이 시장, 지검장, 은행지점장 등 지역을 움직이는 고위 공직자와 유지들이다. 홀리 클럽 구성원에 의한 문제는 당장 2009년 5월에도 인천의 박승숙 중구청장이 “2009 인천 국제 성시축전” 설명회에서 “언론에 두들겨 맞더라도, 중구 성시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다짐할 정도로, 시간이 지남에도 여전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성시화 운동이란 무엇인가? 이명박 정부하에서 일어나는 개신교에 의한 모든 종교적 갈등이 성시화 운동에 따른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구체적인 성시화 운동을 자세히 살펴볼 가치가 있다.

성시화 운동을 하는 홀리 클럽(Holy Club)에 따르면, 성시화의 개념은 다음과 같다.

“좋은 뜻으로는 도시 성결화(聖潔化) 자체만을 의미하지만, 도시가 복음화 되지 않고는 도시성결화가 이루어질 수 없고, 도시 성결화가 되면 사회 병리현상도 치유되는 효과도 나타나므로, 성시화란 도시 복음화, 도시 성결화, 도시 복지화 라는 3가지 요소를 모두 포함하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유의하여야 한다. 3%의 염분만 있으면 바닷물이 썩지 않는데 25%의 복음화가 된 한국에서 매년 8%정도 범죄가 증가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한국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다하기 위해 성시화 운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한국에서 성시화 운동은 1970년에 한국대학생 선교회(CCC) 총재 김준곤 목사에 의한 민족복음화운동 선언 이후 1972년 춘천시에서의 성시화 운동 집회가 있었던 것이 효시다. 그 후 1991년에 춘천 법조인 중심의 개신교 기관장들의 춘천 성시화를 위한 정기적인 성경공부로 성시화 운동이 재점화되었고 1995년 역시 법조인 중심의 기독기관장 성경공부와 기도로 한국 최초의 홀리 클럽과 성시화 운동본부가 창립되었으며 현재는 국내 27개 도시와 해외 7개 도시에 홀리 클럽과 성시화 운동본부가 조직돼 있다.

구체적으로는 홀리 클럽 회원(Holigen)들이 매년 10명 이상 전도, 거룩한 가정 사역, 가정법원의 가사 조정위원 봉사 등을 통해 도시복음화와 도시 성결화운동을 하고, 민관 합동의 뒷골목 청결운동과 범죄 없는 마을운동, 자녀 안심하고 학교보내기 운동, 기독 교도소 건립 등으로 범죄와 부패를 추방하는 도시 복지화를 추구한다.

이렇게 보자면, 이들의 활동에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또한 홀리 클럽은 16세기 장로교의 창시자인 존 칼뱅(John Calvin)의 성시화 운동, 감리교의 창시자인 18세기 영국 존 웨슬리(John Wesley)의 홀리 클럽 운동, 유명한 복음 전도사인 19세기 미국 무디(Moody)의 성령운동 등이 당시의 부패했던 도시와 국가를 위기에서 건진 것으로, 한국 홀리 클럽의 역사적 배경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다 당시의 종교적 상황에서는 중요한 개혁주의 운동이었으며, 또한 신앙을 개인적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고 사회에까지 확장하려는 공통성을 보인다.

그러나 한국 홀리 클럽은 실제로는 다른 종교에 배타적이며, 정교분리를 위반해 개신교회의 이익을 추구하는 협소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이들이 내세운 성시화 운동을 처음 실행했던 칼뱅의 사례 자체가 바람직하지 못했다. 칼뱅은 많은 개신교회에서 마치 모세처럼 떠받드는 종교개혁가이자 신학자이지만 또한 정치가이기도 했다. 그는 1542-46년에 4년간 스위스 제네바를 통치하며, 제네바를 성경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도시인 성시(Holy City)로 만들려고 했다. 그 결과, 그는 인구가 1만6000명이던 제네바에서 58명을 사형시키고 76명을 추방했다. 결국 못 견딘 제네바 시민들은 그를 쫓아냈다.

지금 한국에서 성시화 운동을 추진하는 이들이 당시 제네바의 칼뱅과 같은 잔혹한 종교정치를 추구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무리 신학적으로 훌륭하다고 해도, 이러한 비참한 결과를 낳은 칼뱅의 성시화 운동을 아무런 반성이나 성찰 없이 그대로 모범으로 삼는다고 내세우는 것은, 무지가 아니라면, 타 종교인에게는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에서 성시화 운동을 추진하는 이들이 다른 종교뿐 아니라 같은 개신교 안에서도 편협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은 이들의 성시화 운동이 결국은 타종교를 배척하고 기독교 정교일치 국가를 추구한다는 의심에 불을 붙인다.

예를 들어, 2008년 8월 1일 안양시청 앞에서는 안양시기독교연합회(안기연)가 주최한 기도회가 열렸는데, 제목은 이단 척결과 안양 성시화 등이었다. 기도회를 개최한 계기는 이들이 이단이라고 단죄한 구원파 계열의 기쁜소식 안양교회 건축 건 때문이었다. 기쁜소식 안양교회는 적법하게 건축허가를 받았으나 안기연은 안양시에 건축허가 취소를 요구하며 기도회를 개최했다. 그런데 존 웨슬리의 성결 운동으로 생겨난 감리교회는 지난 2006년에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과 개신교를 갈라놓은 의화(義化, Justification) 문제에 거의 500년 만에 가톨릭과 합의했고, 합의문 서명식은 서울에서 열린 세계 감리교 대회 중에 교황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다. 웨슬리의 정신을 이어받겠다는 한국의 성시화 운동은 세계 감리교 차원의 이러한 종파간 화해와 협력의 정신을 공유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성시화 운동과 이명박 정부는 표면상 직접 연관이 없다. 그러나 이들이 이명박 정부의 정치적 지지세력이라는 점, 이 대통령이 이끄는 중앙 정부가 시, 군 단위 지방자치체의 이러한 종교 편향 행위에 대해 제대로 지도, 감독할 의사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든 화살은 이명박 정부에 집중하게 됐다.

3) 부패한 행정부

한국의 성시화운동은 또한 각급 행정기관장, 간부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것도 문제다. 고위직은 조직과 부하 직원에 대한 영향력이 크기에 공과 사를 분명히 나눠야 한다. 이러한 사리분별은 조선 시대에조차 무척 주의하던 사항인데, 행정 처분이나 예산의 수립, 집행에 큰 힘을 지닌 행정기관장들이 자기의 종교 색채를 내세우면 고의가 아니라할 지라도 의심을 받게 마련이다. 정책과 예산이란 곧 “선택”의 문제이기에 한정된 예산으로 한 종교를 지원하면 혜택을 선택받지 못한 다른 종교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서울의 명동 성당이나 전주의 전동 성당 같은 곳은 건축물의 문화적 가치 때문에 문화재로 지정돼 적법한 보호와 지원을 받는다. 그런데 이 건축물들이 문화재로 지정될 때 지정권을 지닌 당국자가 가톨릭 신자라면 의심의 소지가 있는 것이며, 평소에 본인의 종교색이 뚜렷하거나 언행이 공정하지 못했다면 더욱 더 그러할 것이다.

일단 이런 문제는 공정한 공직자를 양성, 관리하는 행정부의 책임이다. 윗물이 맑으면 아랫물이 흐릴 수 없듯이, 행정부 최고책임자의 언행과 의지는 이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가톨릭 신자인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김수환 추기경은 그를 위해 당선 축하 미사를 명동성당에서 드렸고, 그는 당사자로서 참석했다. 여기까지는 비록 대통령이라 해도 사적인 영역이다.

그러나 현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08년 3월 16일에 김진홍 목사 주례로 청와대에서 예배를 드렸다. 청와대는 공무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대통령 가족의 거처이기도 하므로, 이것 또한 집무 시간 외 퇴근 시간의 일이었다면 사적 예배로 볼 수 있다. 미국 같은 기독교 전통이 강한 나라에서는 이 범위가 좀 더 넓을 수 있겠으나, 한국처럼 아직 관례가 자리 잡지 못한 사회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반면에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영부인인 권양숙 여사는 독실한 불교 신자로 서울 봉은사 신자였지만, 대통령 임기 5년 내내 한 번도 가지 않다가 퇴임 사흘 전에야 찾아가 5년간 모은 시주금을 전달했다고 한다. 공사를 엄격히 구분해 스스로 삼간 공직자, 공직자 가족의 모범 사례라 하겠다. 반대로 노무현 정부 하에서 청와대에서 예불을 드렸다면 어떠했을 지, 지금의 이명박 정부와 개신교 일각은 되돌아봐야 한다.

한편, 지방자치제 실시로 지방자치단체장 급에서 종교 편향 행위가 우발하고 있는 것은 이들이 임명직이 아니라 선출직이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곧 복잡한 행정조직 안에서 갈고 닦이며 공직자로서 공정성을 양성 받을 기회가 상대적으로 적다는 점이다. 또한 투표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지방자치 선거에서는 비록 소수일지라도 조직력이 강한 집단의 지지는 당선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데, 지역에 따라 강력히 형성된 개신교 집단은 이런 구실을 하기에 충분하다. 당선이 목표인 정치인이 여기에 영합해 편향적 행동을 할 여지는 커지는 것이다.

그리고 크고 작은 지방자치체 단위에서 이러한 개신교 집단의 정치세력화가 지지 후보의 당선으로 성공할 경우, 이 성공에 힘입어 종교의 정치화는 더욱 더 가속화된다. 이명박 정부의 종교 편향 문제는 이러한 지역 개신교회의 정치화가 이명박의 대통령 당선으로 전국화하면서 여론의 표면에 떠오른 것이다. 이명박 정부에 진출한 정치적 개신교인들이 여론의 비판에 별 무신경한 것은, 이전에 지방 차원에서는 똑같은 행동이 별 비판을 받지 않았으며, 설사 비판이 있어도 다음 선거에 장애가 될 정도가 아닌, 무시해도 괜찮았던 경험 때문이다. 한국의 여론이나 언론이 서울과 전국적 관심사에만 집중돼 있고, 지방의 상황에는 무관심했던 것도 여기에 한 몫을 했다.

4) 종교간 대결의 양상과 이해

종교간 갈등에 어떤 우열이 있을 경우, 약자는 자기의 약점을 찾아 고치고 상대의 강점을 찾아 배우려 하게 된다. 한국에서는 불교가 현대 그리스도교의 종단 운영의 장점인 정기 예배, 주일 학교, 활발한 언론매체 활용 등을 벤치마킹하는 것이다. 때로는 개신교의 폐해인 정교유착도 배우는 것은 아닌지 걱정될 때도 있다. 세대별 조직인 청년 단체 같은 경우는 서구에서도 20세기에 들어서나 나타나기 시작한 아주 새로운 양상이다. 개신교의 YMCA(기독청년회)나 가톨릭 청년운동 등은 대표적인 예인데, 한국의 불교 또한 자체 정비를 추진하면서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은 이에 걸맞은 불교 청년 단체였다. 한국 불교가 사회적, 정치적 기동의 측면에서 가장 많이 배운 것은 아마도 1980년 대 이후 개신교의 청년, 학생 운동, 그리고 1990년대에는 인권, 통일, 환경 운동과 같이 활동하면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주요한 경쟁 종교인 개신교가 불교에 대한 공격을 정교 유착을 통해 퍼붓기 시작하면서, 불교 또한 여기에 맞대응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개신교회의 정치화에 대해 주 피해자인 불교계가 대응하면서 불교 역시 점차 조직화, 정치화하는 조짐을 보이는 것은 예사롭지 않다. 지역 단위에서 성시화 운동 등으로 개신교회의 정치화가 진행되고 이것이 행정의 종교 편향으로 나타나면서 불교 역시 해당 지역 마다 지역 조직이 형성되고 정치화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불교 단체들의 잦은 성명 발표, 전국 규모의 불교도대회 또한 역시 종교문제가 정치화된 현상이다. 특히 지난 2007년 대선 직전인 2007년 11월 16일에는, 불교 평화연대를 중심으로 “불교 정치연대를 구성하자”라는 성명이 발표된 바 있다. 이 단체는 성명에서 “불교가 정치력이 나약할 때는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았고” 라고 해서 전반적으로 불교가 정치적 탄압을 받아왔으며, 이 해결 방안으로 불교의 맞대응 정치세력화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종교의 정치세력화는 다른 나라의 사례를 볼 때 결과가 그리 긍정적이지 않고 오히려 불길하기까지 하다. 종교가 정치와 융합하기 시작하면, 정치가 좋은 의미에서 종교의 장점을 얻어 종교화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 광신화”가 진행된다. 정치가 일종의 타협의 예술이라면, 종교는 자기 신념의 비타협적 확장을 생명으로 하는 속성이 있기 때문에, 정치가 종교화되면 정치는 곧바로 종교 전쟁으로 극단화하기 쉬운 것이다.

정책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요구하는 정치는 극단적 혁명 정당이 아닌 이상 없지만, 종교는 대부분 자기 종교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아주 높이 평가한다. 그러므로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정교 분리는 정치를 종교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한국에서 세계적으로도 보기 힘든 근본주의적, 배타적 개신교가 맹위를 떨침에도 그간 종교간 갈등이 사회적으로 크게 부각되지 않은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독재적 중앙 권력이 수십년간 지배하면서, 독재권력의 권위를 훼손시킬 수 있는 종교간 갈등 자체를 원천적으로 억누르고 무마했다.

둘째로는 강력한 유교 사회가 해체되면서 국민의 과반수가 종교가 없는 비종교 인구로 남아 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종교간 갈등의 실제 요인은 신자 다툼, 또는 이와 연관된 사회경제적 이득의 갈등인 경우가 많은데, 이처럼 거대한 종교 시장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는 종교간 선교 다툼이 일어날 여지가 적다. 반면에 인도를 비롯해 아시아 각국에서 종교간 갈등이 걸핏하면 폭동과 살인으로 이어지는 것은 인구의 99%가 종교인인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개종하면 다른 종교는 곧바로 한 사람의 신자를 잃는 각박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개종 금지법”이라는, 대부분의 한국인에게는 왜 그런 법률이 있어야 하는지 이해조차 잘 안 되는 법률이 존재하고, 그리스도교회들이 “우리는 개종 작업을 하지 않는다”고 공개 해명하곤 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종교인이 적어야 세상이 평화롭다는 역설이다.

셋째로는 교세의 추이로 볼 때 피해자처럼 보이는 불교계가 좋게 말해서 “자비로서, 포용력 있게” 공격자인 개신교의 공세에 대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산중 불교라는 한국 불교의 여건 때문이었지 불교 자체가 자기에 대한 공격을 무작정 용서하는 천사, 아니 부처님 같은 존재였기 때문은 아니다. 개신교의 대 불교 공격이 이명박 정부 전후를 비롯해 크게 사회문제화되고 관심사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과거에도 없었거나 약했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지난 수십년 간 불교의 사회적 지위는 꾸준히 회복, 상승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지난 10여년 사이에 “불교의 수난”이 사회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현대 불교가 산중 불교를 벗어나 도시로 진출하거나 도시민 포교를 강화하면서 함께 나타난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종교간 접촉이 늘어나고, 포교 대상을 둘러싼 경쟁이 심해졌다.

물론 불교가 종교학적으로 볼 때 중앙집중형이 아니라 발산형 종교라는 점에서 집단적 응집력이 약하고 또 타 종교에 대한 경계심이 약하다는 점은 있다. 그러나 불교 또한 하나의 종교로서 다른 종교와 경쟁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신자들의 충성을 요구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더구나 종교적 정체성이 특정한 역사, 문화적 집단의 정체성과 동일시되는 경우에는 이러한 힘이 더욱 강해진다. 영국 지배하 미얀마의 불교 민족주의가 그러했고, 현대 스리랑카의 불교 민족주의가 그러하다.

스리랑카에서는 인구의 80 퍼센트를 차지하는 싱할리족과 불교가 동일시되어서, 이 민족적 정체성을 위협하는 소수 민족인 타밀족을 배타하는 탄압정책이 나타나기도 했다. 또한 이를 위한 구체적 방책으로 스리랑카 불교계는 불교 승려들이 정당을 직접 만들어 국회에 진출하고, 불교인이 그리스도교나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것을 금지하는 개종금지법을 추진하고 있다. 힌두교의 나라 인도는 흔히 “종교적 다양성과 관용”의 나라로 일컬어진다. 그런데 인도의 힌두교가 영국 식민지 시대의 내부 개혁을 거쳐 정치세력화하면서 이슬람과 그리스도교에 대한 공격의 주체가 된 것 또한 역사적 사실이다. 인도의 근본주의 강경 힌두교는 인도 인민당이라는 강력한 힌두 근본주의 정당을 만들었고, 집권 경험까지 있다.

불교는 힌두교와 브라만 신앙의 뿌리를 공유하고 있고 힌두교는 불교와 가장 가까운 종교다. 불교라고 해서 영원히 착한 종교가 아니라는 말이다. 불교의 자체 개혁과 정비가 종교간 공존에 대한 깊은 성찰과 동시에 진행되지 않는다면, 이 또한 상황에 따라서는 종교간 갈등을 강화시키는 요소가 된다.

5) 종교차별 금지법

행정부가 종교 편향 문제를 자체 안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사태가 장기화되면, 한국처럼 삼권 분립 제도인 나라에서는 입법부와 사법부가 이 잘못을 바로잡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국에는 종교간 갈등에 대한 법률이 없었다. 때문에 불교계의 요구로 국법으로는 처음으로 공직자의 종교차별 금지를 명시한 국가공무원법과 지방공무원법 개정안이 2009년 1월 국회에서 통과됐다. 그 과정을 간단히 살펴보자.

먼저,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08년 3월 8일에, 포항시 성시화 운동에 시 예산의 1%를 배정하려다 물의를 일으킨 정장식 전 포항시장을 하필이면 전 공무원의 교육을 맡은 중앙 공무원교육원장이라는 자리에 임명했다. 이 대통령이 공무원의 종교 중립에 아무 생각이 없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 뒤 6월 말에 국토해양부가 만든 교통정보 시스템인 “알고가”에 교회와 성당만 표시되고, 절은 모두 빠진 사건이 있었다. 기술적 실수의 측면이 강하다고 보인다. 하지만, 이미 이명박 정부에 신뢰를 잃어버린 불교계의 눈에는 정부의 해명은 변명일 수밖에 없었다.

7월 29일에 있었던 조계종 지관 총무원장의 차량 검색 사건은 불교계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이에 8월 27일에 불교계는 대규모 대회를 통해 사태가 매우 심각함을 이명박 정부에 인식시키려 했다. 사태는 정부의 선의와 의지를 기대할 수 없는 마당에 마침내 법률로 정부와 공무원을 강제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법안이 발의된 것이다.

불교계에서는 원래 개정안에 들어 있던 처벌 조항이 빠진 것을 아쉬워했다. 그러나 이 법안은 원래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더 아쉬운 것이다. 원인 제공자라 할 개신교 일각에서 내건 반대 이유에는 합당한 것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 이전에 자체 정화를 통해 이런 법안이 필요한 상황이 생기는 자체를 막았어야 했다.

그러나 개신교 전체로서는 자체 정화의 의지와 능력이 부족했다. 결국 법이 아니면 종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결과를 낳았다. 이 법안은 얼른 보아 공무원, 즉 국가를 통제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국가가 법률로서 종교 문제에 개입할 여지를 만든 것이다. 인도네시아는 종교부를 두고 종교 문제를 관할한다. 이것은 국가에 의한 종교 관리가 기본 목적이다. 이처럼 장관급 단위로 종교 부처를 두는 것은 흔하지 않다. 한국에서는 문화관광체육부에 종무실을 두고 있는데, 이것도 상당히 높은 수준의 조직이다.

6) 종교 자유와 민주주의

공무원 종교차별금지법에 대한 한기총의 반대 이유 가운데에는, “종교의 자유에는 자신의 종교에 대해 외부의 강제를 받지 않을 자유와 함께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배치되는 타 종교에 대해 합법적으로 비판하고 반대할 수 있는 자유도 포함된다”는 것도 있었다. 이 논거는 말 자체로는 상당한 이유가 있으나,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종교 갈등 대부분이 개신교에 의한 타 종교 공격 때문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추상적 이론으로 덮어버리거나 아예 미화하고 있다.

사실 다른 종교에 대한 비판이 곧바로 해당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 3월 말에 유엔 인권이사회에서는 “종교 폄하에 대한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 결의안은 세계 이슬람회의를 대표해 파키스탄이 제출했다. 단순히 보자면, 수년 전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단군상 목자르기 같은 행위를 하지 말자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세계 신문협회(WAN)에서는 곧바로 3월 30일에 이 결의안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종교는 비판과 풍자, 토론의 적법한 대상”인데, 이 결의안으로 이러한 토론이 심각하게 질식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결의안이 제출된 배경은 지난 2006년 2월에 네덜란드 언론을 중심으로 있었던 “마호메트 풍자 만화” 사건이다. 서유럽 언론들은 이것을 표현의 자유 문제로 보고 옹호했으나, 이슬람인들은 이슬람과 예언자 마호메트에 대한 모욕으로 보고 격분했다.

이 충돌의 본질은 문명의 충돌이라기보다는, 근대화를 경험한 서구식 민주주의 사회와 아직 전 근대적 사고방식이 여전한 대다수 이슬람 사회의 인식 차이로 보인다. 이슬람 사회의 근대화와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성숙하며 점차 해결될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추구하는 대한민국 헌법이 동시에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유럽 역사를 보면 종교의 자유는 언론, 표현, 사상의 자유의 발전과 더불어 이뤄졌으며, 굳이 따지자면, 그 일종이다. 유엔 결의안처럼 “종교 폄하”를 막는다는 것은 당연하고도 쉬운 일 같다. 그러나 2003년 대구 유니버시아드에 참석한 북한 응원단이 비에 젖은 김정일 사진을 보고 보여줬던 충격처럼, 이 문제는 그리 쉽지 않다. 어떤 한 종교가 자기 내부의 높은 존경 기준을 사회 전체도 따라줄 것을 “종교에 대한 존중”의 표시로 요구할 때, 이것을 받아주지 않으면 그것은 그 종교에 대한 모욕이 되는 것인가?

그리고 공직자의 종교 차별 금지법에는 처벌 여부보다 더 중요한 핵심 사항이 있다. 공직자의 언행 가운데 어디까지를 종교 차별로 봐야 하느냐는 것에 대한 명확한 합의가 없는 것이다. 미국 대선 과정에서 보이듯, 오바마가 교회에 나가고 신앙 고백을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프랑스라면 학교에서 기도는커녕 학생이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학교에 등교해도 처벌 대상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프랑스는 최근에는 이슬람 여학생이 머리에 히잡을 쓰는 것도 금지했다. 반면에 근대 민주주의의 원조라는 영국에서는 여전히 성공회 신자가 아니면 왕위를 계승할 수 없다. 사우디 아라비아에서는 그리스도교 성경을 갖고만 있어도 처벌을 받는다.

근래 우리나라에서는 경찰서 등 각급 행정기관이나 공항 등 공공시설에서 불교, 개신교, 가톨릭을 믿는 직원, 이용객을 위해 부족한 공간을 쪼개 예배 장소를 제공하는 곳이 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혜택을 받지 못하는 원불교 등 소수 종교의 입장에서는 차별이 아닐까? 이 문제는 이미 근년에 원불교에도 군종 장교 쿼터를 배정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바 있다. 종교 차별 금지법은 결말이 아니라 앞으로 전개될 기나긴 종교차별 논의의 시작일 뿐이다.

필자는 종교 문제는 법으로 건드리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인간 내면의 신앙과 신념의 문제는 법과 문자로 규정하기가 도저히 불가능하며, 그 자체가 비종교적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7) 종교 갈등에서 보편적 종교 자유로의 희망

이명박 정부 하에서는 개신교 고위 공직자들의 공사를 구분하기 힘든 종교 발언뿐 아니라 불교에 불이익을 주거나 개신교에 이익을 주는 여러 정책도 또한 종교 자유 측면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예를 들어 개신교 학교에서 비신자 학생들에게 예배 참석을 요구한다거나 하는 것은 이전 같으면 소수의 종교학자나 강경한 반종교주의자 아니면 한국 사회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때 논란이 컸던 사학법 개정에 개신교계에서 크게 반발한 것은 바로 이 문제였다. 물론 당시에 개신교에서도 진보적인 NCC는 찬성 입장을 보였고, 천주교는 교계제도는 개정에 반대하고 정의구현사제단은 찬성하는 등 입장이 갈렸다. 불교계는 일부 찬성 단체를 제외하면 대체로 유보적 입장이었다. 한국의 3대 종교가 모두 교계 상층은 직접 학교를 운영하는 기득권의 입장에서 “종교 자유가 침해당한다”는 의견이 강했고, 여기에서 자유로운 개인과 단체들이 사립학교 운영의 부패 등을 이유로 찬성했던 것이다.

그러나, 점차 종교 갈등의 문제가 근본주의적 개신교에 대한 사회 전반의 우려로 초점이 명료해지면서 한기총 등 근본주의 개신교계가 옹호하고자 하는 이른바 종교사학의 종교 자유론에 대해 불교 측에서는 입장의 변화가 보였다.

예를 들어 대광고 강의석 사건에 대한 2심 판결(2008년 5월 8일)은 이명박 정부의 학원자율화 입장이 반영된 것으로 비판을 받았는데, 중고등 종교사학에서 학생의 종교 자유보다 종립 학교의 선교 자유 권리가 우위에 있다는 판결로 해석된다. 이것은 한국의 사학이 전체 학교 수가 부족한 현실에서 정부의 상당한 지원을 받으며 준공립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사실상 학생 측에서 학교 선택의 자유가 없는 점이 무시된 것이다.

종단 입장에서는 정부에서 돈 대주고 학생도 보내줘 해당 종교를 가르치라는 좋은 기회이므로, 종교 사학을 많이 설립하면 할수록 이익인 셈이다. 물론 사립학교의 설립 취지를 완전 무시하고 공립학교와 같이 취급할 수는 없으나, 과거에 종교계 사립학교가 받은 종교적 특권이 민주주의 원칙에 비추어 과도했던 것이 아니었는지는 꼭 살펴봐야 한다.

불교계 일각에서 이 판결을 “종교 자유 침해”로 보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종교사학의 대부분을 개신교가 차지하는 현실이 불교계의 반 이명박/개신교 정서와 더불어 새삼 눈에 띤 까닭이다. 그런데 불교계의 대표적 교육기관인 동국대의 경우만 해도 그 흔한 그리스도교 학생 단체가 하나도 없다. 불교 또한 학생의 종교 자유를 무시해온 것이며, 나아가 탄압해 온 것이다.

물론 대학 교육이 의무 교육이 아니며, 학생 개개인의 자발적 선택이라는 점은 인정된다. 그러나 교육 커리큘럼 이외의 학생의 일상 활동에까지 엄격한 제한을 가해온 것을 보면, 불교 역시 적어도 학교 교육에 관한 한 그리스도교 계열 종립학교들의 배타적 선교관과 특권 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불교인들은 이러한 자기 모습을 개신교에 대한 비판 과정에서 깨달아 가고 있다. 결국 (개신교라는) 억압자에 대한 초기의 즉자적 대항이 대항의 설득력을 확보하기 위해 보편적 인식으로 발전하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자기 안에 내재해 있던 억압자의 모습을 발견하고 해체하는 것은 자기 논리의 정당화를 위해 필요한 것이다.

가톨릭 같은 경우에는 이런 변화를 어느 정도 예측하고 가톨릭 학교내 종교 교육을 완화하는 동시에 최소한의 종교 교육에 대한 객관적 정당성을 확보하려 노력했다. 이미 1993년에 가톨릭 학교에서 종교 과목 수업에 쓰기 위한 고등학교용 “종교(천주교)” 교과서를 만들었다. 300쪽 짜리 이 교과서는 앞부분 130쪽을 종교 개념 일반과 다른 종교에 대해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천주교에 대한 설명이다. 이것은 몇 년 전인 1984년에 교황청과 이탈리아 사이의 라테라노 조약(1929)이 개정됨에 따라 이탈리아에서 가톨릭이 국교로서 지위를 잃고, 중등학교에서 의무화돼 있던 가톨릭 종교교육이 선택 과목으로 바뀐 것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1998년에는 철학 교과서를 냈다. 철학 교과서에는 철학 일반과 논리, 윤리, 그리고 유교 철학, 불교 철학, 도가 철학이 설명돼 있다.

결론

한국의 종교는 약 1,000년에 걸친 국가 종교로서의 불교 지배, 그리고 500년에 걸친 유교 문화의 경험을 거쳤다. 19세기 후반에야 그리스도교 신앙이 허용되고 또한 억불 정책도 해제됨으로써 본격적으로 다종교 사회의 경험을 겪게 됐다. 그러나 이 또한 한국 사회 내부의 종교끼리 갈등하고 협력하면서 얻은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외세의 요구에 의한 성격이 강했다. 때문에 그 뒤 약 100년이 지나면서도 한국의 종교들은 다른 종교와 성숙한 관계를 맺을 기회가 많지 않았다. 자기 종교와 국가의 수직적 관계가 더 중요했다. 종교간 경쟁이 있기는 했으나 국민의 절반이 무종교인인 상황에서 종교 시장은 넓었기에 종교간 갈등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한국에서의 종교 자유는 우선 일제하 신사 참배 때 국가로부터의 개입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이 또한 외세에 대한 반대라는 측면이 더욱 부각됐다. 해방 뒤에는 반공과 결부한 개신교의 성장 속에서, 종교 자유는 사회 다른 부문에 비해 정부로부터 더 많은 혜택을 받는 것을 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 이후, 점차 종교와 국가 권력은 경쟁, 갈등하는 관계로 접어들었으며, 이로부터 종교 자유의 본질적 문제인 표현의 자유 등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또한 종교간 협력 운동이 시작되기도 했고, 종교가 사회의 한 영역으로서 이득 집단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하의 종교간 갈등은 이명박 서울시장 당시부터의 여러 가지 추문과 그의 부적절한 대응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특히 각 지방의 정부기관장들이 결합된 성시화 운동은 전국 각지에서 파문을 일으켰으며, 이에 대한 대응으로 주 피해자인 불교계 또한 조직화, 정치화하는 양상을 보였다. 결국 공무원법에 종교차별 금지 조항을 넣는 법제화가 진행됐으나, 이것은 해결책이 되지 못하며, 결국은 한국 사회에 맞는 종교간 관계, 종교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적절한 관례가 합의될 때까지 끊임없는 갈등과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현재 한국의 종교간 갈등은 대체로 근본주의적 개신교가 불교에 피해를 입히는 양상이지만, 불교 또한 내면적으로 현대 민주주의적 종교관을 충분히 수용하고 있다는 증거는 없다. 그것은 어쩌면 모든 종교가 가진 숙명적 한계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모든 새 관계가 만들어지는 긴 과정 속에서, 갈등은 첫 접촉 단계 이후 반드시 이어지는 한 단계다. 그 갈등이 치열한 공격과 방어로 이어지다가 종교들 간의 어느 중간에서 휴전이 이뤄질 수도 있고, 때로는 당사자 모두를 포괄하되 더 넓은 인간 이해로 나아갈 수도 있다. 그것은 더 깊은 민주주의이며, 더 깊은 자기 종교 이해다. 우리는 이 희망을 갖고 갈등을 이겨내며, 상대를 믿고 끊임없이 의견을 교환해야 할 것이다. 갈등 자체에 주목하기 보다는 갈등 속에 더 높은 공존의 단계로 나아가기에 충분한 대화가 진행되도록 주의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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