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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둠에 익숙해져 가고 있습니다[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의 길 - 김용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의 길", 요한 타울러, (김용대), 사회와연대, 2017, 126-135쪽.

여러분이 주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끼게 되면 여러분이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을 가장 잘 보이게 하시려고 못 느끼게 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과 함께 계시게 되면 당신께서 바라시는 대로 당신을 보여 주시든지 숨기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주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요한 3,8) 하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자주 말씀하셨고 여러분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아직도 하느님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자연의 스승이든 은총의 스승이든 간에 영혼이 준비가 되면 바로 들어가십니다. 여러분이 영혼을 비워 하느님께서 계신 것을 느끼지 못해도 하느님께서는 비우자마자 들어가 계십니다. 그리하여 빈 영혼에는 하느님께서 들어가시거나 이기심 때문에 속된 것으로 다시 채워지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빈틈을 주시지 않습니다. 따라서 침묵하며 서서 영혼이 비워지기를 기다리십시오. 왜냐하면 자기를 비우지 못하게 되면 다시 비울 때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다시 우리가 여태까지 다루어 왔던 하느님의 아드님의 거룩한 탄생에 대한 설명을 요구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에게 주님의 탄생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된 표징이라도 갖고 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히 세 표징을 얻게 됩니다. 사람들은 나에게 아무것도 완전하게 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즉 시간도 잊어버리고 탐욕도 버리게 되고 분심도 생기지 않는 그런 영적 상태에 누구나 이를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 사람에게 주님께서 탄생하시게 되면 그 사람은 무념무상 하게 됩니다. 그 뒤에는 그 사람의 영혼은 본능적으로 물욕을 버리고 하느님만 찾고 주님의 탄생에만 신경 쓰게 됩니다. 벼락이 칠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것이 벼락을 맞으면 즉시 벼락을 향하게 됩니다. 사람은 벼락이 치면 등을 돌리고 도망치기도 하지만 재빨리 벼락을 다시 쳐다보게 됩니다. 벼락이 치면 나뭇잎들은 모두 벼락이 치는 쪽으로 향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주님의 탄생을 느끼게 되면 영혼이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됨으로써 영혼은 즉시 거기에만 신경을 쓰며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하느님만 생각하며 가장 싫어하던 것들도 좋게 보이게 됩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보고 듣든 여러분 안의 주님의 탄생으로 모든 것이 거룩하게 보이게 되고 들리게 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만 알고 사랑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하느님처럼 거룩하게 보이게 됩니다. 마치 하늘에 있는 태양을 바로 쳐다본 사람이 눈을 돌려 다른 물체를 보게 되면 그 물체에 태양의 테두리가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모든 것에서 하느님만 찾고 사랑하지 않게 되며 여러분 안에 주님께서 탄생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은 수행을 계속하지 말아야 합니까 하고 물을 것입니다.

이 거룩한 상태 때문에 자신의 고행을 중단해야 한다고 자책하지 않습니까?

나는 철야기도나 금식이나 눈물과 슬픔에 찬 기도나 공부나 고행하는 사람들이 입던, 털이 섞인 거친 천으로 만든 윗도리를 입는 등의 수행은 계속하는 것이 좋다고 답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육은 영을 거스르려고 하며 몸은 영혼을 의식하여 지나치게 긴장하게 되므로 끊임없이 갈등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살게 되면 육은 더 대담해지고 강해지게 되는데 이 땅은 육의 고향이고 이 세상은 이 육의 봉기를 반기기 때문입니다. 음식과 마실 것과 모든 위안은 영혼에 해롭게 되는데 영혼은 모든 것이 죽게 되는 이 세상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는 영혼이 좋아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영혼이 진정한 친구이자 친척인 하늘나라 시민들만 생각하고 사랑하게 되면 하늘나라는 영혼의 조국이고 고향이므로 영혼에 방해가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육이 영을 지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육욕과 쾌락을 뿌리쳐야 합니다. 고통스럽더라도 이렇게 하게 되면 편안함과 위안만 바라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영혼은 욕정을 잠재워 욕정이 생기지 않게 합니다.

쾌락을 멀리하고 하늘나라만 사랑하게 되면 곧바로 욕정을 잠재울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사랑이 부족한 것만 탓하고 하느님에 대해서는 어떤 불평도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낚싯줄의 바늘과 같아 고기가 바늘을 물지 않으면 고기를 낚을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고기가 낚싯바늘을 문 뒤에는 도망치려고 해도 도망칠 수가 없게 됩니다. 나는 낚싯바늘을 사랑에 비유합니다. 일단 사랑의 포로가 되게 되면 빠져나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선물로 받는 사람은 어떤 수행을 하는 것보다도 비천하게 되지 않게 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의 선물을 받게 되면 자신에게 닥치게 되는 어떠한 불행도 참고 견디게 됩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받은 모든 상처를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만큼 하느님 가까이 갈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없으며 사랑만큼 하느님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이 길을 아는 사람은 결코 다른 길을 찾지 않습니다. 이 낚싯바늘에 걸린 사람은 영원히 빠져나갈 수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발과 손과 입과 눈과 마음은 모두 하느님의 것이 됩니다. 따라서 순수한 영혼을 더럽히는 이와 같은 원수들을 물리치는 데에는 사랑이 가장 좋은 무기가 됩니다. 이 때문에 성경(아가 8,6)에서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정열은 저승처럼 억센 것”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은 육으로부터 영혼을 잘라 내어 버리지만 사랑은 영으로부터 모든 것을 잘라 내어 버립니다. 영혼이 사랑하게 되면 하느님의 것이 아니거나 거룩하지 않은 것에는 매달리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이러한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은 선한 일을 하고 있든 하고 있지 않든 상관하지 않고 오로지 사랑만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빛. (사진 출처 = Pxhere)

깨닫지 못한 채 의무감이나 남의 눈치 때문에 교회에 다니게 되면 세뇌되어 깨달음은 얻지 못하고 교리 지식만 쌓게 됩니다. 그리하여 깨닫기 위하여 그 지식을 지우는 데 무척 애를 먹게 됩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사람들이 종교를 갖는 이유를 다음과 같은 의문에 답하기 위한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교회에서는 신자들에게 이런 의문들에 대한 답을 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이와 같은 의문들을 갖지도 않거나 답하지 않은 채 시간을 죽이면서 ‘제 맘대로’ 살고 있는 수가 많습니다. 어쩌면 한 번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인생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가?” “선은 무엇이고 죄는 무엇인가?” “왜, 무엇 때문에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참 행복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죽음은 무엇이고, 죽은 뒤의 심판과 보상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우리 삶을 에워싸고 있는 형언할 수 없는 저 궁극의 신비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따라서 제대로 믿고 깨달으려면 먼저 위와 같은 물음에 대한 답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묵상을 게을리하여 행복과 진복의 차이도 모르고 가난의 의미도 몰라 회개하지도 않은 채 빠지지 않고 주일 미사에 참례하고 묵주기도를 열심히 하면 믿음이 깊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오늘 복음에 나오는 눈먼 거지와 마찬가지로 두 손을 내밀고 기도하고 있고 하느님의 존재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못 느끼고 하느님의 약속이나 거부의 말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에는 바르티매오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는 우리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하여 복음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은 즉 성령을 입어 깨달음을 얻게 하는 것은 메시아의 일 중의 하나로 예언된 바 있습니다.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이사 29,18; 32,3) 본다는 것은 실제로 보는 것뿐만 아니라 이해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실제로 바로 이어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외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맞으시고 부활하실 예루살렘까지는 15마일 정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사람들은 메시아를 몰라 봤을 뿐더러 예수님을 악의에 찬 눈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에 눈먼 거지인 바르티매오의 눈을 뜨게 해 주셨기 때문에 바르티매오는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까지 갔습니다. 눈멀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바르티매오는 장님의 짓이라고 이해하기가 어려운 행동을 했습니다. 그는 눈이 먼 채로 왔고 여전히 눈이 멀어 있었습니다. 장님은 보지 못하기 때문에 물건을 잘 찾지 못하므로 정해진 곳에 물건을 두어 쉽게 찾으려고 합니다. 반면에 눈이 멀지 않은 사람은 물건을 아무렇게나 던져 버립니다. 바르티매오는 마치 눈이 멀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한 것입니다. 눈멀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겉옷을 입고 자신의 소유물을 손에 불끈 쥐고 있었지만 바르티매오만이 벌떡 일어나서 겉옷을 벗어 던지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만나러 쫓아간 것입니다. 정상인들은 재물인 겉옷을 꼭 쥐고 놓지 않았지만 믿음이 깊은 소경은 벗어 던져버렸습니다. 깨달아 회개하고 성령을 모시게 되면서 모든 것을 놓아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에밀리 디킨슨은 소경처럼 어둠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둠에 익숙해져 가고 있습니다>(We grow accustomed to the dark)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 - 후고(後考) 옮김

 

빛이 사라지고 나면

이웃이 등불을 들고 작별 인사하는 동안 어둠 속으로 걸어 나갈 때처럼,

우리는 어둠에 이내 익숙해집니다.

 

처음엔 어둠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한동안은 불안정하게 걷습니다.

밤이 낯설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면 바른 길을 만납니다.

 

달이 뜰 조짐도 보이지 않고

별들이 나오는 저녁이 되면

마음은 더욱더 어두워집니다.

 

가장 용감한 선조들도 조금은 더듬고

때로는 나무에 이마를 부딪치기도 했습니다만

이내 어둠에 익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점점 더 어두워져 한밤중처럼 되어도

우리의 눈이 금세 적응하게 되어 거리낌 없이 살아갑니다.

 

김용대(후고)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박사.
본명은 후고입니다만 호도 후고(後考)입니다. 항상 뒷북을 친다는 뜻입니다.
20년 동안 새벽에 일어나서 묵상을 하고 글을 써 왔습니다.
컴퓨터 전공 서적을 여러 권, 묵상집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 "징검다리"를 쓰고, 요한 타울러 신부의 강론집을 번역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습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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