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1] 종교의 정치세력화로 인한 사회갈등 어떻게?

▲박문수 박사
1. 문제 제기

개신교 일각과 통일교에서 17대 총선 부터 의회진출을 목적으로 정당을 결성하여 현실정치에 참여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두 집단 모두 실패하였지만 이들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정치권력에 접근하고자 했다는 면에서 주의를 끌었다.

한국 사회에서 종교가 정치에 참여하는 특히 정치권력과 제휴하는 방법으로는 유력 정치인 또는 신자(도) 정치인에 대한 선거 지원, 정치 자금 제공, 돈독한 관계 유지 등이 주로 사용되었다. 간접적으로 자신의 이해관계를 관철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집단들이 신자(도)들을 직접 규합하여 의회에 진출시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자 한 것이다. 물론 이 방식은 한국의 현실을 감안할 때 앞으로도 그리 성공적일 것 같지는 않다.

이에 반하여 개신교의 ‘뉴 라이트’ 참여 성직자와 신자들은 이명박 정부 출범과정에 깊숙이 개입하였고, 현재도 적극적인 후원세력이다. 그리고 이들의 요구 특히 종교정책과 관련된 요구는 상당부분 수용되어 이명박 정부 들어 자주 불교계와 마찰을 빚고 있다. 게다가 종교 문제를 넘어 현 정권의 정책에 대하여도 과도하게 지지를 표명함으로써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미 김영삼 정부 때 비슷한 상황을 경험한 터라 이러한 일들이 낯설지 않지만 과거보다 방식이 더 공격적이고 표현도 더 노골적이라는 데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따라서 종교의 정치세력화 문제는 종교 정당의 결성 시도 보다 ‘뉴 라이트’에 참여하고 있는 개신교 보수 기득권 집단과 같은 이들의 권력 추구 현상이 더 심각하다 하겠다.

사실 종교의 정치세력화 문제는 특정 종교의 활동이 두드러져서 그렇지 이러한 시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종교는 없다. 정치세력화를 정치권력과의 제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해방 이후 이러한 시도들을 하지 않은 한국 종교는 교세가 미미한 군소 신흥종교들 말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와 같이 종교의 정치세력화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목적은 특정 종교의 정당 결성 보다는 과거보다 더 공격적인 형태로 진행되고 있는 개신교 일부 집단들의 권력유착과 이를 빌미로 이웃 종교들과 마찰을 일으키고, 사회적 갈등을 조장 또는 증폭시키는 현상에 초점을 맞추는데 두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시각에서 종교의 정치세력화 담론의 내용이 무엇이고, 또 이런 담론의 형성에 영향을 미친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사례를 분석 평가하여, 한국이 과연 성숙한 종교다원사회에 이를 수 있는지 그 미래를 전망해보고자 한다.

2. 종교의 정치세력화

2.1 한국에서 종교의 정치세력화는 무엇을 가리키는 현상인가?

그동안 종교와 정치권력간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종교 사회학에서 ‘종교와 국가(정부, 정치)’, ‘종교와 정치제도’, ‘교회와 국가’ 등의 주제 영역에서 다뤄왔다. 본고의 주제는 크게 ‘종교와 국가’ 관계에 가까우므로 여기서는 종교와 국가의 관계 유형만을 살펴보도록 한다. 종교와 국가의 관계는 상호 간 영향력의 우열, 혹은 힘의 역학관계에 따라 여러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대략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 유형은 종교가 국가보다 우위에 있는 경우이다. 흔히 신정정치(神政政治, theodicy)라고 불린다. 이는 문자적으로 신이 통치하는 것을 말하고, 종교 지도자가 국가적인 정치 지도자를 겸하거나 아니면 후자보다 우위에 있는 경우이다.

두 번째 유형은 국가가 힘의 소유와 행사에서 종교보다 우위에 있는 경우이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두드러지고 종교에게 자율성, 궁극적 권위나 영향력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국가가 종교를 도구나 시행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세 번째 관계 유형은 정교분리 형태이다. 종교는 전적으로 개인주의화되고 주관적이며 내면화된 현상인 반면, 정치와 국가를 집단에 봉사하고 생존과 관계된 외면적인 일들을 취급하는 전적인 세속기구로 보는 것과 같이 종교 영역과 국가 영역, 종교 제도의 기능과 정치 제도의 기능이 서로 다르다는 전제 아래 각각의 역할분화를 인정하고 이를 법적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유형이다.

첫 번째 유형의 현대적 사례는 이란에서 찾을 수 있고, 두 번째 유형은 구 소련과 현재 러시아의 러시아 정교회에서, 세 번째 유형은 종교적으로 다원화된 대부분의 사회에서 발견할 수 있다. 현재 한국은 세 번째 유형에 속한다.

한국과 같은 정교분리 유형의 사회에서 종교가 ‘정치세력화’ 한다는 것은 특정 종교가 자신에게 유리한 결과를 도모하기 위해 자신들이 가진 자원을 가지고 정치권력에 직접 간접으로 접근하여 이 위세를 이용하려는 시도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정교분리를 표방하는 사회에서 이러한 특정종교의 정치세력화 시도는 반칙이지만, 이러한 경우들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이 현실이다. 대체로 이러한 방식으로 종교의 정치화에 참여하거나 이것에 관계하는 집단은 소수집단이다.

인도 힌두교 마하사바 같은 '공동체적인 정당'은 그들이 속한 집단의 세속적인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이익을 보호하고 증진하기 위해 활동한다. 북부 수단의 움마와 칠레의 기독민주당(개신교)은 종파적 정당으로 자신들의 소수 종교적 지위를 확보하고자 정치에 참여한다(이원규, 1997 : 453-454). 한국에서 통일교의 정치세력화도 같은 형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들은 자신들의 교세 및 영향력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하여 해당 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적 가정을 받아들여 그 사회를 결속시키는데 기여하는 방식이다. 통일교가 냉전시기에 강력한 반공주의를 표방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들은 사회에서 지배적인 영향을 행사하진 못하지만 최소한 생존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일반적인 것은 통일교를 예외로 하면 전통적인 제휴 전략의 사례들이다. 강인철은 제휴 전략의 예로, 선거참여전략, 교류전략을 든다. 선거 전략은 자신의 종교에 우호적인 인사나 정당, 또는 자기 종교소속 신자의 선거를 지원하는 것이고, 교류 전략은 영향력 있는 정당 인사, 국가 기구 내 고위 공무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들에 대하여 자기 종교 신자들의 표를 몰아주거나, 선거 운동 참여, 정치자금 제공, 해당 정부의 정책을 지지하고, 그 대가로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입안하게 하거나 권력이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 종교의 정치세력화를 문제 삼는다면 이러한 현상들이 주제가 되어야 한다. 사실 이러한 방식은 정교분리를 표방하는 미국에서도 흔하다. 미국은 주로 자신들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개신교를 음으로 양으로 지원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미군정 이후 현재까지 상당 기간 동안 개신교에 대한 우대정책이 공공연하게 추진되어왔다. 통일교도 ‘평화통일가정당’을 창당하기 전 까지는 이 제휴전략을 사용해왔다. 천주교와 불교도 이 두 종교에 비할 때 두드러지진 않지만 나름대로 특정 시기에는 이러한 전략을 취해왔고, 현재도 그 연장에 있다. 그러면 대부분의 종교들이 이러한 전략을 취하고 있는데 굳이 한국에서 종교의 ‘정치세력화’를 문제 삼아야 하는가?

아마도 이것은 상대적 비중에서 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미군정, 이승만 정권, 김영삼 정부, 현재 이명박 정부 하에서 지나친 개신교 편향정책이 종교간 공존과 균형을 파괴하는 것은 물론 직접적인 위해 사례들이 빈발함으로써 종교간 갈등을 넘어 분쟁으로 치달을 소지가 커지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해방 이후 불교계는 이러한 편향정책의 가장 큰 피해자 가운데 하나였다.

개신교계 신흥종교, 전통 종교들 가운데 미신의 범주로 간주되어 정책적으로 차별을 받은 종교들 까지를 포함하면 피해 집단은 그리스도교(개신교, 천주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집단으로까지 확대된다. 이처럼 정교분리가 법적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어도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특정 종교가 국가권력과 제휴하여 부당하게 권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따라서 한국에서 종교의 정치세력화는 정교분리원칙하에 형성된 다원화된 종교상황을 무시하고 특정 종교가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려 시도하고나 실제로 권력의 위세를 빌미로 그러한 영향을 행사하는 것이라 하겠다.

2.2 정치세력화의 대표적인 사례로써의 개신교

개신교가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갖게 된 시기는 해방 이후 미군의 진주 이후부터라 하겠다. 미군정 관계자들은 한반도 진주 후에 미군정에 협력할 인사들을 천주교의 노기남 주교(박도원, 1985 참조), 일제시대 선교사로 파견되었던 미국인 선교사들로부터 추천을 받았고, 당시 천주교 평신도 가운데는 마땅한 인물이 부족하였던 관계로 대부분 개신교 인사들이 미군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친일인사를 배제할 경우 개신교의 사회적 영향력이 가장 컸던 관계로 미군정의 노력은 “자연스럽게 개신교에 집중되었다.

국가는 개신교 교회에 다양한 특혜를 제공했으며, 개신교 지도자들은 권력구조로 자연스럽게 충원되었고 그 결과 지배구조 안으로 편입되어 갔다. 선교사들이 이 시기의 국가-개신교 교회 관계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협조’로 표현했듯이 양자의 관계는 ‘상호승인과 야합’으로 특징 지워졌다”(강인철, 1996 : 163). 이어진 이승만 정권 역시 “개신교에 특혜를 집중시키고 다른 종교들을 직 ․ 간접적으로 억압함으로써 개신교를 ‘사실상의 국가종교’로 만들어갔다.”

이승만 정권 때 개신교는 선거 참여 전략을 통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였다. 가장 조직적인 형태로 진행된 사례는 1952년의 정부통령 선거와 1954년의 국회의원 선거였다. “1952년 제2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그 해 7월 26일 ‘한국기독교연합회’(NCC)는 회장 전필순의 이름으로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의 대표자들을 소집하여 ‘기독교선거대책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위원회는 도 군 개별 교회 단위까지 하위조직을 갖추고 선거 전(前) 주일을 ‘선거기도일’로 지키는 등 조직적인 이승만 지지운동을 벌였다. 기독교선거대책위원회는 이승만을 대통령에 추대하는 이유로, 기독교계의 요청을 수용하여 국기경례를 주목례로 대신하도록 고쳤고, 국군에 군목제도를 설치했으며, 국가의식을 기독교식으로 지령하는 등 ‘기독교를 옹호하는 대통령’이라는 점을 들었다.”

1954년 총선 때도 NCC 주최로 선거대책위원회를 열어 선거구별로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입후보자에 대한 공인제(公認制)를 실시하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 때에는 교회가 정치단체가 될 수 없고 ‘교회가 어느 정당에 편승하거나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교회단체연합의 선거운동조직 결성을 시도하지 않았지만 개인자격으로 여전히 ‘정부통령 선거추진 기독교도중앙위원회’가 구성되어 이승만과 이기붕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선거운동에 나섰다.

제3대 정부통령 선거는 부통령 자리를 놓고 천주교의 전적인 지지를 받는 장면과 감리교 권사인 이기붕 간에 경합이 벌어질 때는 개신교계의 선거참여가 열기를 띠었다. 1958년 이후의 선거에 대하여도 교회는 개신교 신자 출마자나 당선자를 언론을 통해 소개하는 등 간접적인 선거운동을 계속하였고, 누구에게 투표를 하건 그 대상이 개신교 신자여야 한다는 점을 당연시 하였다.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도 이승만과 이기붕은 ‘전국교회 150만 신도들에게 드리는 말씀’을 발표하여 개신교 신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호소했다. 현직 목사의 정계진출을 비판하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1960년 5대 선거에서 NCC 회장인 이남규 목사가 참의원에 당선되었다. 선거참여에서 단정수립 이전에는 한민당이, 단정수립 이후에는 자유당이 주된 지지 대상이었는데 모두 여당이었다.

“개신교 지도자들은 국가 고위 관료 및 정치인들과도 빈번한 교류를 유지했고, 이는 국가에 대한 개신교 교회의 영향력 유지 내지 확대를 의미했다. 그리고 이 같은 공식적 비공식적 교류야 말로 개신교 지도자들과 지배집단간의 문화적 일체감, 상호간의 이해와 승인, 부채의식 등을 발전시켜 궁극적으로는 공고한 ‘구조적 통합’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미군정기에는 선교사와 군정간의 유대 관계를 통하여 교회가 국가와 교류와 통합하는 것을 당연시하게 만들고, 국가권력에 대한 교회의 접근능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켜 결국 한국개신교를 친미주의의 아성으로 만드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아울러 미군정기에서 장면 정권기에 이르기까지(1952-62년 사이) 장 ․ 차관, 고급공무원, 대사, 장성, 의회지도자 가운데 교세에 비하여 신자들의 비율이 매우 높아 국가권력에 대한 접근능력이 매우 컸었다.

박정희 정권 때는 ‘조찬기도회’로 대변되는 개신교계 기득권층 세력의 제휴관계, 김영삼 정부, 이명박 정부 때는 정부 탄생에 선거지원전략을 통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 두 정권 때는 이승만 정권 이후 가장 많은 종교 편향 및 훼불 사례가 발생하였다.

특기할 것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김진홍(金鎭洪) 두레교회(경기 구리시) 목사, 손봉호(孫鳳鎬) 동덕여대 총장 등 5명의 고문과 이화숙(李和淑) 연세대 법대 교수, 서경석(徐京錫) 서울 조선족교회 목사 등 개신교계 인사들이 뉴라이트 출범에 참여한 것이다. 뉴라이트 출범 후에는 김진홍 목사가 의장으로 취임하였고, 보수적인 개신교 교단의 연합조직인 한기총이 적극 참여하였으며, 노무현 정부의 각종 정책(예, 사학법 개정)을 반대 및 개신교와 이해관계가 있는 정책을 관철시키는 활동을 해왔다.

2008년 촛불정국에서는 자신들이 시무하는 교회의 신도들을 동원하여 반대집회를 갖기도 하였다. 이명박 출범 후 현재까지 각종 종교 정책이 뉴라이트의 조언을 받은 것이라 할 정도로 종교편향 정책에도 영향을 주었고, 현 정부의 주요 정책을 적극 지지하는 활동을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개신교는 해방 이후 한국의 모든 종교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정치세력화를 추진한 종교라는 평가가 가능하겠다.

2.3 가톨릭

가톨릭교회는 1946년 2월의 민주의원 구성과 같은 해 10월 과도 입법의원 선거, 1948년 5월 제헌의회 선거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 때 가톨릭교회는 민주의원과 입법의원에 가톨릭 대표로 장면을 추천하여 당선시켰다. 1948년 5․10 선거에서는 가장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게 참여하였다. 서울교구에서는 유엔 조선위원단 입국 직후인 1948년 1월 11일 서울교구 각 본당의 유지 교우들로 ‘가톨릭시국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이어 개별 본당차원에서도 ‘본당대책위원회’를 구성한 바 있다(경향잡지, 1948.2 ; 가톨릭청년, 1948.4).

1948년 선거에서 장면이 입후보하자 그 뿐 아니라 여덟명의 가톨릭 후보들을 위해 가톨릭계 언론매체들을 총동원해 대대적인 선거운동을 전개하였다. 가톨릭교회는 이미 1945년 9월 노기남 주교의 주도로 가톨릭 평신도 지도자들이 대거 한민당(한국민주당)에 발기인으로, 9월 16일 한민당 창당 때 40명의 평신도 지도자들이 참여하기도 하였다. 1950년 5.3 선거에도 신자 국회의원들의 당선을 위해 선거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행정부 고위직에 장면 만 초대 주미대사, 제2대 국무총리로 진출 했을 뿐 대대적인 선거운동에도 불구하고 민주의원, 입법의원, 제헌의회에 장면 한 사람 밖에 진출시키지 못했다. 1950년 민의원 선거에서도 두 명을 진출시켰을 뿐이다. 이 때문에 장면과 과도한 동일시가 일어났다. 이후 1956년의 5.15 선거(3대 대통령 및 4대 부통령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장면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총력을 경주하여 당선시켰다. 1958년 총선에서는 가톨릭 신자의원 9명이 당선되었고, 예비자도 4명이나 되었다. 가톨릭교회는 민주당의 의석을 늘리는데 총력을 기울였다”(강인철,“미군정과 이승만 정권하에서의 교회와 국가”, 《교회와 국가》, 인천가톨릭대학출판부, 1997).

1950년대 중반 이후 개신교 교회들이 각급 선거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이승만과 자유당을 지원하고 개신교 신자들이 행정부 뿐 아니라 입법부도 주도해 나가자 가톨릭교회는 이에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장면이 대통령에 불출마하면서 가톨릭이 상대적으로 침묵을 지킨 것과는 대조적으로 개신교계가 1952년 정 ․ 부통령 선거, 1954년 제3대 민의원선거에 대단히 적극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분위기는 1956년과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에도 이어졌다. 이런 개신교측의 움직임이 장면과 민주당을 지지하는 가톨릭교회에 상당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져 56, 60년 정부통령선거에서 개신교와 가톨릭이 각각 자유당과 민주당을 앞세워 정면대결을 벌이는 상황으로 이어진 것이다.

미군정기에는 노 주교와 일부 유력한 평신도 인사 외에 적극적으로 협조할 기회가 없었고, 미군정의 가톨릭 인사, 스펠만 대주교 같은 유력 가톨릭 인사들을 매개로 한 우호적 협력 관계만 유지되었을 뿐이다. 그러다 이승만 정권 때는 “정부 수립이후부터 장면이 국무총리직을 맡는 때까지의 우호적 협력기(1948-1951년), 장면 대통령 추대운동이 본격화되고 장면이 국무총리직에서 경질된 이후 민주당이 창당될 때까지 경쟁과 협력의 측면이 공존했던 ‘경쟁적 협력기’(1952-55년), 장면의 부통령 출마와 당선 이후 이승만 정권 붕괴 때 까지의 경쟁의 전면화 및 공공연한 대결기”를 거치게 된다. 해방 이후 역사에서 이 시기가 가장 가톨릭의 정치세력화 움직임이 두드러진 시기라 할 수 있겠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국가권력과 갈등관계에 있다가 신자계층구성의 변화, 형식적이나마 민주화가 진행되고 시민사회가 확장되면서는 사회복지 영역에서 제휴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4 불교

불교는 종교의 정치세력화 논의에서 벗어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불교 역시 정치세력화 혐의를 벗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해방 이후 대부분의 시기의 개신교, 이승만 정권 중간시기 까지의 가톨릭 정도는 아니지만 불교도 노태우 정권 때 제휴 전략을 선택한 경험이 있다. 그리고 황우석 사태에서 드러난 것처럼 불교계도 정치인, 정부기구 내 고위 인사와 유대관계를 맺으려 시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현재도 새로운 것을 정책적으로 추진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기득권을 지킬 수 있을 만큼의 권력은 가지고 있다. 과거 개신교 보수 집단 못지않게 독재정권 시기에 권력을 정당화하고 그 대가로 기득권을 지키려 노력한 것도 종교세력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개신교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인 의미에서 권력이 적었고, 개신교가 영향력을 행사할 때 피해자의 위치에 서 있다는 것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다른 종교들이 있지만 3대 종교가 전체 종교인구의 98%를 독과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의 종교세력화 시도는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노력이기 때문에 그리 주목할 만한 사례는 아니라고 판단된다. 이에 최근 종교세력화의 새로운 사례로 나타난 종교정당의 경우만 열거하고자 한다.

2.5 ‘종교정당’ 설립 사례

2.5.1 통일교 : 평화통일 가정당

평화통일가정당은 통일교에서 자신들의 이념을 바탕으로 설립한 정당이다. 두 차례 창당하였으나 장기 휴면과 총선에서의 득표율이 낮아 정당등록이 취소되었다. 평화통일가정당 이전인 2003년 3월에 통일교에서는 천주평화통일가정당을 창당한 바 있다. 그러나 정당법상 정당등록 취소 사유에 해당하는 '최근 4년간 총선이나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 참여하지 않거나 총선에서 유효투표 총수의 100분의 2이상을 득표하지 못한 경우'에 해당돼 2007년 3월 19일 정당등록이 취소되었다.

그러자 “가정이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 섭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2007년 8월 28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백범기념관에서 평화통일가정당으로 개명 재창당하게 된 것이다. ‘평화통일가정당’은 ① 가정이 행복한 나라, ② 도덕정치 구현, ③ 풍요와 번영의 통일한국 건설, ④ 세계평화 주도하는 글로벌 한국을 4대 총선 비전으로, ① 3자녀 이상 가정 1인 대학까지 무상교육 및 병역 혜택, ② 3세대 이상 가정 주거개발 및 세제 지원, ③ 30년차 부터 금혼식까지 부부 백년해로수당 7차례 지급, ④ 신 호주제 및 변성금지법 제정, ⑤ 간통 및 성범죄자 처벌 강화 등을 주요 정책으로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를 법제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가족행복특별법'을 제정하고, 도덕정치 실현을 위한 지방선거 정당추천제 전면 폐지를 주요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 당은 ‘통일한국 건설'을 위한 방안으로 ① 실향민 고향 방문 실시, ② 남북총선 대비 전담기구 설치, ③ 비무장지대 생태 평화공원 조성 등을 제시했다. 또 ④ 한일 해저터널, 유라시아 고속도로, 베링해 월드피스킹 브릿지 앤 터널 건설 추진, ⑤ 평화유엔 창설활동 지원 등을 통해 '글로벌 한국'을 만들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이들은 전국에서 150만∼200만 표를 얻어 지역구와 비례대표를 합쳐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20석)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4.9 총선 후보 등록 첫날 184개 지역구에 후보를 냈으나 개표결과 득표율 2%를 넘지 못해 정당등록이 취소되었다.

통일교는 이번 정당설립 시도 이전에도 국내외 유력 정치인들과의 관계 강화를 통한 후원세력 확보, 문선명의 정치적 연설이나 성명서를 통한 집권자/집권세력 지원, 통일교에 우호적인 후보에 대한 선거 자금 제공 및 활동참여, 1960년대의 ‘국제승공연합’ ․ 1987년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 활동과 같이 지배권력의 정치적 목적 대행 등의 방식으로 적극적인 정치세력화를 시도한 바 있다. 이러한 전략을 실행하기 위하여 천문학적 규모의 정치자금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한에서는 전두환 정권시기에 정권과 밀월관계에 있다는 평가를 들을 만큼 이들의 전략이 성공적인 때도 있었다.

그러나 통일교는 적어도 남한에서 주류 종교인 개신교계로부터 이단으로 간주되어 정당성이 취약하여 종교적인 외양으로는 교세 확장에 한계를 느꼈을 것이고, 아울러 이러한 취약한 종교적 기반을 정치적 영향력으로 보완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러나 2004년 지방선거, 2008년 총선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정당 존속에 필요한 최소 득표율도 기록하지 못함으로써 정당설립 방식으로는 정치세력화가 난망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2.5.2 개신교 : 기독 사랑 실천당

최초의 개신교 정당으로는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조선민주당은 1946년 신탁통치를 반대하던 조만식이 김일성에 의해 평양 고려호텔에 연금되고 김일성 계열인 최용건이 장악하면서 유명무실화 된 바 있다. 하지만 조선민주당은 최초의 개신교 정당이나 후대의 개신교 정당과의 관련이 없다.

1997년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한사랑 선교회의 김한식 목사 등이 ‘바른 정치연합’을 창당하고 대통령 후보자로 김한식을 선출하였으나 선거에서 개신교계 신자들의 외면으로 낙선한 바 있다. 김한식은 당시 4만여 표를 얻었다.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는 선거 10일전 ‘한국 기독당’으로 창당 비례대표 정당득표율 1.0%를 기록하여 자민련에 이은 6위를 기록하였지만 2.0%에 미치지 못해 등록이 취소되었다.

2008년 1월 15일 한국기독당과는 별도로 서울특별시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전광훈 등이 사랑실천당을 창당하였고, 30일 창당발기인 12,000여 명의 명단을 언론에 공개하였다. 2008년 2월 29일 기독교회관 2층 강당에서 ‘사랑실천당’과 ‘기독민주복지당’이 통합을 선언하고 합당 출범하여 초대 대표로 최수환 장로를 선출하였다. 4월 기독교에서 이단으로 간주하여 비판하는 종교인 통일교의 정당인 평화통일가정당에 대항했으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정당 득표율은 2%를 넘겨 당은 존속하게 되었다(뉴스앤조이, 2008.4.12).

기독사랑실천당은 정강정책으로 “① 사랑과 공의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한 정당, ② 정직하고 능력 있는 정치를 지향하는 정당, ③ 국가적 사회적 통합과 상생을 추구하는 정당, ④ 세계질서의 영적 지도적 가치를 주도하는 정당” 등 네 가지, 핵심정책으로는 ① 자유 민주주의, 시장경제, ② 안보, 한미동맹, 유비무환, ③ 화합정책, ④ 깨끗하고 건강한 정치, ⑤ 남북통일문제, ⑥ 정치권 복음화운동, ⑦ 과학기술육성과 부강한국 건설, ⑧ 지방자치의 효율과 활성화 등 8가지를 내세웠다.

개신교 보수 교단 출신으로 구성된 정당으로 평화통일가정당에 비하여 명망가들이 있었으나 의회진출에 동반 실패하였다. 지지기반인 개신교 보수세력이 이 정당을 지지하지 않고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한나라당을 지원함으로써 한 개의 의석도 차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이 정당의 대표가 ‘2007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를 공개 지지하였고, '기독사랑실천당'을 한나라당의 배후 지원세력으로 규정함으로써 굳이 이 정당에 투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선거운동과정에서 정강정책과 거리가 먼 통일교의 ‘평화통일가정당’을 견제하려는 의도를 드러내 애초의 창당 목적 자체가 불분명하였음을 보여주었다.

통일교는 한국에서 부족한 정당성을 보완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개신교 정당은 개신교의 이념을 현실 정치에서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정당을 설립하였으나 현실 정치의 벽을 넘을 수 없었다. 기독사랑실천당의 경우 지지세력인 개신교 보수세력의 지지기반이 한나라당과 겹치고, 이들이 2007 대선 때 이명박 장로를 대통령으로 지지하고 총선도 이의 연장에서 한나라당을 지지하게 되면서 소기의 성과를 달성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명박 장로가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다수의석을 차지하게 되면서 자신들이 정당을 만들어 직접 움직이는 것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이런 상황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한나라당의 후원세력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정당 설립 시도 보다 더 주목하게 되는 것은 개신교 보수기득권 세력이 뉴라이트에 참여하고, 실제 이명박 정부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현상이다.

3. 종교의 정치세력화의 문제점과 원인 분석

종교의 정치세력화에 문제 소지가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우선 가장 우려스러운 것으로 종교 전쟁에 가까운 갈등의 빌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서명원은 “많은 한국 사람들이 한반도 내에서 종교적 이유로 전쟁이 일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주장함으로써, 국내에서 종교간 갈등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강한 것”(서명원,“종교간 화해의 실마리를 찾아서”,『불교평론』(2008. 겨울호) 을 우려한다. 물론 오경환 신부 같은 이는 “한국에서처럼 민족과 언어가 통일되어 있으면서, 종교가 사회계층과 겹치지 않은 사회에서는 계층분쟁이나 종교분쟁의 가능성이 적다”(오경환,《종교사회학》, 서광사, 1988)고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재 상황을 보면 사회 계층에 따라 종교가 편제 되고, 반세기 이상 기득권을 가진 개신교가 교세, 재력, 공격적인 배타주의, 기득권층의 이해관계와의 동일시를 바탕으로 국가권력의 옹호를 받으며 한국의 종교시장을 교란하는 것은 물론 한국 사회 안에서도 기득권을 지키고자 시도하는 것은 갈등을 넘어 분쟁의 소지를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미 존재하는 남북 갈등, 남남 갈등에 이어 종교까지 갈등 요인으로 부각되는 것을 우려하는 입장이라 하겠다.

두 번째는, 종교의 정치세력화는 종교간 갈등을 촉발하여 다원주의적 공존상태를 깨트리는 문제 외에도 종교 자체의 본질을 약화시키고, 궁극에는 자신을 세속 집단화하는 문제를 낳기 때문이다. 종교가 정치에 직접 관여하는 빈도가 늘어나거나 직접 정당을 설립하여 활동하게 되면 그 종교는 불가피하게 정치 집단화되고, 궁극에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보편적인 진리를 따르기 보다는 상대적인 이해관계를 추구하게 되어 당파적인 집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스스로의 생명력을 약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현재 뉴라이트로 대변되는 개신교 보수기득권층의 정치참여, 현재 종교로써 보다는 기업집단으로 인식되는 통일교가 그 한 예라 할 것이다. 최근 개신교의 이러한 참여 방식에 대하여 아프간 피랍사태와 더불어 일반인들 심지어 개신교도들 조차 비난하고 있는 상황이니 이들의 과도한 정치참여, 그리고 이명박 정부와의 동일시는 미래가 그리 밝지 않다 하겠다.

마지막으로, 종교의 정치세력화를 통해 자신을 극단화 시키는 집단은 궁극에는 자기 종교 내부에서도 끊임없이 분열을 자초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배타적인 세계관을 가진 종교집단들은 일탈에 대해 특히 불관용적이다. 그들 자신만이 총체적으로 옳다는 확신은, 그들이 그릇된 것으로 여기는 여타 신앙과 실천에 대한 비난을 증대시킨다. 배타적인 종교집단들은 일탈 구성원에게 집단의 제재를 두려워해야 할 더 많은 이유를 제공한다.…일탈에 대항하여 힘을 합침으로써, 배타적 종교집단의 구성원들은 연대감뿐만 아니라 그들의 도덕적 정당성까지도 획득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내적, 외적 반대를 극복하고 승리하는 것이다.

그러한 집단의 핵심적인 정직한 구성원은 종종 순수하고 엘리트적인 특성들을 발전시키며, 더 나아가 갈등의 가능성을 조장한다”(McGuire, 1994). 처음에는 외부로 향하던 시선이 궁극에는 집단 내부에 있는 반대자들에게도 향함으로써 내부 분열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에 이어 궁극에는 집단의 존속 자체가 어려워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위험성을 안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 종교들이 여전히 정치세력화에 주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는 아직 충분한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기에 주로 필자의 견해를 피력하고자 한다.

필자는 역설적이게도 특히 개신교 보수 기득권세력의 정치세력화 움직임이 한국 종교의 다원성이 강화되었기 때문으로 본다. 2005년 통계청 인구센서스 결과가 보여주듯 개신교계는 지난 10년 사이 경쟁하는 다른 두 종교와 달리 교세 감소를 경험하였다. 이것은 같은 그리스도교 일파인 가톨릭의 급격한 증가세는 물론, 그동안 지속적으로 공격해왔던 불교의 증가세와 비교할 때도 초라한 성적표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이 막강한 재원을 쏟아 부어 세계 제2의 선교사 파견국을 만들었음에도 아프간 피랍사태에서 볼 수 있었던 것처럼 배타적인 선교관이 국내외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한국 가톨릭이 소극적인 선교전략을 펴고 있음에도 그들의 배타적이고 적극적인 선교전략 탓에 신자가 오히려 증가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해방이후 사회 각 영역에서 이들이 큰 영향력을 갖게 된 것과 비교할 때 역시 불만족스러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경쟁 상대였던 가톨릭의 대약진, 불교계의 비교적 큰 약진, 이에 반비례하는 개신교의 사회적 위신, 영향력이 그동안 절대 우위에 있었던 이들의 지위를 상대화시킨 것이 결국 이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결국 정치권력에 기대지 않고는 현재와 같이 개신교에게 불리한 종교, 사회 환경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기득권은 물론 교파적 이해관계를 관철시킬 수 없게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라 볼 수 있겠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뉴라이트’에 참여하는 개신교 인사들이 지난 십년을 한나라당과 같이 잃어버린 십년으로 간주하는데 이는 공교롭게도 개신교의 상대적 약화가 진행된 시기와 겹친다. 이 시기에는 남북화해 분위기 조성, 전 사회적인 민주화, 미국에 대한 한국의 상대적 자율성을 강조하는 분위기 고조, 종교의 다원적 공존, 모든 권위의 해체, 윤리의 상대화 등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이 뉴라이트에 참여하는 개신교 인사들에게는 시대에 역행하는 흐름으로 이해된 것 같다. 그들이 현 정부 출범과정과 현 정부 들어 주장하는 행태들을 보면 정확하게 지난 10년 동안 진행된 흐름과 정 반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정치세력화는 그들의 이해관계를 보장하는 권위주의 사회로의 회귀를 도모하는 시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교리적, 교파적 이해관계가 권위주의 사회,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 환경에서 더 잘 보장되는 것이기에 말이다. 그리고 이는 그들이 대변하는 사회세력의 이해(利害)관계를 대변하는 것이기에, 그들의 정치세력화는 교파적 이해이면서 계급적 이해이고, 이는 그들의 사회적 권력과 교회적 권력을 유지 또는 재생산하는 방안이 되기도 한다.

세 번째는 이들의 근본주의적이고 배타주의적인 신념 때문에 정치세력화를 통해 가톨릭은 물론 유일신을 믿지 않는 여타의 종교들을 약화시키고자 한다는 그야말로 순수하게 교파적이고 교리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입장은 앞의 두 번째 이유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들의 주장이 과도하게 세속적이고 정치적이어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마지막으로는, 임연태가 인용한 것처럼 그들이 현재 보유한 사회적 권력에 상응하는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는 기존 입장이다. 필자도 경험한 바이지만 학계, 법조계, 정치권, 경제계, 고위공직자 등에서 개신교 신자의 비율은 남한 종교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의 두 배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이러한 경향은 일제시대 부터 시작되어 해방 이후 현재까지 계속되었으니 이 영향력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계속될 것이라 보게 된다. 과거 약한 교세에도 불구하고 지배집단에 상당비율을 차지했던 것처럼 그들의 사회적 권력에 상응하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일 수 있겠다.

통일교의 종교세력화는 앞에서도 살펴 본 바와 같이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비정당화된 조건에서 합법적으로 자신의 지위를 보장받고자 하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이는 기득권을 가진 종교들이 취하는 전략과 다르기 때문에 같은 수준에서 보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종교들도 이런 전략을 부분적으로 취하고 있지만 다원적인 종교상황의 붕괴를 우려할 만큼 영향력이 크지 않고 종교 상호간에 직접적인 마찰을 일으키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지 않기에 역시 같은 수준에서 보지 않았다.

4. 종교의 정치세력화에 대한 평가와 전망

그러면 이러한 종교세력화는 실제 어떤 결과를 낳고 있고, 이를 어떤 관점에서 평가할 수 있는가?

4.1. 평가

가장 먼저 개신교 일각의 이런 시도는 이웃 종교 특히 불교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고 있고, 이에 대한 부정적 대응을 초래하는 공격적인 행위일 뿐 아니라 궁극에는 자신들의 생명력을 약화시키는 자기파괴적인 시도라 평가할 수 있겠다. 한국은 여러 종교들이 공존하지만 개신교, 불교, 천주교가 3대 종교로서 교세, 사회적 영향력에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고, 수백 개에 이르는 군소종교들(소위 6대 종단에 속하는 원불교, 천도교, 유교를 제외하고)은 이미 이러한 독과점 상황에서 정당성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이들에게 다원적 공존은 희망사항일 뿐이다. 게다가 3대 종교로 정립되는 과정에서도 개신교, 천주교를 포함하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우대정책이 공공연히 시행되어, 불교가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불편한 감정을 갖게 되었고, 다시 그리스도교 안에서는 교리상의 차이 때문에 개신교와 가톨릭간의 갈등이 있다. 공공연한 비방과 공격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 3대 종교 안에서는 개신교가 불교에 대하여 각종 훼불행위를 직접 자행함으로써 기존의 불신을 더욱 강화하였다.

이처럼 한국에서는 종교들 간에 대화와 협력경험이 짧고 전체 종교 안에서는 독과점 구도, 3대 종교의 정립구도에서는 개신교가 양대 종교에 대한 공격적인 태도로 불안정한 공존이 이뤄지고 있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서로를 존중하며 공존하는 종교다원사회와 거리가 멀다. 일상적으로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해방 후 상당 기간 동안 기독교 우대정책이 시행되어 그 결과로 이미 종교 간 갈등의 요소가 잠재된 남한에서는 특정 종교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정치세력화를 도모하는 것은 갈등을 조장 또는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미군정, 이승만 정권 때 기독교계가 불교와 민족종교에 대하여, 심지어 같은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개신교에 대한 가톨릭의 경쟁의식이 종교 차별 그리고 이로 인한 종교간 갈등이 있었던 경우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김영삼 정권 때 자행된 일부 개신교도들에 의한 훼불(毁佛) 사건들과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 불교계의 항의를 받았던 여러 사건들이 이에 해당된다(임연태, “종교편향, 대한민국에만 있는 고질병”,『불교평론』(2008. 겨울호) . 이명박 정부를 지지하는 개신교계 인사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관계 뿐 아니라 교단의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들을 권력의 후원을 받아 해결하고자 하면서 불교계 뿐 아니라 시민들의 반발도 사게 되었다. 이는 한국의 종교문화가 종교다원화 사회로 성숙되어 가는 것을 방해하고, 종교문제를 종교 내부 문제가 아니라 공적인 의제가 되게 함으로써 결국은 모든 종교의 위신을 약화시키고 있기에 지양해야 할 행위이다.

두 번째는, 세계관이 다원적으로 공존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특정 종교 정당의 강령이 자신들의 신앙과 윤리에 반대되는 일이 흔히 존재한다. 유럽과 같은 사실상 그리스도교 국가들에서는 이런 문제가 적지만 한국과 같이 종교가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정당의 강령과 충돌하는 일들이 자주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일단 특정 종교를 기반으로 정당을 만들었으면 그 정당은 어떠한 종교(교회)적 제도도 종파적인 제도가 아니라, 국민 전체의 복지에 대해 책임을 지는 하나의 정치적인 정당이다.

그런데 이런 방향을 따르지 않고 정강정책만 일반 정당을 표방하고, 실제적인 활동에서는 정작 자신들의 종교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기에 기본적인 정당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다.사실 현실 정치에서 어느 종교도 윤리적으로 완벽한 행위주체가 될 수 없는 까닭에, 그 시도가 성공적이지 않을수록 종교의 가치를 훼손하게 된다.

남한의 경우 적극적인 정치세력화를 주창한 종교인들이 대부분 기득권 세력을 대변하는 정당과 제휴함으로써 그 정권의 실패가 곧 자신의 실패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실패의 경험은 해당 종교를 정치화함으로써 종교로서의 공신력을 약화시키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래서 종교가 점차 세속기구화 되었고, 이것이 다시 종교의 탈신성화를 촉진한 것이다. 이는 종교가 종교로서의 공신력을 확보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하는 것을 통해 종교의 공신력을 얻고자 함으로써 오히려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만들었다.

세 번째로, 종교세력화는 종교가 정치영역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반대로 종교에 대한 간섭을 초래해 종교의 정치예속화를 초래할 수 있다. 역사 안에서 종교는 지배계급의 헤게모니 전략에 편입되는 경우가 허다했다(Maduro, Religion and Social Conflicts(강인철 역,《사회적 갈등과 종교》, 한국신학연구소, 1988). 
신정(Theodicy)이 가능한 경우가 아니라면 다원사회에서 한 종교의 독점적인 지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종교의 과도한 정치관여는 오히려 국가에 대한 예속을 초래하여 오랜 동안의 경험을 통해 어렵게 형성된 정교분리의 원칙을 파괴할 수 있다. 이 역시 인류가 오랫 동안 갈등과 투쟁을 통해 얻은 유산을 파괴하는 행위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종교가 사회 통합 보다는 갈등을 부추기는 역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한국은 식민지, 분단, 전쟁으로 이어지는 굴절적인 역사적 전개과정 때문에 여러 갈등의 요소가 상존하고 있다. 사회가 다원화되면서 남북, 남남 갈등에 이어 다양한 이해관계에 따른 갈등이 발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종교가 새로운 갈등의 요소로 등장하게 되면, 그리고 이 종교들이 이러한 갈등의 분단선을 따라 자신과 특정 이해집단을 동일시하게 되면 갈등을 넘어 분쟁으로 까지 치달을 수 있다. 이는 종교가 역기능을 넘어 스스로 공적(公敵)이 되는 행위이다.

4.2 전망

어느 종교나 집단이든지 '우리-그들'의 이분법을 가지고 있다. 이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나 이 구분에 대한 의식이 과도한 것은 문제가 된다. 맥과이어는 이러한 의식의 과잉상태를 특수주의적 세계관으로 개념화한다.

"특수주의적 세계관은 외부집단에 대한 불관용과 편견을 북돋운다. 종교적 특수주의는 자신의 집단을 유일하게 정당한 종교로 간주하는 것을 말한다.…몇몇 종교들의 신앙체계는 비신도들에 대한 특수주의적 판단을 포함하고 있다. 실로 종교적 특수주의는 반대의식을 필요로 하는 듯 하다. 그래서 어떤 이의 종교가 몇몇 다른 종교에 대해 승리를 거둔 것처럼 여겨진다. 내부집단은 자신을 대비시킬 수 있는 외부집단을 필요로 한다. 나머지 인류에 대하여 특수주의를 취하는 종교적 세계관들은 그다지 성공하지 못한 세계관들보다 갈등을 촉진할 가능성이 더 많다.…특수주의는 다른 신앙에 대한 호전성을 제고한다"(McGuire, The Social Context(김기대 ․ 최종열 역, 《종교사회학》,민족사, 1994).

이미 이러한 상황을 한국 사회에서는 반세기 이상 겪고 있다. 이는 비단 지배적 지위에 있는 개신교만이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종교가 어느 정도 이러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현재는 이러한 신념을 공적인 영역에서 공공연히 표현할 수 있을 만큼 '힘'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러므로 특정 종교의 독선, 전횡만을 문제 삼아서는 안 되고 모든 종교가 이러한 요소들을 인정한 상태에서 상호공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바람직한 종교다원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각 종교가 가진 특수주의적 세계관이 여러 종교들의 평화적 공존을 깨트리지 않을 만큼 종교 내부의 노력이 필요하고, 정치권력도 제도적으로나 법적으로 정교분리를 보장하고 공정한 조정자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다원사회가 거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갈등과 투쟁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한국사회는 다원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갈등하는 상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한국인의 종교의식이 배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이 때문에 일부 근본주의자들이 더 극단화될 수 있고, 더 정치화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한국인 다수가 갖고 있는 다원주의적 의식은 이런 교파의 성장을 억제할 것이다.

현재와 같은 3대 종교의 정립구도에서 불교가 약진하는 것도 긍정적인 현상이다. 불교의 약진은 한국인의 다원중첩적인 종교의식이 제도 안에서 힘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가톨릭도 이 방향으로 신자들의 의식이 변하고 있다. 그리고 군소종교들에서는 현재의 구도를 위협할 만큼 교세나 힘을 가지지 못하였다. 그러니 당분간 3대 종교의 정립구도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고, 개신교 내부에서도 점차 다원적 공존에 대한 의식이 높아져 가고 있으니 여전히 불안정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현재 상태보다는 진전된 상태가 될 것이라 전망하게 된다.

또한 이제까지 나타났던 종교간 갈등이 정치권력의 편파적 태도에서 비롯되었던 바 이는 민주화가 더 진전되면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친 개신교적인 현 정부 뿐 아니라 앞으로도 정당성이 취약한 정권들이 유혹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정교분리가 엄격하게 보장될 수 있도록 시민사회의 견제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종교 자체의 쇄신과 정화가 급선무인 것은 물론이다. 이미 여러 연구자들이 분석하였듯이 특정 종교내부의 권력화가 정치권력과의 동일시를 초래하였다. 그리고 이미 자본주의화 된 종교의 운영논리도 비본질적인 문제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종교 내부의 건전한 비판세력의 존재가 교권 집단이 이런 유혹에 빠지는 것을 견제할 수 있다. 종교의 정치세력화는 사회 민주화와 각 종교내의 쇄신/정화 노력이 진전될 때 억제될 수 있는 것이다.

5. 결론

종교의 정치세력화는 종교의 본성 가운데 하나이다. 국가권력도 정당성의 기제로서 종교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종교나 정치권력 모두 인간에 대한 영향력을 확립하고 유지하는데 관심이 있어, 지배하는 힘을 획득하거나 유지하기 위하여 서로의 힘에 대해 흔히 서로 거래하거나 싸우거나 타협해야 한다. "종교는 종교적 활동과 종교목표에 도달하는 기술을 방해하지 않는 모든 정치적 형태 아래서는 '편안하다'. 반면에 정부 혹은 국가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종교형태를 일반적으로 선호 한다"(이원규, 1997 : 452).

이 때문에 종교의 정치세력화는 앞으로도 계속 한국사회의 중요 쟁점 가운데 하나로 남을 것이고, 또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현재와 같은 문제도 계속될 것이다. 다만 현재와 같이 배타적이고 이웃 종교에 대하여 공격적이며 사회적 권력까지 향유하려고 하는 수준에까지 이르지 않도록 억제하는 것이 중요하다. 종교가 세속권력을 탐하는 것은 문제지만, 인류사회의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조차도 종교는 세속 정당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종교는 본연의 역할에 충실할 때 권위를 얻을 수 있고, 그 권위의 정도에 따라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종교가 통합에 앞서지 않고 오히려 갈등과 분열을 조장한다면 그것은 해당 종교나 사회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부디 성숙한 한국의 종교문화 형성을 위해 종교계가 자성하기를 소망해본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박문수(한국 가톨릭문화연구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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