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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는 맞춤형입니다[유상우 신부] 2월 24일(연중 제7주일) 1사무 26,2.7-9.12-13.22-23; 1코린 15,45-49; 루카 6,27-38

2015년 12월 8일 선포된 자비의 대희년, 이 대희년을 시작하면서 교황님께서는 오늘 등장하는 루카 복음 6장 36절의 말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를 모토로 삼으셨습니다. 교황님께서는 희년을 선포하시는 칙서 ‘자비의 얼굴’에서 “자비는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행위를 가리키는 열쇠가 되는 말”(9항)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사실 자비라는 단어는 그리스도교에만 국한된 말이 아닙니다. 자비는 종교나 이데올로기, 가치관에 구애받지 않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거부감 없이 다가오는 단어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자비라는 말은 현대 사회에서 그 의미가 갈수록 옅어지고 있는 단어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도 일찍이 이를 지적하신 바가 있습니다. “현대의 사고방식은 과거의 사고방식보다 훨씬 더 자비의 하느님에 대립되는 듯하며, 자비라는 이념 자체를 생활에서 배제하고 인간 마음에서 제거하는 경향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역사상 알려지지 않았던 과학의 기술의 엄청난 발달로 땅의 주인이 되고 땅을 굴복시켜 다스리게 된 인간에게는 ‘자비’라는 말과 개념이 매우 거북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땅에 대한 이 지배를 흔히 일방적이고 피상적으로 알아들음으로써 거기에는 자비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회칙 ‘자비로우신 하느님’, 1980, 2항)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견해를 따라가 보면, 자비의 실천에는 내가 감수해야 될 손해와 불편함이 녹아 있기 때문에 머뭇거려진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자비는 우리 그리스도교인에게 포기할 수 없는 가치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께 자비를 청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미사를 드릴 때마다 그 시작점에서 주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미사 경본이 개정되기 전에는 자비송 때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한 것과 같이 자비(Misericordia)라는 단어는 라틴어로 마음, 심장을 뜻하는 Cor와 불쌍한 이들을 의미하는 Miseri가 합쳐진 것에서 그 뜻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자비를 베푼 '착한 사마리아인', 빈센트 반 고흐. (1890) (이미지 출처 = commons.wikimedia.org)

통상적으로 자비가 이루어지는 모습은 갖가지 모양새로 부족한 무언가가 채워지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그러기에 일반적으로 자비는 동등한 관계에서 발생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자비를 선사하는 쪽인 상대적 강자와 그 자비의 수혜자인 상대적 약자가 존재합니다. 다만 여기서 강자와 약자는 힘의 논리가 아닌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상대적 개념임을 염두에 두시면 좋겠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나에게 필요하지만 결핍된 것, 내 힘으로 채우기에는 역부족인 무엇인가가 채워질 때 자비를 느끼곤 합니다. 그러기에 진정으로 자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언지를 생각하는 세심한 마음 역시 요구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자비의 기준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그 사람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 주는 것이 바로 자비의 참 모습입니다. 사랑이 부족한 원수에게 사랑을 심어 주는 것, 미움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에게 잘해 주는 것, 저주하는 이에게 결핍된 축복을 채워 주는 것.(루카 6,27-28 참조) 복음 전체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겠지만 실제로 당신께 자비를 청하는 수많은 사람에게 주님께서 베푸신 자비가 그러하였습니다. 복음에 기록된 많은 치유이야기들은 자비를 청하는 상대방과 그에 맞게 병을 고쳐 주시는 주님의 모습의 형태를 공통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렇게 예수님께 있어서 자비는 맞춤형이었습니다.

이렇듯 주님은 다양한 모습으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보여 주신 자비는 맞춤형뿐만 아니라 보편성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몸을 내어 주시는 자비의 절정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몸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 머무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표현을 빌리자면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루카 6,30)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 표현방식 역시 맞춤형인 동시에 보편적입니다. 우리에게 원초적으로 가장 친숙한 행동인 먹는 행위에 알맞은 모양새로, 다시 말해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모습으로 주님은 우리에게 자비를 보여 주십니다. 이 주님의 자비에 힘입어 우리는 오늘 2독서에 나오는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첫 인간의 모습뿐만 아니라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 역시 지닐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1코린 15,49 참조) 자비는 내 입장에서만 가지는 선한 생각이나 행위가 아닙니다. 교황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고 그들의 절실한 바람을 채워 주는 데서 자비는 시작합니다.('자비의 얼굴', 8항 참조) 

이번 주일을 보내면서 아버지처럼 자비로워지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우리 이웃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일 것입니다. 내 중심적 생각과 가치, 거기서 나오는 호의들을 잠시 접어 두고, 우리 이웃들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 줄 수 있는, 주님을 닮은 자비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용기와 은총을 함께 청하도록 합시다. 그렇다면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표현대로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루카 6,38) 당신의 자비를 선사하실 것입니다.

유상우 신부(광헌아우구스티노)

천주교 부산교구 사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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