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구한 거리의 목숨, 박대성 씨 사연 책으로

박대성 씨는 55년생이다. 노숙자였다. 알코올 중독에 빠져 모진 목숨을 이어왔다. 당연히 가족을 거느리지도 못했다. 그 연배의 보통 남자 인생을 상상한다면 그는 ‘빠져’ 있는 존재다.

지금 그는 스스로 돈을 벌어 지난 여름 셋방이나마 자신의 생활공간을 꾸몄다. 2년 정도 피붙이 같던 술과 담배를 끊었다. 그러자 몸이 환해지고 정신이 무척 가볍다. 도움을 받던 입장에서 도움을 주는 봉사자로 변신했다. 바람 앞 인생을 단언할 수는 없지만 신앙과 사랑에 의지하며 제2의 인생을 충분히 살기를 바란다.

노숙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크게 두 가지. ‘측은지심’에 약간의 도움을 주는 이들과 혀를 차며 차가운 시선을 보태는 이들. 그런데 사람 사는 이야기와 인생사가 보는 것처럼 어찌 그리 단순하랴. 핑계 없는 무덤 없듯 모든 인생에도 나름의 곡절이 있는 법이다. 그의 사연은 이렇다.

염전에 팔려가 노역도 살아

서해 작은 섬 연평도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것부터가 시작이다. 황해도 옹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그의 아버지가 6·25 한국전쟁으로 배 두 척을 가지고 연평도로 내려왔다. 섬에 태풍이 들이닥치던 날 배를 살피러 나갔던 아버지가 백사장에서 시신으로 발견되고 말았다. 울부짖다 까무러친 아내의 태중에는 아기가 자라고 있었다.

몇 달 뒤 태어난 아기에게 젊은 과수댁은 젖도 제대로 물리지 못했다. 친지들에게 떠밀려 섬 밖으로 사라진 것이다. 그 아기는 할머니를 어머니로 알고 자랐다. 14살 어린 나이에 그는 거리를 헤매기 시작했다. 흐트러진 마음을 못 잡고 집을 나와 여기저기 쏘다녔다. 어느 아저씨의 꼬임에 빠져 섬 염전에 팔려가 노역을 살았다.

3년여 만에 노예살이에서 풀려난 후 할머니를 다시 찾았다. 잠시 직장생활도 했지만 급작스런 할머니의 죽음은 그를 또 다시 거리로 몰아세웠다. 연락이 닿은 어머니가 있었지만 오랜 이별의 시간을 거슬러 모자 관계를 회복하기 쉬울 리 없었다. 핏덩이를 놔두고 훌쩍 떠나버린 어머니에 대한 서운함과 서러움, 울분과 원망 같은 것이 너무 단단했다.

언제부터 거리에서 한뎃잠을 자는 노숙자 신세가 됐는지 그는 뚜렷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그저 오갈 데 없이 역전에서 지내는 사람들과 술 마시며 어울렸다. 술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집도 절도 없는 채 거리에서 지내던 어느 날, 그는 죽어야겠다고 작심했다. 마침 후미진 곳에 빈 비닐하우스가 있었다. 그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잠만 잤다. 아흐레 동안. 간혹 잠에서 깨어나도 일부러 물조차 안 마셨다. 하지만 그것마저 뜻대로 안됐다. 공사 인부들이 들이닥쳐 비닐하우스를 철거한 것이다.

“아저씨, 왜 여기 누워있어요? 가세요, 가! 위험해요.”

겨우 겨우 동인천역으로 가서 계단에 앉아 있는데 무슨 소리가 들렸다.

“화수동에 민들레국수집이 생겼어요. 누구든지 오세요. 돈 없어도 됩니다. 와서 국수 드세요.”

2003년 4월 1일 만우절. 서영남씨가 밥 굶는 노숙자를 위해 국수집을 열었지만 알려지지 않은 탓에 찾는 사람이 없자 직접 노숙자를 찾아 나선 것이다. 그는 부르러 온 사람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화수동 골목길을 돌아 국수집 앞에 내렸다.

하지만 여러 날을 굶은 터라 몸을 가눌 힘도 없던 그는 맛난 국수를 앞에 두고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속에서 받아들이지를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그는 민들레국수집과 초기부터 인연을 맺고 ‘VIP명단 1호’를 장식했다.

노숙자에서 민들레국수집 VIP로

민들레국수집 주인장인 서영남 씨는 그를 위해 국수집 2층 다락방에 잠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며칠 몸을 추스른 다음부터 그는 국수집 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설거지를 했다. 차츰 상차림이며 반찬 준비를 도왔다. 자주 오는 손님들과 농담도 주고받을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 그러면서도 여덟 번 가출을 하고 아홉 번째 돌아왔다. 알코올 때문이었다.

여성 손님이 오면 그의 얼굴에는 반기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모르겠어요. 여자들은 그냥 싫더라고요. 그냥 좋지가 않아요. 여자를 보면 괜히 신경이 곤두서요. 엄마가 떠오르고….”

그는 서영남 씨를 따라 무기수와 장기수들이 갇혀있는 경북 청송 감호소를 방문한다. 한 형제의 자기소개를 듣고 마음이 너무 찡했던 그다. 얼마 전부터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에 행복하다는 형제에게 그는 자꾸 마음이 쓰인다.

무기수와 의형제

그는 교도소에 있는 형제 두 사람에게 매달 1만원씩 영치금을 넣어주고 있다. 1만원은 교도소 안에서 한 달 동안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생계비다. 더 보내주고 싶지만 우선은 형편 닿는 대로 시작한 것이다. 인천에서 청송까지 먼 길이다. 그러나 청송에 가는 것이 그는 소풍처럼 즐겁다.

처음으로 면회를 받아봤다는 무기수와 의형제를 맺었다. 10년을 감옥에서 보냈으니 언젠가는 감형을 받아 출소를 하면 사글세방이라도 하나 마련해 주고 싶다. 예전 그가 원망과 술로 살았다면 이제는 국수집과 청송 교도소의 형제들이 그의 중심을 잡아주고 있다.

그는 지금 예전엔 안 보이던 것들이 새록새록 눈에 들어오고 느낌도 달라졌다. ‘아, 이런 세상도 있구나’ 싶다. 마치 땅 굴 속에 몇 년 동안 있다가 바깥 세상에 처음 나온 사람처럼. 조금씩 자신에 대한 미더움도 생겼다. 곧잘 웃고 사람과 눈을 맞춘다. 낯선 사람과도 대화를 나눌 정도다.

그는 목요일과 금요일, 일주일에 이틀씩 막노동 일을 나간다. 민들레국수집이 쉬는 날인데 자신에게 필요한 생활비 월 20만원만 벌고 나머지 시간은 국수집 일을 거들기 위해서다.

이러한 그의 이력은 내년 봄 책으로 엮어질 예정이다. 성바오로딸수도회가 운영하는 성바오로출판사에서 기구한 삶을 살아온 5명의 이야기를 모음집 형태로 묶어 선보일 계획이다. 그가 말한 내용을 2명의 작가가 받아 적으며 정리하기를 2년, 드디어 최근 마지막 교정을 거쳐 출판사로 원고를 넘겼다.

“책 나오면 책에 내 사인을 해주기로 약속한 사람이 벌써 몇 명 있어요.”

난 원래 가진 없는 사람이잖아요

본인 몫의 인세는 출판사를 통해 이미 지정기부하는 것으로 처리했다. 책에 대한 별도 대가를 받고 싶지도 않고 굳이 필요도 없었다. 다만 책이 많이 팔린다면, 그래서 책을 읽는 사람이 도움을 받고 자신에게 돌아올 몫으로 누군가가 힘을 얻기를 바랄뿐이다.

“난 원래 가진 게 없는 사람입니다. 노숙자였잖아요. 새로 태어났다는 생각으로 잘 살고 싶어요.”

흙빛 얼굴과 쪼그라든 몸, 잊혀진 구석 같던 사람. 그러나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사람이라고 보이지 않을 만큼 사랑은 사람과 세상을 바꿔 놓고 있었다. 눈빛과 표정, 행동에서 이제 조금은 세상을 대적하며 농이라도 걸 여유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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