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시 - 박춘식]

지우개 (이미지 출처 = Pixabay)

하늘 지우개를 받아

- 닐숨 박춘식

 

노령(老齡)에 가장 즐거운 것은

무엇이든 배우는 일이라는 말을 듣고

저의 발길이 보타니컬 아트에게 갑니다

꽃을 그리다가 제멋대로 나가는 연필을 들고

두리번거리니까 젊은 선배가 지우개를 줍니다

고맙다며 받는 순간, 하느님의 지우개로 느껴

엇나간 그림을 지우기 전에 기도합니다

 

‘하느님,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의 죄악을 지워 주소서.‘ (시편 51:3)

 

머지않아 몸통 벗고 4차원서 오리엔테이션 받을 때

하늘 지우개를 받아, 이승의 온갖 허물을

말끔 지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며

오늘은 지우개 먼저 놓고 그다음 연필을 듭니다

 

<출처> 닐숨 박춘식 미발표 시(2019년 1월 28일 월요일)

 

우리는 보통 고무 지우개를 사용합니다. 연필 이외 다른 지우개는 여러 가지 있습니다. 대상물 따라 물로 지우거나 어떤 경우는 흙을 많이 던져 지우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지우개는 곰곰 생각해 보니 ‘빛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의 죄를 지우시는 하느님의 지우개는 ‘사랑의 빛살’이라 여겨지고 무한하신 자비의 눈길이라는 느낌이 옵니다. 어릴 적 공책에 잘못 쓴 글자를 지울 때 ‘개시고무’(지우개)로 살살 여러 번 문질러야 했는데, 조금만 힘주면 종이가 찢어져 눈물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때 개시고무는 자전거 타이어 조각을 석유에 오래 담겨 두었다가 지우개로 사용했습니다. 악마는 과거의 잘못을 자꾸 기억하게 만들어, 하느님 앞에 죄의식을 깊이 가지도록 유인하면서 신자들이 신앙생활에 전진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럴 때는 악마까지 지울 수 있는 강력한 지우개가 있다면 아주 좋을 터인데, 하는 생각을 하다가 뒤이어 떠오른 악마 지우개는 기도와 희생 그리고 겸손이라는 어휘가 떠오릅니다.

닐숨 박춘식
1938년 경북 칠곡 출생
시집 ‘어머니 하느님’ 상재로 2008년 등단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