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티에레스 신부] 1월 27일(연중 제3주일) 루카 1,1-4; 4,14-21

이번 주일의 말씀은 매우 풍부한 내용들을 보여 주고, 각각의 말씀은 별도의 해설이 필요할 정도다. 보통 했던 것처럼, 우리는 복음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가난과 자유

루카 복음 구절은 우리에게 갈릴래아에서 시작된(루카 1,14) 예수님의 직분의 영역을 보여 준다. 에즈라처럼,(느헤 8,3 참조) 예수님은 성경을 읽고 있고, 이사야 구절은 예수님이 선포하려고 하는 하느님나라의 내용을 마련해 준다. 나열된 다양한 인간의 상황들은(가난, 유배, 소경, 억압; 루카 4,18 참조) 죽음을 표현하고 있다. 성령의 권능에 의해 메시아로 기름 부음을 받은 예수님은 역사의 충만함을 실현하기 위하여 생명의 원칙을 소개할 때에 죽음을 땅에 쓰러뜨릴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원의 계획으로 가득한 말씀 속에서 우리는 성서 계시의 중심 주제인 생명인가 죽음인가의 양자택일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모든 상황들은 똑같은 수위에 있지 않다. 근본 확언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루카 1,18)이다. 이 가난한 사람들은 삶의 기본조건이 결핍된 사람들이다. 해방이 가난한 이들에게 전달된다. 포로들, 앞 못 보는 이들, 억압받는 이들은 보통 가난한 이들의 조건이 더 악화된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경우의 사람들에게 우리는 자유를 선포한다. 이것은 또한 보지 못하는 사람이 시력을 회복한다는 표현이다. 히브리어로 쓰인 이사야 예언서의 원전에서 우리는 그가 “저주받은” 사람들이 지하 암흑으로부터 꺼내질 때 그들의 눈이 “열리게 된다”고 말하는 것을 발견한다. 루카가 인용한 이 구절의 그리스어 번역은 소경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감옥에 빛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들은 볼 수가 없다. 다른 한편, 이사야의 구절이 “부서진 마음들을 치유해 주고”라고 말할 때(이사야 58,6), 루카는 그 부분을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가도록 하는 것”이라고 바꾸었다. 예수님이 가난한 이들에게 선포하는 기쁜 소식이 바로 해방의 핵심이다.

이러한 접근 방식이 교회의 복음선포에 특징을 이루며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한다. 교회는 각자 모두가 수행해야 할 필요기능을 갖고 있는 지체다.(1코린 12,13-25)

해방 (이미지 출처 = Pixabay)

예언 직분은 남는다

루카는 “주님의 은혜로운 해”(루카 4,19)의 선포를 말함으로써 그의 관점을 고집한다. 매 오십 년마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제 소유지를 되찾을 때”(레위 25,13) 희년이 기념될 것이다. 왜냐하면 마지막 판결 때에 주님 홀로 땅의 소유주로 밝혀지기 때문이다. 모든 불의한 불평등을 깨뜨리면서, 이 희년의 해는 유다 백성의 구성원들 사이에 그리고 마침내 하느님과의 친교에 이르는 영원한 우정을 설립하는 데에 기여할 것이었다.

하느님의 다스림, 생명의 다스림은 인류 역사의 궁극적 의미다. 그러나 하느님의 현존은 역사의 잊혀진 백성들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에 근거하여 지금 시작된다. 이것이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루카 4,21)라는 루카의 증언이다. 지금이 그리스도 안의 총체적 해방의 때다. 예수님의 인성 안에서, 하느님나라는 현존해 간다. 그분의 추종자들로서 우리는 예언자, 교사, 권위들로서의 우리 역할을 온전히 수행해 가야 한다.(1코린 12,27-30) 우리 백성들의 가난은 우리가 이사야와 루카의 예언 직분을 수행하라고 요구한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
1928년 페루 리마 출생. 의대를 졸업한 뒤에 사제로 살기로 결단했다. 사제가 된 뒤에는 리마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면서 리마 빈민지역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목을 했다. 대표적인 해방신학자로 빈민의 관점에서 복음을 증거해 왔다. 주요 저술로는 "해방신학"(1971)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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