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교회 "남성과 정상인만이 사제가 될 수 있다"... 예수의 가르침에 어긋나

▲ 용산참사현장에서 시국미사를 드리는 신부와 수녀 그리고 시민들. 시국집회현장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수녀들은 주체적인 역할보다는 수동적인 위치에 머물고 있다.

가톨릭 신학생 입학조건, 성 및 장애인 차별 요소 많아

지난달 29일 가톨릭 사제들과 유가족들의 눈물겨운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용산참사현장을 찾았다. 각 교구별로 진행하고 있는 전국사제시국기도회가 열린 이 자리에는 사제들은 물론 수녀들, 시민 등 수백 명이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용산 참사 희생자들과 유가족 외에도 이명박 정권하에서 고통 받는 수많은 노동자, 농민, 철거민, 양심수들을 위해서도 기도했다. 

이명박 정권의 무자비한 인권탄압에도 교회 지도부가 침묵을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젊은 사제들이 용산현장을 굳건히 지키는 것은 가난하고 핍박받는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정신을 제대로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올바른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사제들의 용기 있는 행동에 시민사회는 아낌없이 찬사를 보내고 있다.  

한편으로 시국기도회 때마다 참석자의 절반이 수녀들로 채워지고 있는데 그들에게도 사제들처럼 기도행사를 주관하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 현장에 있던 천주교 지인에게 제안했더니 불가능하다고 했다. 한국에서 수녀들이 여러 제약으로 정의구현사제단 같은 사회운동조직을 만드는 것도 불가능하고 혹시라도 시국행사를 주도했다가는 교회 내부에서 엄청난 탄압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한국의 수녀들은 일상적으로 남성사제와 마찬가지로 평생 독신으로 신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있음에도 사제들의 그늘에서 '2등 국민' 취급을 받고 있기 때문에 사제단과 같은 대사회적 실천은 꿈도 꾸기 힘든 신세라는 것이다. 

가톨릭 여성운동가들은 여성운동의 영향이 교회 내부에 스며들 것을 우려해 바티칸 차원에서 진보적인 수녀들의 사회활동을 막는 조치들이 강화되거나 늘어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의 우려는 현실화되고 있다.  

지난 1일 뉴욕타임즈(NYT) 인터넷 판은 로마교황청이 가톨릭 체제에 비판적인 미국 수녀단체에 대해 조사에 들어갔다고 보도했다. 교황청은 수녀들의 생활상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미국수녀단체를 포괄하고 있는 '여성종교인 지도자회의(Leadership  Conference of Women Religious)'같은 단체는 여성의 사제 임명과 같은 이슈에 대해 개혁적이면서 사회활동에 적극적인 수녀들을 솎아내려는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조사 책임자인 미국 출신의 신앙교리성 장관인 윌리엄 레바다 추기경은 '여성 종교인 지도자 회의'가 조사받는 것은 이 단체가 지난 몇 년간 교황청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남성만이 사제가 되는 것과 가톨릭 교회가 구원의 우선순위에 있다는 교리 등을 부정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활동에 제한을 받으며 고된 사역에 종사하면서 미국 내 수녀들의 숫자는 1965년 약 18만 명에서 최근에는 약 6만 명까지 줄어든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같은 시기 가톨릭 인구가 늘어난 것에 비하면 큰 감소세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교황청이 여성의 사제임명과 사회활동에 대해 강경한 방침을 표명하는 것은 체제에 사활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 사제 임명은 세계 성공회가 분열되고 일부 보수적 사제가 가톨릭으로 개종할 정도로 민감한 사안이었다. 한편으로 가톨릭에서는 여성뿐만 아니라 장애인의 사제 서품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07년 청각장애인 박민서 신부가 서울대교구에서 부제로 서품되어 아시아 최초의 장애인 사제로 화제가 되고 올 4월 장애인의 날 행사에서 올해의 장애인상을 받았지만 이미 개신교에서는 수많은 장애인이 성직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렵다. 

대부분 국내 가톨릭 신학교의 입학기준이 되는 한국 천주교 사목지침서(1995년 6월4일 발효) 101조 1항에는 사제는 성무를 담당하는 제관이고 신자 공동체의 지도자이므로 신체적, 정신적 결함이 없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신학생 선발에 있어서 특별한 심사를 거쳐야 할 대상에 대해 ▲정상인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신체상의 결함이 있는 사람 ▲법정 전염병이나 다른 악성 질환에 감염된 사람 ▲가족 중에 유전성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거나, 본인이 정신병을 앓은 일이 있는 사람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는 가정 또는 불미스러운 결손 가정이거나 신자의 수계 의무를 소홀히 하는 가정에 속한 사람 등을 지정하고 있다. 여기서 불미스러운 결손가정에 속한 사람은 부모가 이혼하거나 첩의 소생일 경우가 해당된다. 

이러한 근거에 따라 예비신학생들을 관리하는 서울대교구 성소국(sungso.catholic.or.kr)도 신학생 자격을 ▲만 28세 미만인 사람 ▲가정에 결함이 없는 사람 ▲건강상태(정신적, 육체적)에 결함이 없는 사람 등을 신학생 자격으로 명시하고 있다. 일각에서 서울대교구 소속 박민서 신부가 사제가 된 것에 대해 가톨릭이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인 것으로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도 하지만 한편에서는 청각 외에 다른 곳은 멀쩡해(?) 보였기 때문이라는 비판도 있다. 

가톨릭이 사제서품에 대해 엄격한 기준을 갖는 것은 거룩한 제사를 수행하는 사람은 그만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흠이 없어야 한다는 전통적 사제관에 의거한 것이기는 하지만 일반 장애인들은 물론 중증장애인들의 사회활동이 점점 활발해지는 상황에서 가톨릭의 사제서품 기준은 너무 가혹한 면이 없지 않다. 만약 기업 등 사회의 다른 영역에서 같은 기준을 적용했다면 응시자들이 인권침해 또는 기회균등을 제한했다며 국가인권위나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을 것이다.  

구약성서, 거룩함 강조하며 월경하는 여성과 장애인을 불결한 존재로 간주 

가톨릭이 여성과 장애인에 대한 사제임명에 대해 엄격한 것은 구약성서의 영향이 크다. 기원전 5세기 바빌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에스라로 대표되는 유대의 사제계급은 자신들의 역할을 강화시키고 유대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성결을 강조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반영된 사제문제(영어로 사제를 뜻하는 priest에서 따와 P문서라고 함)를 작성해 구약성서 앞부분에 있는 레위기를 편집했다. 

레위기 안에서도 후대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부분이 성결법전(Code of Holiness, 레위기 17~26)이다. 성결법전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야훼로부터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세상의 다른 민족들과 구별된다는 점을 강조하며, 세속과 관계를 맺지 않고 의식적·도덕적으로 성결을 지킴으로써 그들이 유일하게 선택받았음을 나타내고자 했다. 법전에는 동물제사, 식사, 성결, 제사장의 행동, 언어, 성관계 등에 관한 규율과, 거룩하게 지켜야 할 절기의 목록 및 가난한 자들의 빚을 탕감하는 희년에 대한 법이 담겨 있는데 그 내용의 핵심은 '거룩함'이다.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일러라. 너희의 하느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레위기 19장 2절) 

레위기는 야훼가 거룩한 분이므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거룩함'의 반대되는 모든 '속된 것'(레위 21―22장)과 멀리하라고 강조한다. 성소가 거룩한 이유는 거룩한 야훼가 그곳에 존재하며 제사장들이 존중받는 이유도 거룩하신 야훼에게 예배를 주관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거룩함의 조건이 되는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러운 것과 접촉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더러운 것은 거룩한 신과 결코 혼동되어서는 안 될 주변의 우상이나 잡신들과 관계된 것, 그리고 생명이신 하느님과 반대되는 죽음과 관련된 것들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몸에서 나오는 각종 분비물들인 고름, 정액, 생리혈 등도 악령과 같은 초월적 힘을 지닌 존재들과 관련되거나 신에게 저주받은 것으로 이것들과 접촉하는 것도 사람을 더럽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이를 통해 여성과 장애인의 억압을 정당화 했다.  

여자가 몸에서 피를 흘릴 때에, 그것이 그 여자의 몸에서 흐르는 월경이면, 그 여자는 이레 동안 불결하다. 그 여자에게 닿는 남자는 모두 저녁때까지 부정하다.(레위기 15장 19절)  

"너는 아론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대대로, 너의 자손 가운데서 몸에 흠이 있는 사람은 하느님께 음식제물을 바치러 나올 수 없다. 몸에 흠이 있어서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없는 사람은, 곧 눈이 먼 사람이나, 다리를 저는 사람이나, 얼굴이 일그러진 사람이나, 몸의 어느 부위가 제대로 생기지 않은 사람이나, 팔다리가 상하였거나 손발을 다쳐 장애인이 된 사람이나, 곱사등이나, 난쟁이나, 눈에 백태가 끼어 잘 보지 못하는 사람이나, 가려움증이 있는 환자나, 종기를 앓는 환자나, 고환이 상한 사람들이다. (레위기 21장 17~20절) 

주께서 이집트의 악성 종기와 치질과 옴과 습진을 내려 너희를 치실 것이니, 너희가 고침을 받지 못할 것이다. 주께서는 너희를 미치게도 하시고, 눈을 멀게도 하시고, 정신착란증을 일으키게도 하실 것이다. (신명기 28장 27~28절) 

이러한 내용이 담긴 성결법전은 비슷한 성격의 신명기 법전과 함께 기원후 70년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될 때까지 이스라엘의 민법과 종교법의 토대가 되었고 사제로 이루어진 성전권력의 이해를 대변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교인의 구세주로 일컬어지는 예수는 여성과 장애인 등을 죄인으로 취급하는 이러한 성전체제에 맞선 인물이었다. 

예수가 살던 기원 후 1세기 팔레스타인 사회는 성결법전의 영향을 받아 재산, 정결, 성적 역할, 민족성에 따라 엄격하게 구분된 사회였다. 이 사회는 자신들이 거룩하고 깨끗하다고 믿는 쪽에 의해 규정된 체계에 따라 거룩한 쪽과 부정한 쪽으로 갈라져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정치․종교적으로 대세를 쥐고 있는 거룩한 쪽은 부정한 쪽을 죄인으로 몰아 세웠는데 이들은 앞서 언급한 사제들과 바리사이인들이었다.  

이 당시 사제들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한 죄의 기준은 율법과 성결법전에 기록된 것처럼 병자와 불구자, 여성, 이방인 등이었다. 이 성결에는 등급이 있는데 거룩함의 정도에 따라  (1)제사장 (2)레위인 (3)이스라엘 사람 (4)개종자(이방인) (5)해방 노예 (6)파문된 사제들 (7)성전 노예들 (8)사생아 (9)고환에 상처받은 자 (10)성기가 없는 자 등 열 가지로 서열화했다. 그리고 여성은 이방인보다 못한 대상으로 취급받았고 월경하는 여성은 아예 성전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했다. 

이와 같이 성전을 중심으로 한 정결의 계층 구조에서 밑바닥에 놓이는 자들은 가장 부정한 자들이었다. 여기에는 혈통이 정결치 못한 자들뿐 아니라 치명적인 신체적 불구자들이 포함된다. 거룩함이란 몸이 얼마나 정상적인지에 달렸다. 계급 체계로 구분하는 원칙은 장소의 계층화와 일치하는데 성전과 얼마나 가까우냐에 따라 결정되었다. 제사장들은 지성소에 들어가기 때문에 가장 거룩했다. 

그 다음으로는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레위인들과 성전 주변에 살며 성전 뜰까지 들어갈 수 있는 이스라엘인들이 거룩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유대인들에게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그리고 주변에서 중심(지성소)으로 가까울수록 그것은 야훼와 가깝고 정결했다. 유대인들의 사회세계는 이렇게 정결의 계급구조에 입각하여 형성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여성과 장애인은 거룩함에서 가장 먼 존재들이었다. 

예수는 거룩의 정치를 비판하며 여성과 장애인을 평등하게 대해 

이렇게 철저하게 대립된 세계에 등장한 예수는 이 경계를 허무는 운동을 벌여나갔다. 예수는 '하느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 (레위기 19장 2절)를 내세우고 사람들을 정죄하는 세력에 대해 자비로움으로 맞섰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장 36절) 

미국의 여성신학자 필리스 트리블은 자비는 예수가 쓰던 언어인 아람어나 히브리어로 어머니의 자궁처럼 됨'(woob-likeness)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아기에게 생명을 주고 영양분을 공급하여 자라게 하고 보듬고 보살피는 자궁, 신은 바로 이런 자궁과 같다. 그래서 '신은 자비롭다는 말은 '신은 곧 자궁이시다' 라는 것이고 이는 곧 신은 자궁이시니 '너희도 자궁스러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포로기 이후 정립된 인간과 거리를 둔 엄격하고 거룩한 신관과 대립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정결과 반대되는 것으로 포용과 관용이다. 

성결에 대한 관심은 본질적으로 경계선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자비로운 삶은 본질적으로 경계선을 넘어간다. 이에 대해 성서학자 마커스 보그는 예수 운동은 자비의 공동체운동이었고 예수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러한 공동체의 일부분이 된다고 말한다. 예수는 자비공동체를 통해 거룩함과 깨끗함을 강조하는 제사장과 바리사이인들의 관습적인 구조에 도전했다. 보그에 따르면,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던 삶의 방식으로서의 "관습적인 지혜"에 도전하고 타파하는 "관습타파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보그는 관습적 지혜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로, 문화의 중심적인 가치,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라는 이해, 좋은 삶의 이미지를 구현한다. 대개의 문화에서 이런 가치는 풍족함, 성공, 체면이다. 예수의 사회적 세계에서는 재산, 가족, 명예, 정결, 종교성이었다. 관습적인 지혜는 매너와 에티켓에서부터 삶의 중심적인 목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걸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실천적인 지침을 제공한다.  

둘째로, 관습적인 지혜는 본질적으로 보상과 처벌에 기반을 한다. 너는 뿌린 대로 거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살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다, 의인은 성공할 것이다. 이런 것들이 관습적인 지혜의 변치 않는 메시지들이다.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것이다. 삶은 명령과 보상, 실패와 처벌의 문제가 된다. 

셋째로, 관습적인 지혜는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사회적으로는 위계적인 세계와 사회적 범주들을 만들어낸다. 다른 역할들에 각기 다른 문화적 가치들이 부여되고, 어떤 사람들은 관습적인 지혜의 기준에 의해 다른 사람들보다 성공적으로 살아간다. 심리적으로는 정체성과 자기존중의 바탕이 된다. 관습적 지혜의 세계에 따라 나는 내가 되며, 그 기준에 얼마나 잘 적응하느냐에 따라 나 자신에 대해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으로 느끼게 된다.  

인습적인 지혜의 중심에는 '안전'을 추구하는 삶이 있었는데,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가르침을 통해 이러한 삶의 방식을 타파하고 하나님을 지혜의 궁극적인 출처로 삼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전환할 것으로 요구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인습적 지혜에 대한 대안적 지혜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는 말과 행동이 일치된 삶을 살았다. 그의 대안적 지혜는 고통의 치유와 열린 식탁의 형식으로 구체화되었다. 예수는 바로 제사장과 바리사이인들이 죄인으로 간주한 사람들과 버림받은 사람들의 편에 서서, 이들을 위해 고통을 치유하고 열린 식탁을 열었다. 

예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들도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한 자리에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이 예수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리새파의 율법학자들이, 예수께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예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저 사람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서 음식을 먹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 말을 듣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코 2장 15~17절) 

성서학자 도미니크 크로산은 세리와 죄인, 매춘부 같은 용어들은 전부 경멸적인 호칭들인데 이런 호칭은 자유롭고 개방적인 교제를 나누어서는 안 되는 사람들에게 붙은 경멸적인 용어들이라고 말한다. 아무나 참석할 수 있는 열린 공동식사로의 하느님 나라는 차별 없는 사회를 축소해 그려내는 차별 없는 식사의 과정으로 당시 제사장과 바리사이인들의 기본가치가 되는 율법적 질서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제사장들의 관심이 성전 제사를 통하여 제의적 정결을 확보하고 유지하는 것이라면, 바리사이인들은 율법 준수에 입각한 일상생활을 통하여 정결을 얻고 지켜 나갔다. 바리사이인들의 음식의 정결을 위한 노력은 유대교의 식탁교제법을 만들어냈고 이 법은 언제 무엇을 어떻게 그리고 누구와 함께 먹을 수 있나를 규정하고 있다. 음식과 그 소비는 제사적 행위로 이해되고 있으며, 따라서 식탁, 부엌, 경작지 등 모든 곳은 성전의 개념처럼 이해되고 있다.  

이런 바리사이 전통에서 식탁교제는 인간의 구원과 관련하여 설명된다. 이렇게 유대사회 세계가 성결의 이념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은 자신의 백성에게 성결을 유지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성결함을 나누도록 하시는 질서의 하느님, 창조자의 비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여 성결은 창조의 사건에 나타난 신의 뜻이요 우주적 섭리였다.  

그러나 예수는 또 각종 질병을 죄에 대한 벌로 이해하는 인과론적 질병관에 근본적으로 도전하면서, 병자도 건강한 사람과 똑같이 평등한 인간임을 선언했다. 또한 그는 부정하다고 하여 유대인 사회의 중심으로부터 축출되었던 사람들을 그의 식탁에 다시 불러들여 음식을 나눔으로써, 정결한 사람과 부정한 사람 사이의 차별을 조장해온 유대인의 사회체제에 상징적으로 도전했다.  

예수는 신이 더 이상 그러한 정결 체계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부정하다고 간주된 사람들의 삶 안에 살고 그의 존재 양식은 '초월'이 아닌 '세속'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특히 여성을 교회가 본받아야 할 모범으로 제시했다. 정결(거룩)의 체계야말로 여성들을 비인간화하는 가장 억압적인 장치로 작동해 왔는데 자신의 운동 안에서 온전한 인간성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했다. 철저한 가부장 문화 속에서 일반적으로 여성들은 언제나 침묵 당하는 자들이며 존재 자체가 부인당한 존재들이었다. 오랫동안 유대사회에서 여성들은 처음에는 아버지에 의해 나중엔 남편에 의해 소유되는 재화로 간주되었다. 예를 들어 십계명의 마지막 항목에는 이웃의 아내나 소를 탐하지 말라고 되어 있다. 

너희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 너희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나 할 것 없이, 너희 이웃의 소유는 어떤 것도 탐내지 못한다.(탈출기 20장 17절) 

이런 전통에서 일부다처제를 허용하는 율법이 만들어지게 되었고 아내가 재물이었기 때문에 남자는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아내를 취할 수 있었다. 이 율법에 따르면 남편이 아무리 학대를 하더라도 여자에는 이혼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다. 유대사회에서 여성을 극단적으로 차별했던 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제의적 오염 때문이었다. 레위기에서 월경이 부정하고 오염이라고 주장한 것은 피는 생명이고 태아에게 영양을 주는 것인데 월경은 피의 유출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이는 여인이면 무조건 성결치 못하고 부정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불법적인 성관계와 오염은 제의적 오염의 근원으로서 여기에 연루된 사람들뿐 아니라 그들의 거룩한 땅을 더럽히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예수는 이런 전통을 통렬하게 뒤엎었고 여성들은 예수의 고난 현장을 지키고 부활을 경험하는 기쁨을 누렸다.   

예수의 인습타파적 행동과 차별 없는 행동은 수많은 기적설화를 통해 절정을 맞이한다. 그 대상들은 혈우증 환자, 정신지체자, 시각․청각장애인, 손발이 마비된 사람 등 당시에는 성전에 올 수 없는 '자격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수의 이러한 행동은 오늘날 기적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당시로서는 주술적이고 마법에 해당하는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다. 이것은 성결법전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다.  

성결법전에서 혼을 부르고 귀신을 몰아내는 행동을 금기시한 것은 가나안인들이 성전이나 산당에서 행했던 일상적인 제사행위였기 때문이다. 바리사이인들은 예수의 그러한 행동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한 악선전은 예수에게는 치명타가 될 수 있는 사안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스스럼없이 자신의 엑소시즘을 행하고  다녔다. 

예수 이후 제도화 과정에서 남성 성직 독점체제 강화  

그러나 매우 혁명적이었던 예수의 가르침은 그가 십자가에서 처형된 후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잊혀졌고 여성과 장애인들의 성전권력과 바리사이인들이 생각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되었다. 그나마 예수와 함께 했던 제자들이나 사도 바오로는 예수의 정신을 실현해보려고 애썼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사람입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라디아서 3장 26~28절) 

그러나 그들마저 사라지자 후계자들은 혁신보다는 당시 주변세계와 타협하는 방식으로 교회조직을 운영해나갔다. 특히 성직지도권이 공식적으로 남성들에게 맡겨져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성서를 교묘하게 재배치했다. 바오로의 권위를 빌려 다른 인물이 쓴 것으로 알려진 디모테오서 같은 목회서신은 여성과 종들의 지위를 매우 악화시켰다. 

여자(또는 아내)는 조용히, 아주 순종하면서 배우십시오. 나는,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조용해야 합니다. 사실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그 다음에 하와가 지음을 받았습니다.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라, 여자가 속아서 죄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가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을 지니고 정숙하게 살면, 아이를 낳는 일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디모테 2장 11~15절) 

이런 내용들은 일면 제도권의 박해로부터 공동체를 지키고 안정화시키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예수와 초기 바오로서신이 보여주고자 했던 성의 평등과 공동체 내의 자유를 훼손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여기서 사제직의 재정립으로 상징되는 교회권력의 직제화가 진행되면서 성직 엘리트의 충원과정이 관례화되고 체계화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러한 직제화의 모델은 주로 로마의 지방행정체계와 가부장제였다. 남성중심으로 성직이 재편됨으로써 여성지도력은 교단에서 축출되면서 여성들은 제단에 올라갈 수 없게 되었다. 

3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디오니시우스는 월경중인 여성은 성만찬에서 제외시키자고 주장했으며 그의 주장은 수세기 동안 권위 있는 판단으로 여겨졌으며 이에 근거해 중세 비잔틴 제국의 법학자 데오도르 발사몬은 월경 중에 교회 제단 앞에서 예배를 돕던 여자집사를 추방하기도 했다. 일부 연구가들은 동방정교회가 여성사제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피의 부정한 기간'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최초로 성서를 그리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해 명성을 떨친 제롬은 월경을 '신의 저주'라고 말하면서 "월경중인 여성보다 더 불결한 것은 없다"고 말했고 교회박사로 인정될 만큼 가톨릭 신학자를 대표하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대표적 저서인 신학대전에서 "남자가 월경 중에 있는 여자와 떨어져 있어야 하는 이유는 맹인, 절름발이, 문둥이 등 불구자들을 임신하기 때문"이라고 경고했다. 

가톨릭뿐만 아니라 개신교의 종교개혁가 존 칼뱅도 "월경은 더러운 병"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성차별 결과 월경하는 여성은 제단에 접근할 수 없었고 제단을 덮어두는 성스러운 제대포는 성소 밖에서 그것을 세탁하는 수녀들에게 건네질 뿐이었다. 예수가 그 당시 가장 격리되고 죄악시되었던 혈우증 여성과 한센병 환자와 접촉해 그들을 치유했던 것을 감안하면 교회는 너무 먼 곳에서 예수를 찾아 나선 셈이다.  

오늘날 가톨릭과 일부 보수 개신교단은 여성들의 성직 임명을 극구 반대하고 있다. 거룩한 제단에 힘 없는 존재들을 세울 수 없다는 것인데 이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최근에는 남여 모두가 평등하지만 신이 부여한 역할이 다르다는 것으로 본질적인 해결을 피하고 있다. 여성이 예수의 협조자로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인정하지만 예수는 자신의 사명을 수여하고 교계적 직무를 위해 여성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교회의 주축을 이루는 사도들이 모두가 남자들이었기 때문에 여성은 사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교 장로회 합동측 총회장을 지낸 임태득 목사 같은 이들은 아예 기저귀 찬 여성은 강단에 설 수 없다고 언어폭력까지 행사한다.  

기성 교회권력이 무리수를 두는 것은 그만큼 여성과 장애인들의 역할과 도전이 커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가톨릭 교회가 여성들과 장애인들에게 문호을 여는 것이 오히려 시대정신에 맞다고 할 수 있다. 로마 교황청이 여성사제직을 찬성하는 수녀회 등을 조사하는 것과 같은 마녀사냥적인 행동보다는 수녀들을 새로운 시대의 동반자로서 받아들이고 원하는 사람들은 필요한 과정을 통해 사제로 인정하는 것이 가톨릭의 미래를 위해 좋을 것이다. 

여성들은 교회의 종이 아니라 교회의 당당한 주인이다. 장애인 역시 마찬가지다. 여성과 장애인이 사제가 되는 것은 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며 종교를 '민중의 아편' 또는 '악의 상징'이라고 주장하는 칼 맑스나 리차드 도킨스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최소한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신의 아들인 예수는 팔레스타인의 가장 가난한 동네인 나사렛의 촌부 마리아의 배에서 잉태했고 성전이 아닌 말구유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여성과 장애인들의 권익을 대변했다. 그것은 교황을 비롯한 모든 기독교인들이 인정하는 예수의 공생애다. 그렇다면 더 이상 여성과 장애인의 사제임명을 막을 명분은 없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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