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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진 친교의 공동체[교황 프란치스코와 하느님의 백성 - 황경훈]

본당은 많은 신자에게 개인적 평안과 위로, 또 그것을 넘어 따듯한 형제자매애를 느끼게 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더욱 강조되었지만 본당은 그 전부터 이미 ‘친교의 공동체’였고, 이제 신자수가 줄어들고 노령화되어 감에도 열심한 이들에게는 여전히 그러하다. 물론 ‘그렇게 체험한 이들에 한해서’라는 단서를 붙여야 하겠지만 말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가 알려진 것만큼 ‘완전한 공동소유’를 실현한 것도 아니고 한 3년쯤 지속되다가 초기 정신이 퇴색해 간 그런 공동체였다고 하더라도, 공동체를 강조하는 가톨릭 전통에서 ‘나눔과 친교’가 핵심이 되어 온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코린토 공동체에서 보이듯 갈등과 분열 또한 극심했지만 반대로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모여 음식을 함께 들며 하느님을 찬양하였고 한마음으로 재산을 공동으로 나누었다’는 사도행전의 기록(2-4장)은 공동체 안에서 맺은 인간 사이에, 또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평탄치 않고 굴곡 많은 관계를 보여 준다.

임성무 대구 정평위 전 사무국장 무혐의’(김수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2019.01.07)라는 기사 제목을 봤을 때 가장 먼저 이 ‘친교의 공동체’라는 말이 떠올랐다. 신자 개인이 본당이나 교구에서 소외되거나 갈등관계에 놓이는 경우가 종종 있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교구의 이름으로 조직이나 단체가 아니라 한 신자를 고소해 사회 법정에 서게 한 것은 아마도 한국 교회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지금 생각해도 실로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기사에 따르면 대교구 측은 임성무 씨가 "사실이 아닌 얘기를 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대구대교구에 대한 잘못된 사실을 믿게 했으며 그 영향력을 고려해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구 최대 일간지 <매일신문>, 대구가톨릭대학, 대학병원, 팔공산 골프장 등 사업체 270여 개를 소유한 막대한 권력의 소유주 대구대교구가 자신의 교구민인 단 한 명의 자연인 평신도를 상대로 그러한 사회법적 조치를 강행해야 했는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과연 이것이 복음 정신이고 친교의 공동체란 말인가. 설사 대교구측이 ‘승소’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싸움에서 이긴 것이며 그리하여 교구의 명예가 회복되리라 정녕 기대했다는 말인가. ‘목자와 양’이라고? 가당치도 않다.

대구대교구 정평위 전 사무국장 임성무 씨가 무혐의 판결을 받았다. (사진 제공 = 황경훈)

대교구가 소속 사제 2명이 5.18 광주민중항쟁을 총칼로 짓밟고 집권한 신군부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에 가담한 ‘시점’이 사실과 다르다는 ‘팩트’의 문제를 들어 임 씨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충수를 둔 것이 아닌가. 시점을 문제 삼는다는 것은 이미 국보위에 가담해 활동한 것을 전제한다는 말이지 않는가 말이다. 더욱이 대구지검 서구지청에서 보낸 ‘불기소 사건기록 및 불기소 결정서’에 따르면, 그 문제는 <SBS>의 '그것이 알고싶다’ 측이 (짧게) 편집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발생한 것으로 확인했다. 또 “(임 씨의) 발언은 대구대교구의 쇄신과 과거행적에 대한 자기반성을 촉구하는 발언이라고 할 것이므로 공공의 이익을 위한 발언”이라고 판단했다. 이를 미루어 본다면 필요한 것은 대구대교구가 신군부정권에게서 희망원을 수탁받은 ‘시점’이 국보위 가담 전후냐 아니냐의 문제를 들어 시시비비를 따질 게 아니라, 일제 식민지배와 군사정권의 부역자 구실을 해 온 과거의 부끄러운 역사를 참회하고 새로 태어나려는 각고의 노력을 하겠다는 다짐이어야 했을 것이다.

사실 그런 다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희망원 사태’를 겪으면서 대구대교구는 쇄신을 약속했다. 2017년 5월 31일자 공지문 ‘희망원 수탁운영을 마치며’에서는 “교회 전반에 걸쳐 철저한 성찰과 반성을 할 것”이며 “쇄신안을 마련하고 잘못된 부분을 하나하나 고쳐 나갈 것”이라고 했다. 특히 교구운영 사회복지시설 전반을 점검하고 “생활인들 중심의 복지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이렇게 약속을 한 뒤에 어떤 쇄신안을 만들어 구체적으로 실천했는지가 명확히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다가 1년 뒤에 나온 교구장의 부활절 메시지는 앞의 ‘성찰, 반성, 쇄신’의 논조와는 매우 달라 보여서 두 문서를 동시에 놓고 보면 뭘 하자는 얘기인지 헷갈릴 정도다. 메시지는 근래에 대교구가 많은 시련을 겪고 있다면서 “예수님처럼 우리도 어둠의 세력이 막아 놓은 무거운 돌을 치우고 무덤 밖 밝은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시련들을 잘 이겨 내고 스스로 쇄신의 길을 걸어 가야 하겠”다고 밝혔다. (공지문과 메시지는 경동현, “교회 사업장의 개혁: 대구대교구의 사례를 중심으로”, 천주교 개혁연대 제2차 토론회 발제문, 2018 12.08에서 재인용) 두 문헌을 나란히 놓고 보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쇄신은 ‘어둠의 세력이 막아 놓은 돌을 치우는 시련을 극복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쇄신위원회를 만들어 놓고도 무엇을 쇄신했는지, 또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명확히 제시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교구쇄신’을 담은 문서를 작성하고 배포했다는 이유(만은 아니지만 그것 때문으)로 팔순의 정은규 몬시뇰이 정직되기도 했다. 역설적이게도 대구대교구는 2019년을 ‘용서와 화해의 해’로 선포했다. 이 역시 앞의 문서들처럼 주체와 객체를 명확히 밝히지 않은 상태에서 누가 누구를 용서하고 화해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진정으로 용서와 화해로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반성과 회개가 먼저 이루어지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그 뉘우친 바를 실천해 나가야 한다. 위 사도행전의 대목을 눈여겨본 독자라면 알겠지만, 초기 공동체에서 신도들은 ‘한마음’이 됨으로써 그런 친교를 실현할 수 있었음을 강조한다. 한마음이 되어 가진 것, 먹을 것을 나누고 하느님을 섬겼다. 그러나 교회사와 인류의 역사가 증명해 오듯이 이는 지극히 어려운 문제요 과제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를 하느님나라를 대망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순례하는 미약한 하느님의 백성으로 그린다. 지성감천이라고 했다. 비록 금이 가고 깨어진 공동체라도 한마음으로 복구하고자 한다면 성령이 응답하시지 않겠는가. 우리는 죽음도 이긴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절망은 없다. 한마음으로 성찰하고 회개한다면, 그리하여 용서와 화해로 나아간다면 친교의 공동체는 봄 새순 돋듯이 새로 피어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와 잘못을 반복하게 하는 구조를 개혁하는 일을 하나하나 실천해 나가야 한다. 이것이 대구대교구를 비롯해 부활을 맞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되어야 할 것이다.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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