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

(편집 : 장기풍)

“그리스도교의 기준은 구체적입니다”

교종, 1월 7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1월 7일 산타 마르타의 집에서 봉헌한 주님 공현 대축일 후 월요일 미사 강론에서 예수님은 구체적인 여인에게서 탄생하시어, 구체적인 분이 되셨고, 구체적인 삶을 사셨던 하느님이 구체적인 죽음으로 돌아가셨고, 구체적인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요청하신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교종은 그리스도교의 기준은 구체적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론 내용.

하느님의 계명은 ‘구체적’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기준’도 미사여구나 추상적인 것이 아닌 ‘구체적’인 것입니다. ‘구체성의 광인’들이었던 성인들에게 전구를 청합시다. 성인들은 우리로 하여금 구체적인 여정을 걸어가도록 도와주고 거짓 예언자들의 착각과 망상에 대해 주님께서 원하시는 구체적인 일들을 식별하도록 도와줍니다. 이는 오늘 첫째 독서 성 요한 사도의 첫째 편지의 “우리가 청하는 것은 다 그분에게서 받게 됩니다.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하기 때문입니다”(1요한 3,22)는 말씀처럼 그분 계명을 지키고 마음에 드는 것을 행한다는 ‘계약’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다가가는 출입문은 열려 있고 그 열쇠는 사도들에 의해 제시됐습니다. 곧,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1요한 3,23)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원하는 것을 용기 있게, 또 넉살 좋게 청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하느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셨고 우리 가운데 한 분이 되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구체적인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의 태에서 잉태되셨고,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으며, 여느 어린아이처럼 자라나셨고, 이집트로 피난 가셨으며, 나자렛으로 돌아오셨고, 아버지와 함께 읽고, 일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배웠으며, 그런 다음 설교를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구체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하느님이시지만 구체적인 인간의 한 사람이 되셨습니다. 인간의 옷을 입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입니다. 그리스도의 살(肉). 이것이 제1계명의 구체화입니다. 두 번째 계명도 구체적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망상적 사랑이 아닌 구체적 사랑입니다. “저는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릅니다.”라고 말하고는 ‘나의 혀에서 나온 험담을 통해 너를 파괴하는 것’, 이것은 안 됩니다. 이런 행동은 사랑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사랑이 참된 사랑입니다. 하느님 계명들은 구체적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기준은 미사여구나 멋진 관념들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입니다. 구체적인 것. 이것은 도전입니다.

요한 사도는 영을 ‘시험’해 보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 안에서 구체화되지만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사랑 안에서 구체화됩니다. 이 구체성은 살로 부대끼지 않고 이웃에 대한 사랑도 상대적이며 “이 사람들은 내 편이지만 저 사람들은 내 편이 아니야”라며 ‘물렁한’ 예수님을 제시하는 거짓 예언자나 생각들이 항상 우리를 엄습하기 때문에 투쟁이기도 합니다. 결국 인간의 살을 취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구체적 사랑을 믿고 말씀의 강생신비와 구체적인 사랑의 위대한 진리에 따라 ‘영’들, 말하자면 영감이 정말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이해하기 위해 식별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짓 예언자들이 세상으로 많이 나갔기 때문입니다.(1요한 4,1) 곧 악마는 항상 우리를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예수님 안에 머물지 못하도록 애쓰고 있으며, 이 때문에 영적으로 깨어 있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저질렀던 죄를 넘어,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마음속에 무슨 일이 있어났는지 묻기 위해 어떤 영감을 받았는지 혹은 어쩌면 ‘주님께 미친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하기 위해 매일 숙고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때때로 우리를 하느님께 미친 위대한 미치광이로 밀어붙이시기 때문입니다. 브라질의 나환자들에게 선교활동을 하기 위해 40년 이상 이탈리아를 떠났던 사람의 광기 어린 열정이나, 이주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늘 여행을 다녔던 성녀 프란치스카 카브리니의 광기를 보십시오. 이들의 공통점은 두려움을 가지지 말고 식별하는 것입니다. 식별하기 위해 누가 나를 도와줄 수 있습니까? 뚜렷하게 볼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는 카리스마를 지닌 하느님 백성, 교회, 한마음으로 뭉친 교회 형제자매들입니다. 영적인 권위를 가진 그리스도인들과 나누는 영적대화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이 혹시 좋은 것인지 살펴보기 위해 교종이나 주교에게 갈 필요는 없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실수하지 않기 위해 내 영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기 위해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을 찾아갑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시작 무렵 이런 식별을 하셨습니다. 악마가 광야에서 그분에게 나타나 세 가지 사항을 제안했을 때, 그 제안들이 하느님의 성령에 따른 것이 아니었기에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악마를 내쫓으셨습니다. 만일 예수님께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우리에게도 일어날 것이고, 우리에게도 악마가 제안을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예수님 시대에도 좋은 뜻을 가졌지만 하느님의 길이 다른 길인 것처럼 생각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 에세니파, 열혈당원 등입니다. 그들 모두 손에 율법을 쥐고 있었지만, 항상 최상의 길은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순명의 온유함이 필요합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 백성은 항상 구체성 안에서, 곧 사랑의 구체성, 믿음의 구체성, 교회의 구체성 안에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교회 규율의 의미입니다. 교회의 규율도 그와 같은 구체성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구체성이 바리사이파나 사두가이파의 철학을 피하면서, 우리가 성장하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체적인 여인에게서 탄생하시어, 구체적인 분이 되셨고, 구체적인 삶을 사셨으며, 구체적인 죽음으로 돌아가셨고, 비록 일부 사람들을 사랑하기가 쉽지는 않더라도 구체적인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요청하십니다.

 

 

“기도는 외로움과 절망에 대한 승리”

교종, 수요 일반접견 교리교육 ‘주님의 기도’ 계속

 

프란치스코 교종은 1월 9일 바오로 6세 홀에서 진행한 일반접견에서 지난주에 이어 ‘주님의 기도’에 대한 4번째 교리교육 “두드리십시오. 열릴 것입니다‘를 주제로 교육을 실시했다. 가르침 내용.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교리교육은 루카 복음을 참고하겠습니다. 사실, 루카 복음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서 출발해 기도로 충만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루카 복음 안에는 매일 교회의 기도에서 바치는 세 개의 찬송가가 있습니다. 바로 ‘즈카르야의 노래’, ‘마니피캇’(성모의 노래), ‘시므온의 노래’입니다. 오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십니다. 루카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기도의 순간에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루카 9,29) 예수님 생애 모든 순간은 그분의 모든 행동을 인도하시는 성령의 입김으로부터 활력을 얻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르단에서 세례받으실 때 기도하셨고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 아버지와 대화하셨으며, 기도하시려 자주 홀로 외딴곳으로 가셨으며, 자신을 배반하게 될 베드로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루카 22,31-32) 예수님께서는 우리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나를 위해 기도하시며, 우리 각자를 위해 기도하신다는 사실은 우리를 위로합니다. 누군가는 “그런데 신부님, 여전히 그렇게 하십니까?”고 반문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아버지 앞에서 그렇게 한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이에 대해 우리 각자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도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저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저에게 필요한 그 기도를 계속해 주십시오.” 이처럼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십시오.

메시아의 죽음조차 기도의 분위기 속에 빠져들어 있으므로 수난의 시간까지도 놀라운 평온함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들을 위로하시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선한 도둑에게 천국을 약속하시고 다음과 같이 외치시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예수님의 기도는 가장 격한 감정과 보복과 복수의 욕망을 약화시키며, 자신의 무자비한 적과 화해시키고 사람을 죽음이라는 적과 화해시키십니다. 또 루카 복음 안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기도하는 법을 배우려는 제자들의 요청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 그들이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께 청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주님, 당신께서 저를 위해 기도하고 계심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기도할 수 있도록, 저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주님, 저희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라는 요청에서 상당히 광범위한 가르침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통해 당신 제자들에게 어떤 말과 어떤 감정으로 하느님께 청해야 하는지를 설명하십니다. 가르침의 첫 부분이 바로 ‘주님의 기도’입니다.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아버지’란 말은 너무 아름다운 말입니다. 우리는 기도시간 내내 아버지라는 말 하나만으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겁니다. 주인이나 의붓아버지가 아닌 진짜 아버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그 무엇보다 먼저 ‘아버지‘로 부르면서 하느님께 청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에게 주신 이 가르침 안에서 기도문을 꾸미고 있는 몇 가지 지시에 대해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확신을 주시려고 몇 가지를 설명하십니다. 예를 들어 친구를 찾아가 잠자리에 든 가족 전체를 귀찮게 하는 친구에 대한 비유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벗이 갑자기 여행에서 돌아와 자신에게 들렀는데 대접할 빵이 없다며 다른 친구를 찾아가 귀찮게 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문을 두드리고 친구를 깨우는 이 사람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이 벗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어나서 빵을 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줄곧 졸라 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다 줄 것이다”(루카 11,9) 이 설명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하는 방법과 꾸준히 기도하기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고 나서 바로 배고픈 아들이 있는 아버지의 예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여기 계시는 여러분 중에 아버지와 할아버지들은 아들이나 손자들이 배가 고파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보채고, 울고 배가 고파 소리 지른다면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 뱀을 주겠느냐?”(루카 11,11) 여러분 모두 자녀들이 먹을 것을 원할 때 원하는 것을 준 경험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응답하시며, 어떤 기도도 받아들이지 않은 채로 남아 있지 않을 것임을 이해하게 해 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아버지이시고, 고통받는 당신 자녀들을 잊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설명들이 우리를 위기에 빠뜨리게도 합니다. 우리의 많은 기도들이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청했을 때 얻지 못했고 문을 두드렸지만 문이 닫혀 있었던 것을 우리 모두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순간들에도 집요하게 청하며 포기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기도는 항상 현실을 변화시킵니다. 우리 주변의 일들이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을 바꾸고 마음을 바꿉시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 모든 이들에게 성령의 선물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대답하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유일한 불확실성은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응답하실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평생 집요하게 청해야 되는 것은 우리 몫이 되겠지만 하느님께서는 대답하실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하느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생선 대신 뱀을 주는 아버지가 아니십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행복에 대한 열망은 언젠가는 성취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시지 않겠느냐?”(루카 18,7) 네, 하느님께서는 올바른 판결을 내려주시고 귀를 기울여 주실 것입니다. 그날은 영광과 부활의 날이 될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그 순간부터 외로움과 절망에 대한 승리입니다.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현실을 바꾼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건들이 바뀌거나 우리 마음이 바뀝니다. 항상 바뀐다는 겁니다. 때로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역사의 무감각 안에서도 그것은 움직이고 있으며 진행 중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기도의 끝, 우리가 기도하는 시간이 끝날 때, 삶의 끝에 무엇이 있습니까? 그곳에는 팔을 활짝 벌리고 모두를 기다리고 계시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러한 아버지를 바라봅시다.

 

 

“믿음은 분열을 조장하는 세상의 영을 이긴다”

교종, 1월 10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1월 10일 산타 마르타의 집 아침미사 강론에서 우리 모두를 위해 심지어 원수를 위해서도 기도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은 믿음이라고 말했다. 교종은 질투심과 시기심의 감정을 키우지 말고 뒷담화를 하지 말라면서 “여러분이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하느님도 사랑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강론 내용.

오늘 제1독서 성 요한 사도의 첫 번째 편지(1요한 4,19-5,4)에서 요한 사도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세상을 이길 수 있으며 거짓말쟁이고 일관성 없는 외형적인 영인 세상의 영에 대항하는 매일매일의 투쟁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진실합니다. 세상의 영은 허영심의 영이고, 힘과 기초도 없이 넘어지는 영입니다. 세상의 영은 축제기간 선물처럼 쉽게 부스러지고 속이 텅 비어 있으며, ‘거짓말의 아버지’로 우리를 속입니다. 세상의 영은 항상 가족과 공동체와 사회를 분열시킵니다. 요한 사도는 우리에게 환상을 따르지 않고 말과 행동이 동일한 하느님 영의 구체적인 길을 제시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느님의 영을 가졌다면 좋은 일을 할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여러분은 보지 못하는 환상이 아니라 보는 것, 만질 수 있는 것, 현실적인 것을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보이는 것을 사랑할 수 없다면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환상입니다. 여러분이 구체적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영은 분열의 영이며, 가정과 공동체와 사회에 끼어들 때 항상 분열을 만듭니다. 언제나 분열이 커지고 증오와 전쟁이 일어납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1요한 4,20) 곧, 세상 영의 자식이며 거짓이며, 겉치레입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묵상하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사랑하는가? 기본으로 돌아가 형제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어떻게 사랑하는지 살펴봅시다.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는 것을 나타내는 세 가지 신호들이 있습니다. 미소짓는 것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할 수 있습니다. 서커스단 광대들은 겉으로는 미소짓지만 마음으로는 자주 웁니다. 무엇보다 먼저 내가 좋아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나를 증오하고 심지어 원수라 할지라도 그들이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웃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사랑하지 않는다는 신호입니다. 첫 번째 신호는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질문입니다. 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가? 모두를 위해 구체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든 원수일지라도 친구이건 아니건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는지 자문해 봐야 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신호입니다. 두 번째 신호는 시기심과 질투심의 감정을 내 안에서 느낄 때 내가 상대방에게 나쁜 일이 생기길 원하는지, 이는 여러분이 사랑하지 않는다는 신호입니다. 그 순간 멈추십시오. 그러한 감정들이 자라나게 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감정들은 위험합니다. 그것들이 자라나는 것을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이웃을 사랑하지 않아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는 가장 일상적인 신호는 뒷담화입니다. 뒷담화는 꿀사탕과 같습니다. 꿀사탕이 맛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계속해 먹는다면 결국에는 배가 아플 것입니다. 왜냐하면 뒷담화는 꿀사탕처럼 맛있어 보이고, 달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파괴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사랑하지 않는다는 신호입니다.

세상의 영에 대항하는 싸움에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삶에서 뒷담화 하기를 멈추는 사람은 하느님과 아주 가깝게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뒷담화를 하지 않는 것이 이웃을 지키고 이웃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영은 믿음의 영으로 이깁니다. 곧, 하느님께서 내 형제자매들 안에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긴 승리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상식적인 인간의 생각이 아닌 오직 강한 믿음으로만 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상식적인 생각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유용하지는 않습니다. 오직 믿음만이 뒷담화를 하지 않고 모두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줄 수 있으며,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시기심과 질투심의 감정을 자라게 내버려 두지 않는 힘을 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성 요한 사도의 첫 번째 서간의 이 대목을 통해 우리에게 사랑을 구체화시키라고 요구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합시다. 그러나 여러분이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형제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사랑하지 않고 미워한다면 여러분은 거짓말쟁이입니다.

 

 

“한반도에서 긍정적인 신호가 감지되고 있다”

교종, 바티칸 주재 외교단 연례 신년연설에서 언급

 

프란치스코 교종은 1월 7일 바티칸 주재 외교단에게 행한 신년연설에서 오늘날 민족주의적 경향의 부상으로 약화될 위험에 처한 국가들 사이의 협력과 다자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모든 민족의 유익을 추구해야 하며 불가피한 타협을 수락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약한 세력을 강한 세력의 탄압이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교종은 연설에서 다자외교의 목적을 설명하면서 건설적이어야 할 국가들 간의 다자외교 시스템을 약화시키는 민족주의적 경향이 다시 부상한다는 위험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바티칸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는 183개국이며, 유럽연합과 몰타기사단이 포함돼 있다. 이날 교종의 연설은 1900년대 역사를 아우르면서 여러 국가가 겪었던 특별한 사건들과 함께 난민문제, 여성에 대한 폭력, 노동문제, 미성년자 성학대뿐 아니라 세계 각 지역의 현안문제들도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특히 교종은 한반도에서 긍정적인 신호가 감지되고 있다면서 현재 진행 중인 대화를 호의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말했다. 교종은 남북공동의 영속적인 해결책이 도출되기를 강조했다. 또한 교종은 지난 10년 동안 많은 이들이 바랐고 추구해 왔던 비핵화가 오히려 강대국들에 의한 한층 더 정교하고 파괴적인 새로운 무기개발에 자리를 내어 주고 있음이 우려된다며 ‘만일 그 어떤 핵무기 사용으로 인해 인류와 환경에 초래할 재앙을 생각한다면 생생한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다고 거듭 우려했다. 

장기풍(스테파노)
전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
2006년 은퇴. 현재 뉴욕에 사는 재미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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