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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1월 3-6일)[프란치스코 교종 최신 강론말씀]
오늘부터 '프란치스코 교황의 최신 강론말씀'을 싣습니다. 재미 언론인 장기풍 씨가 프란치스코 교황의 강론 등을 중심으로 편집하여 며칠씩 간격으로 지인들과 나누는 뉴스레터의 내용을 독자 분들과 유용하게 나누고자 합니다. 허락해 주신 장기풍 씨에게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편집 : 장기풍)

“동방박사처럼 용기를 갖고 예수님께 마음을 열자”

교종,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 삼종기도 가르침

 

프란치스코 교종은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 삼종기도 가르침을 통해 동방박사들이 멀리서 아기예수님 방문은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새로움이며 모든 이를 위한 선물이고 사람이 되신 하느님 예수님과의 만남이라는 기쁨”이라고 정의하면서 동방박사들처럼 항구하고 관대하며 용기 있는 사람이 되자고 초대했다. 가르침 내용.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은 빛으로 상징되는 예수님의 공적이 드러나심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예언서에서 이 빛은 약속된 빛이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예루살렘을 향해 외쳤습니다.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 주님의 영광이 네 위에 떠올랐다.”(이사 60,1) 빛이 왔기 때문에 일어나라는 예언자의 초대는 깜짝 놀랄 만한 것입니다. 이 초대는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던 고난의 유배생활 이후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많은 억압을 경험한 이후 내려진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초대는 예수님 성탄을 기념하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며 베들레헴의 빛에 다다르도록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우리 또한 외적사건의 징후에 머물지 말고 오히려 거기서 다시 시작하여 한 사람의 인간, 신앙인으로서, 인생 여정의 새로움을 살아가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했던 빛은 분명 복음에서 나타났고 사람들과 맞닥뜨렸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고장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가까이와 멀리 있는 모든 이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리스도를 만나는 방식과 그분의 현존에 대한 반응이 여러 가지임을 알려 줍니다. 예컨대 헤로데와 예루살렘 율법학자들은 아기 예수님을 방문을 거부하고 고집을 부린 완고한 마음을 지녔습니다. 빛에 대해 우리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하나의 반응입니다. 그들은 우리 시대에도 예수님 오심을 두려워하고 도움이 필요한 형제자매들에게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헤로데는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했고 참된 선익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만 걱정했습니다. 당시 율법학자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고정관념을 넘어 바라보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있는 새로움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반면 동방박사들 체험(마태 2,1-12)은 매우 달랐습니다. 동방에서 온 그들은 히브리 신앙전통과는 거리가 먼 모든 민족을 대표합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별의 인도에 자신을 맡겼으며, 길고도 위험스러운 여정을 마주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해 메시아에 관한 진실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새로움에 열려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놀라운 새로움이 계시됐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예수님 앞에 엎드렸고 상징적 선물인 황금 유황 몰약을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찾는 일은 여정을 이어가는 항구함뿐 아니라 마음의 관대함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자기 고장으로 돌아갔습니다.(마태 2,12) 이 대목에서 복음은 그들이 ‘다른 길’로 돌아갔다고 전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 때마다 길은 바뀌고 전혀 다른 방식의 삶으로 돌아가며 ‘다른 길’에 의해 우리가 쇄신됩니다. 그들은 각자 마음 안에 겸손하고 가난한 임금의 신비를 품고 ‘자기 고장’으로 되돌아갑니다. 우리는 그들이 겪은 체험을 모든 이들에게 이야기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에 의해 선사된 구원은 이처럼 가까이 또는 멀리 있는 이들, 곧 모든 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 아기를 독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분은 모든 이들을 위한 선물입니다. 우리 또한 잠시 침묵 중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의 빛이 우리 마음속을 비추어 줄 수 있도록 맡깁시다. 두려움으로 마음의 문을 닫지 말고 부드럽고 충만한 빛에 마음을 열도록 용기를 지닙시다. 그러면 우리는 동방박사들처럼 우리만 독점할 수 없는 ‘더 없는 기쁨’(루카 2,10)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예수님께 인도하는 별이시며, 동방박사들과 당신 가까이 있는 모든 이들에게 예수님을 보게 해 주시는 어머니 동정마리아께서 이러한 여정 가운데 우리를 도와주시길 빕니다.  

 

“예수님을 찾기 위해 전혀 다른 여정을”

교종,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 강론

 

프란치스코 교종은 1월 6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집전한 ‘주님 공현 대축일’ 미사 강론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찾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여정을 시작해야 하며, 선택의 길을, 그분의 길을, 겸손한 사랑의 길을 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교종은 모든 민족을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찾게 되지만, 결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찾게 된다고 설명했다. 강론 내용.

‘주님 공현 대축일’이라는 말은 주님의 드러내심을 가리킵니다. 성 바오로가 제2독서에서 말하고 있듯이(에페 3,5) 주님께서는 오늘 동방박사들에 의해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나셨습니다. 이처럼 모든 이들을 위해 오신 하느님의 가장 아름다운 현실이 계시된 겁니다. 모든 나라, 모든 언어, 모든 백성이 그분에게 받아들여졌고 그분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일에 대한 상징은 모든 이들을 비추는 빛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을 모든 이들에게 드러내시는 방법은 놀랍습니다. 예수님께서 왕으로 드러나시면서 복음은 헤로데 임금의 왕궁을 소개합니다. 동방박사들은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마태 2,2)라고 왕궁을 찾아 물었던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예수님을 찾게 되지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찾게 됩니다. 예루살렘 왕궁이 아닌 베들레헴 누추한 거처에서 찾았습니다. 이와 똑같은 역설이 성탄절에도 나타났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시대 온 세상이 호적등록을 하게 될 때였습니다.(루카 2,2) 당시 권력자 중 누구도 역사적인 왕이 자기 시대에 탄생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앞서 길을 닦은 다음 예수님께서 서른 살쯤 되셔서 공적으로 스스로를 드러내셨을 때 복음은 세속적 권력, 정신적 권력에서나 당대 모든 위대한 인물을 열거하면서 역사적 맥락에서 또 다른 장엄한 공현을 보여 줍니다. 당시는 티베리우스 황제, 유다총독 본시오 빌라도, 갈릴래아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와 그의 동생 헤로데 필리포스, 아빌레네의 영주 리사니아스, 한나스와 카야파 대사제가 활동하던 때였습니다.(루카 3,1-2) 그리고 이렇게 끝맺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루카 3,2) 하느님 말씀은 위대한 인물들 중 누구에게도 아닌 광야에 은둔하고 있던 한 사람에게 내려진 것입니다. 이것이 놀라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드러내시려고 세상 무대에 오르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별이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세상을 지배했던 로마의 팔라티노 언덕 위에 나타났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로마제국 전체가 금세 그리스도인이 되었겠지요. 혹은 그 빛이 헤로데 왕궁을 비추었다면 헤로데 왕이 악을 저지르는 대신 선행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빛은 자기 자신의 빛을 비추려는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빛을 비추시지만 현혹하지는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빛을 세상의 빛과 혼동하는 유혹은 항상 있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권력과 무대의 매혹적인 빛을 따라가면서 그것이 복음에 유익한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곳에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의 빛은 겸손한 사랑 안에서 빛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교회 자신의 빛을 발산하려고 바둥거리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태양이 아닙니다. 달에 불과합니다. 비록 그늘을 지니고 있지만 참된 빛이신 주님을 반영합니다. 교회는 달의 신비입니다. 주님이신 그분이야말로 세상의 빛이십니다.(요한 9.5) 그분께서 우리의 빛이십니다. 하느님의 빛은 그 빛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비춥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제1독서(이사 60,2)에서 하느님의 빛이 땅을 뒤덮고 있는 어둠과 암흑으로 가려지지 않고 그 빛을 받아들이는 사람 안에서 빛난다는 것을 떠올려 줍니다. 따라서 예언자는 “일어나 비추어라. 너의 빛이 왔다”(이사 60,1)며 우리를 초대합니다. 일어서야 합니다. 앉아 있는 곳에서 일어나 걸어갈 자세를 갖춰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헤로데의 질문을 받았던 율법학자들처럼 멈춰 서게 됩니다. 율법학자들은 메시아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알고 있었지만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의 일상 옷이 되실 때까지 매일 빛이신 하느님을 입어야 합니다. 빛처럼 소박한 하느님을 입기 위해서는 화려한 옷을 벗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빛보다 성공과 권력의 지상 빛을 더 좋아했던 헤로데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반면 동방박사들은 예언을 실현시켰습니다. 빛을 입으려고 일어섰습니다. 그들만이 하늘에서 별을 바라보았습니다. 율법학자도, 헤로데도, 예루살렘의 누구도 별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찾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여정을 시작해야 하며, 선택의 길, 그분의 겸손한 사랑의 길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 길을 계속 걸어가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만났던 동방박사들이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마태 2,12)고 끝맺습니다.

헤로데가 지시했던 길과는 전혀 다른 길로 간 것입니다. 곧 마리아와 요셉과 목동들이 성탄 때 걸어갔던 길처럼 세상과는 다른 길입니다. 동방박사들은 자신의 거처를 버리고 하느님의 길을 걷는 순례자들이 됐습니다. 오직 여정을 계속하기 위해 세속적인 집착을 버리는 사람들만이 하느님의 신비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학자들처럼 예수님이 어디서 탄생하셨는지 아는 것만으로, 헤로데처럼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그분을 찾아가 만나야 합니다. 그분이 계신 곳이 우리의 자리가 될 때. 그분의 때가 우리의 때가 될 때, 그분의 인격이 우리의 생명이 될 때, 비로소 예언은 우리 안에 성취됩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탄생하시고 우리를 위해 살아 계신 하느님이 되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동방박사들을 본받으라는 초대를 받았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논쟁하지 않고 걸어갔습니다. 바라보는 것만이 아니라 예수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중심이신 그분의 자리에 선 것이 아니라, 그분 앞에 엎드렸습니다. 자신들의 계획에 안주한 것이 아니라, 다른 길을 선택할 태도를 갖추었습니다. 그들의 행동에는 주님과의 긴밀한 관계, 주님을 향한 근본적인 열림, 그분을 향한 전적인 투신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년시절부터 예수님이 벌써 말씀하셨던 것과 동일한 언어, 그 사랑의 언어를 그분과 함께 사용합니다. 사실 동방박사들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드리기 위해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성탄 때 우리는 그분의 축일을 위해 예수님께 약간의 선물을 가져갔습니까, 아니면 단지 우리끼리만 선물을 주고받았습니까? 만일 우리가 빈손으로 주님께 갔다면 오늘 만회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말하자면 작은 선물 리스트를 말해 줍니다. 곧, 황금과 유향과 몰약입니다. 아주 귀한 물건으로 여겨졌던 황금이 첫 번째 선물로 하느님께 바치는 것으로 하느님을 경배했던 것입니다. 이를 행하기 위해서는 첫째 자리에서 자신을 없앨 필요가 있고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믿어야 하며, 자기중심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음 선물은 주님과의 관계를 상징하는 유향입니다. 유향, 곧 기도는 하느님께 올라가는 분향 같은 것입니다.(시편 141,2) 향기를 풍기기 위해 유향이 태워져야 하는 것처럼 기도를 위해서는 약간의 시간을 ‘불태우고’, 주님을 위한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이를 말로만 실천해서는 안 됩니다. 세 번째 몰약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정성을 다해 아마포로 감싸기 위해 사용된 기름이었습니다.(요한 19,39) 주님께서는 우리가 고통을 겪은 육체, 연약한 살갗, 뒤쳐진 사람, 물질적 보상을 전혀 주지 않으면서 오로지 받기만 하는 연약한 사람을 돌보는 것에 기뻐하십니다. 갚을 것이 없는 사람을 향한 자비, 거저 베푸는 무상이 하느님의 눈에는 소중합니다! 거저 베푸는 것이 하느님 눈에 귀합니다. 막바지에 이른 성탄시기 동안 세상의 화려한 무대가 아니라 베들레헴의 빛나는 가난 안에서 모두를 위해 오신 우리의 임금님께 멋진 선물을 바칠 기회를 놓치지 맙시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그분의 빛은 우리를 비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 자녀임을 아는 사람들”

교종, 수요 교리교육 ‘주님의 기도’ 계속

 

프란치스코 교종은 1월 3일 바오로 6세 홀에서 진행된 새해 첫 번째 일반접견을 통해 ‘주님의 기도’에 관한 교리교육을 계속하면서 ‘복음의 혁신’을 강조했다. 이날 교종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의 자녀들임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교리교육 내용.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며칠 전 지낸 성탄의 신비에 비추어 ‘주님의 기도에 관한 교리교육을 이어갑시다. 마태오 복음은 주님의 기도를 전략적 지점에 놓습니다. 곧, 산상수훈 중심에 위치시킵니다.(마태 6,9-13) 그 장면부터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는 호수가 언덕에 올라앉으십니다. 주위에는 가장 친밀한 제자들이 둘러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 있습니다. 이 이질적인 무리가 처음으로 ’주님의 기도‘를 받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산상수훈 안에 주님의 기도가 배치된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마태 5,1-7,27)라고 불리는 이 긴 가르침 안에 당신 메시지 근본을 압축하셨기 때문입니다. 행복선언에 대한 말씀은 파티를 꾸미는 장식과도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관심을 끌지 못하는 범주에 속한 사람들에게 행복의 면류관을 씌우셨습니다. 가난한 사람, 온유한 사람,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겸손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이것이 복음의 혁신입니다. 복음이 있는 곳에는 혁신이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고 재촉합니다. 복음은 혁신적입니다. 지금까지 역사의 변두리로 내몰렸지만 사랑할 수 있고 평화를 건설하는 모든 사람은 하느님나라를 건설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느님의 신비를 마음에 품고 계시는 여러분,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그분께서는 사랑과 용서 안에서 당신의 전능을 드러내십니다.” 역사의 가치들을 뒤집은 이 출입구에서 복음의 새로움이 나옵니다. 율법은 폐지되어서는 안 되지만 원래 의미로 되돌려 놓을 수 있는 새로운 해석이 필요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선한 마음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하느님의 모든 말씀이 마지막 결과에 이르기까지 육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것입니다. 사랑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자신의 배우자 친구 심지어 원수까지도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4-45)

산상설교 전체의 기초가 되는 위대한 비밀이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마태오 복음의 이 장이 윤리적인 가르침처럼 보이고 실천하기 불가능해 보이는 엄격한 윤리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이것이 신학적 가르침이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불타는 떨기 나무’ 앞에서 머무는 단순한 사람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이름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당신 자녀들에게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불리길 원하시고 당신의 권능으로 새롭게 하시길 원하시고 선에 목말라 하며 기쁜 소식을 기다리는 이 세상을 향해 당신의 선의 광채를 묵상하길 원하시는 그러한 하느님의 계시 앞에 머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어떻게 ‘주님의 기도’의 가르침을 소개하시는지 살펴봅시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두 그룹들 간의 거리를 언급하면서 시작하십니다. 먼저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마태 6,6) 위선자들 그룹이 있습니다. 하느님 없이 무신론자와 같은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으려고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잘 나가고 하루 종일 교회에서 활동하거나 매일 교회에 나가지만 다른 사람을 증오하거나 뒷담화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이는 스캔들입니다! 그럴 바에는 교회에 가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이것은 무신론자처럼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간다면 아들처럼 형제처럼 살고 스캔들이 아닌 진정한 증거를 보이십시오.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아버지와의 지속적인 대화와 깊게 연결된 자신의 양심과 다른 어떤 믿을 만한 증거가 없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마태 6,6)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방인들의 기도와도 거리를 두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마태 6,7) 예수님께서는 많은 고대 기도의 필수 전제인 ‘선의의 승리’(청중의 선의를 사로잡는 수사학 기법)를 암시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언자 엘리야가 바알의 사제들에게 도전하는 장면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소리쳤고 춤추고, 자신들의 신이 귀를 기울이도록 많은 것을 행했습니다. 반면 엘리야는 침묵했고 주님께서 엘리야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이교도들은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하는 것을 기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이런 표현을 쓰는 것에 양해를 구한다면 “앵무새처럼 하느님께 말하는 것”이 기도하는 것으로 믿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는 내면에서 이뤄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 아이가 부모에게 청하는 것처럼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 청하라고 말씀하십니다.(마태 6,8) 주님의 기도는 침묵의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시선 아래 두고 하느님 아버지 사랑을 기억하면 충분합니다. 기도가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느님께 있어서 당신의 은총을 얻기 위해 희생이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께서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께서는 기도할 때 단지 우리가 당신의 사랑스러운 자녀들인 것을 발견할 수 있도록 우리가 당신과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을 열어 두길 원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사설] 앞으로 나아갈 길 제시하는 프란치스코 교종

 

바티칸 홍보부서 편집주간 안드레아 토르니엘리는 사설에서 프란치스코 교종이 미국 주교단에 보낸 서한에서 제시한 ‘보편 교회가 나아갈 길’을 설명했다. 내용.

프란치스코 교종은 현재 미국 시카고에서 피정 중인 미국주교단에 대한 개인적 친밀감의 표현으로 보낸 이번 서한에는 성학대 문제에 대한 교종의 시각과 오는 2월 바티칸 회의에 임하는 태도가 드러나 있다. 교종은 지난 12월 21일 바티칸 관료들을 대상으로 한 연설에서 이 주제를 단호하고 강력한 방식으로 폭넓게 다룬 바 있다. 이제 교종은 미국 주교단에 보낸 서한을 통해 미성년자 및 취약한 이들에게 자행되는 권력과 양심의 남용을 비롯한 성학대 문제를 검토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교회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함으로써 이 문제의 뿌리에 접근하고 있다. 교종은 서한에서 “교회의 신뢰도가 심각하게 하락하고 약해졌다”면서 이는 이러한 범죄, 무엇보다 그 죄악을 부정하고 은폐하려 했던 교회의 시도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서한의 핵심은 이 문제와 관련해 교종이 제시하려는 해결책에서 찾을 수 있다. 교종은 겉으로 봤을 때는 도움이 되고, 유익하고 필요한, 심지어는 옳은 것처럼 보이는 행동이더라도 만약 그것이 악에 대응하는 방식을 ‘조직문제’ 정도로 축소하는 것이라면 그 행동 속에는 ‘복음의 향기’가 빠져 있으며 이를 과도하게 신뢰하는 태도를 경계하라고 강조했다.

성학대 범죄를 ‘인사문제’ 수준으로 축소된 교회에서 ‘복음의 향기’를 기대할 순 없다. 그러한 교회는 은혜로운 구원의 힘과 침묵 중에 매일 일하시는 성령의 작용으로 지난 2000년 동안 교회를 인도하신 그분의 현존에 대한 믿음 대신 전략, 조직, 모범사례 등에만 의지한다. 최근 몇 년 간 교종은 성학대 문제 근절을 위한 보다 적절하고 엄격한 규칙들을 도입해 왔다. 이와 관련한 더욱 자세한 지침은 오는 2월 전 세계 주교회의 의장들이 교종과 일치 안에서 모이는 회의를 통해 결정될 전망이다. 그러나 이에 더해 우리 사고방식의 변화(메타노이아)를 비롯해 기도하는 방식, 권력과 재물에 대한 태도, 권위의 행사, 서로와 우리 주변 세상을 대하는 방식에 변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그러한 지침들도 아무런 효과가 없다. 신뢰는 마케팅 전략을 통해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신뢰는 분열과 내부적 갈등을 극복할 줄 아는 교회가 얻는 결실이 돼야만 한다. 여기서 말하는 교회란 교회 자신의 것이 아닌 빛, 교회를 지속적으로 비추는 빛에 대한 숙고를 바탕으로 행동하는 교회다. 또한 교회 자체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는 교회며, 교종이 말한 바와 같이 자기 자신 안에서 용서와 자비를 체험하고 그것을 자기 자신 안에서 꾸준히 체험함으로써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며 회심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신자들과 사목자들로 구성된 교회다.

장기풍(스테파노)
전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
2006년 은퇴. 현재 뉴욕에 사는 재미동포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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