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우 신부] 1월 13일(주님 세례 축일) 이사 42,1-4.6-7 사도 10,34-38 루카 3,15-16.21-22

성탄시기를 마무리하는 끝자리에 교회는 주님의 세례를 기념합니다. 이번 성탄시기를 보내면서 제 개인적으로 공감이라는 단어에 마음이 참 많이 머물렀습니다. 공감(Sympathy)이라는 단어의 뜻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그리스어로 ‘함께’라는 뜻을 가진 ‘sym’과 ‘열정, 고통, 연민, 비애’등의 감정을 뜻하는 ‘pathos’가 합쳐진 말입니다. 결국 공감이라는 것은 인간의 감정, 그 중에서도 특별히 격동적이고 마음이 끓어오르는 감정을 함께 공유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고요한 밤에 이루어진 예수님의 탄생은 저에게 있어서 역설적이게도 그 무엇보다도 격동적이고 극적인 사건으로 다가왔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 그건 분명 세상과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 넘치는 공감의 표현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사람을 살펴보아도 그렇습니다. 바로 목자들입니다. 사회의 지도층이나 권력가들이 아니라 일상적인 노동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당신의 첫 모습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렇게 ‘인간의 모습을 취하실 필요가 없는 분’이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신 모습, 지극한 공감의 결과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 주일 기억한 주님의 공현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이 이스라엘 민족들에게만 존재한다는 구약의 약속을 뛰어넘어 세상 모든 민족들을 향해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날입니다. 복음은 동방박사들로 대표되는 이방인들에게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세상 모든 민족들을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공감을 다시 한번 그려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주님의 세례사건을 통해 또 다시 공감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됩니다.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공감은 ‘세례받음’이라는 구체적 행동으로 드러납니다. 인간의 모습을 취하실 필요가 없는 분이 인간이 되어 세상에 오신 것처럼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는 분이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공감은 궁극적으로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하느님을 향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버지 역시 하늘의 소리를 통해 아들의 공감에 화답하고 계십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렇듯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에게 공감하라고 당신 아들을 보내신 하느님께 있어서 예수님은 오늘 1독서의 말씀대로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이사 42,1)였던 것입니다.

주님의 세례. (이미지 출처 = Pixabay)

우리는 주님의 세례를 통해 두 가지의 공감하는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첫 번째는 구체성입니다. ‘세례’라는 구체적 행동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주님처럼 우리 역시 이웃에게 공감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구체적 지향이나 행동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구체성을 잘 실현시키기 위한 두 번째 방법이 바로 그 현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오신 예수님께서는 회개의 현장인 요르단강으로 나아가셨습니다. 인간에게 공감하시기 위해 인간의 ‘삶의 자리’로 오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회개의 세례가 이루어지고 있는 그 자리로 가신 것입니다. 더불어 예수님의 세례는 그분의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것입니다. 앞으로의 삶을 통해 우리는 인간을 향한 그분의 구체적 공감을 매 순간순간마다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는 ‘구체성’과 ‘현장’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공감의 방법을 예수님께로부터 배우게 됩니다. (세례의 순간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셨다’는 오늘 복음의 표현은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2)라는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결국 예수님 공생활 시작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는 첫 순간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또 다른 의미의 창조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받는 세례는 역시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절실히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요즘 교구별로 서품식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속한 교구도 성탄이 지나고 얼마 안 지나 서품식이 있었습니다. 성탄시기의 서품식, 하느님께 공감하고 세상을 향해 공감하려는 새사제들을 보았습니다. 오늘 독서의 표현대로 하느님의 종으로서 하느님께서 붙들어 주시기를 청하며(이사 42,1) 제단 앞에 엎드린 그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그분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공감하려 했던 저의 첫 순간도 새삼스레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세례성사를 베풀며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할 새 사제들에게도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말씀이 전해지기를 청해 봅니다. 잊지 못할 정도로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서품식장을 떠나 자신만의 광야로 나아가게 될 (세례 직후 주님께서는 광야로 나아가셨습니다) 새사제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유상우 신부(광헌아우구스티노)

천주교 부산교구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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